1 경험의 지도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사항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과'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아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사물을 탐색explore '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다는 말은, 가장 중요하게는 그 사물이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낸다는 뜻이다. 세부적으로 사물의 감각적, 물질적 특성을 정밀하고 객관적으로 밝혀낸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지식으로, 대개는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아이가 머뭇거리며 주위를 탐색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아기는 아장아장 걷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값비싸고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상을 만지려고 손을 뻗는다. 먼저 눈으로 조각상의 색깔과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난 후, 조각상에 손을 대 보고는 그것이 매끈하고 차갑고 무겁다고 느낀다. 그때 갑자기 엄마가 나타나 아기의 손을 잡아 내리면서 "이건 절대 만지면 안 돼." 라고 말한다. 아기는 지금 막그 조각상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중요한 지식을 몇 가지 배웠다. 먼저
- 원문에서 동사(explove), 형용사lerkoralory), 명사(exploration의 형태로 자주 언급되는 이 단어는 문맥에 맞게 탐험, 탐색 탐구적 - 하다)로, 동사형일 경우 때로 '살피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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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의 감각적 특성을 분명히 파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배운 건, 조각상에 손을 대면 위험하며 그것을 만지기보다는 그대로 두고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아기는 조각상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관해 실증적 관점에서 접한 동시에, 사회와 문화 속에서 결정된대상의 지위'를 배웠다. 실증적 관점에서 접한 대상의 감각적 특성은그 대상에 내재된 특성으로 간주된다. 한편 대상의 지위는 대상의의미, 다시 말해서 대상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아이가 접하는 대상들은 모두 이렇듯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이는대상을 통합된 전체로 경험한다. 모든 대상에는 '본질'과 '의미'가 있는데, 이 본질과 의미는 서로 구별되지 않을 때가 많다.
대상의 의미, 특히 어떤 대상 근처에서 실제로 탐색한 결과로 밝혀진 의미는 자연스럽게 대상 자체에 동화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그대상의 존재가 근접 원인 혹은 자극으로 작용하여 지금의 행동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대상의 의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상의 한 부분으로서, 그 대상이 부리는 마법과 다름없다. 이 마법은 대상의 객관적인 감각 특성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으로 결정된 대상의 의미로 인해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서운 사람을 보았어요."라고 말한다면누구나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인식한 대상의 특성은 맥락의존적이고 주관적이지만, 대상에 대한 설명은 즉각적이고 구체적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위협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주관적인 감정과 인식이라는 점을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상의 의미를 대상의 속성으로 보는 것 혹은 애초에 대상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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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이야기와 신화의 특성이다. 이야기는 경험의 본질을 날것 그대로 정확히 잡아낸다. 뭔가가 무섭다. 누군가가 짜증 난다, 사건의 조짐이 좋다, 음식이 맛있다 같은 것 말이다. 적어도 기본적인 경험 차원에서는 그렇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이런 마술적 사고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비합리적'인 감정적 반응을 할 때가 많다. 좌절감과 분노, 집념과 욕망을 그 감정의 근접적인 원인이 된 사람이나 상황 탓으로 돌리는 건 경험의 마법에 빠지는 것이다. 제아무리 냉철한 순간이라도 우리는 '객관적' 이지 않다(그리고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또 영화나 소설에 대해서는 기꺼이 의심을 내버리고 빠져든다. 문화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거나 움츠러든다. 여기에는 유명 지식인이나 스포츠 스타, 영화배우, 정치 지도자, 교황, 이름난 미인, 직장 상사는 물론이고, 우리를 혼돈으로부터 보호하는 내재적 가치와 이상을 구현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포함될 수 있다. 또한 그 인물이 곁에 있지 않아도 그의 상징만으로도 영향을 받는다. 마치 중세인들처럼 말이다. 지금도 유명인이 걸쳤거나 만들거나 사용한 물건을 손에 넣으려고 기꺼이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실증주의가 태동하기 이전, 자연스러운'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대상의 객관적 특성이 아니라 대상의 의미, 즉 대상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 신화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현대의 과학적 사고로 개념화한 대상의 형식은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모두 빠져 나가고 남은 무의미한 껍데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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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실증주의 이전 시대에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즉 정서나 감정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대상의 감각적 특성에 깃든 '의미'를 중심으로 인식했다. 사실 실생활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대상의 구체적인 감각적 특성과 더불어 그 대상이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안다는 의미이다. 이를 동기적 관련성 motivational relevance 이라고 한다.
대상의 감각적 특성을 탐색하고 알아내려면 일단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인다. 때문에 대체로 대상의 동기적 관련성을 먼저 경험한 이후에 대상의 감각적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실증주의자와 경험주의자 들은 대상의 감각적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사실이는 우리의 정서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단서를 제공하는 범위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가 대상의 감각적 특성을 탐색하는 건 단순히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여 그 대상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그 자체로는 즉각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에 주목하고, 대상의 '감각적 특성'과 '동기적 관련성'을 구별하기까지는 수세기에 걸쳐 종교와 원시 과학, 과학 분야에서 지적 전통의 발전과 훈련이 필요했다. 이 사실은 어쩌면 신화가 과학 분야에서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며, 지금껏 인류의 진보에 기여해 왔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초파리 따위를 부단히 연구하는 일에 열정을 불태우는 건 아직도 적잖이 신화가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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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실증주의가 태동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사고했을까? 사물은 객관적 사물이기 이전에 무엇이었을까? 이는 대답하기 무척 어렵다. 실증 과학 이전 시대의 '사물'은 현대인의 관점에는 사물 그 자체로도, 사물의 의미 측면에서도 유효하지 않다. 한 가지 예로 '태양 sol'을 이루는 물질의 본질에 관한 의문은 실증주의 이전 시대의 '과학자'인 연금술사들의 마음을 수백 년간 사로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태양이 거기에만 존재하는 균일한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는다. 설령 그런 물질의 존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중세 연금술사들이 가정한 이 가상 물질의 특성에는 분명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연구 인생 막바지를 중세인의 사고방식을 연구하는 데 바친 칼 융은 태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태양은 우선 순금을 의미하며, 연금술에서는 태양과 순금이 같은 기호로 표시된다. 하지만 철학에서 말하는 금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금이 아니듯이 태양은 단순히 금속으로서의 금도, 하늘에 떠 있는 구체도 아니다. 태양은 때로 금속에 숨겨진 활동성 물질을 의미하며, 이 물질은 (연금술로) 추출하면 붉은 팅크가 된다. 태양은 때로 광선을 내뿜는 천체를 의미하며, 태양 광선에는 마술적 효과와 변형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금이면서 동시에 천체이기도 한 태양은 붉은빛을 띠고 뜨겁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활성 황을 함유하고 있다. 연금술에서는 이 붉은 황 때문에 태양이 금처럼 붉은빛을 띤다고 본다.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금이 붉은 빛을 띠는 이유는 구리가 섞여 있기 때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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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는 키프리스(비너스) 로 해석되고 그리스 연금술에서는 변형 물질로 언급되기도 했다. 붉고 뜨겁고 건조한 성질은 이집트 신화 속 어둠의 신 세트(그리스 신화의 티폰)의 전형적 특징이며 그 악한 성질은 연금술에서의 황과 마찬가지로 악마와 관련이 깊다. 티폰이 그의 왕국을 금단의 바다에 세웠듯이 태양도 그 중심이 바다에 있는데, 거기엔 '대략 감지할 수 있는 물'과 '감지하기 어려운 물이 있다. 이 바닷물은 해와 달에서 추출된다.
활성 태양 물질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태양에서는 소위 '발삼'이라고 불리는 물질이 떨어지는데 이 물질은 레몬과 오렌지, 와인을 생산하고 광물로는 금을 만들어 낸다. 10
이 설명은 중세 특유의 상상적, 신화적 연상들이 얽혀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런 환상성 때문에 연금술에 관한 문헌은 살펴볼 만하다. 구시대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과학사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주관적 해석 도식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말이다.
그곳(인도양)에는 하늘과 땅,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남성과 여성의 심상이 담겨 있다. 그곳이 영적이라는 말은 그럴싸한 표현이다. 물질적이라는 말 역시 진실이다. 천상과 같다는 말 역시 거짓은 아니다. 세속적이라는 말 역시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1
연금술사는 사물 그 자체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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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 가정은 추측에 바탕을 둔 문화적 '해설'을 아무 의심이나 인식 없이 수용한 결과이며,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중세 사람들은 '도덕적' 세계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광석과 금속까지도) 완벽을 추구했다. 연금술사에게 사물은 대부분 그 도덕적 특성으로 설명된다. 사물이 정서, 감정 혹은 동기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물은 관련성 혹은 가치, 다시 말해 정서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분류됐다. 대상의 관련성은 서사와 신화의 형식으로 설명됐다. 융이 제시한 예에서처럼 태양에서 황과 같은 물질적 측면은 부정적이며 포악한 특징을 나타낸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감정'을 배제하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자신의 경험을 공통의 이해에 바탕한 객관적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느낀 감정은 분명 '실재' 한다.
신화가 사라진 시대
연금술사들은 감정과 감각을 구분하지 않았고, 경험에서 느낀 감정을 당연시했다. 우리는 사물에서 감정을 배제했고, 그 결과 사물을 놀라우리만큼 조작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물에 의해 생겨난, 더 정확히는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우리는 실증 과학 이전의 신화적 세계를 잃었다. 적어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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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무의식 차원에 남아 있는 가치 체계로 오늘날의 뛰어난 기술력을 제어해야 하는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데카르트와 베이컨, 뉴턴이 등장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의미가 풍부하고 도덕적 목적의식에 고취된, 영적으로 활기찬 세계에 살았다. 도덕적 목적의식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우주의 구조와 그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려 주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따르면서 한때 이 세계에 존재했던 영적 존재들은 사라져 버렸다. 실험이 등장하면서 신화적 세계는 사정없이 파괴되었다. 융은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중세 사람들이 본 세상은 지금과 어찌나 다른지! 그들에게 지구는 영원히 고정되어 우주 한가운데 멈춰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돌며 열심히 온기를 드리우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지극히 높은 분의 애정어린 보살핌을 받는 신의 자녀였고, 신은 인간을 위해 영원한 복을 준비해 뒀다. 타락한 세상에서 들려 올라가 썩지 않고 기쁨이 가득한 존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모두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이런 삶이 꿈에서조차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자연 과학은 오래전에 이 사랑스러운 베일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13
중세 사람들 모두가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누리진 않았을 터이다. 머릿속이 지옥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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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그렇다 해도 이들은 적어도 현대의 우리들처럼 과도한 의심과 도덕적 불확실성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증주의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종교는 믿을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였다. 종교관이 사회를 지배했다. 그저 여러 이론 중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됐다. 이런 현상은 서구에서 시작되어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위대한 과학자와 인습 파괴자 들은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거나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 하늘에는 신이 없다는 것, 눈에 보이는 하늘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 그 이야기들이 과거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말이다. 갈릴레오가 발견한 달 표면에 있는 산들이나 케플러가 발견한 행성의 타원 궤도처럼, 과학계의 굵직한 발견들은 천상의 완벽성을 증명하는 신화적 질서를 명백히 거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과학이 밝혀낸 새로운 현상들은 신화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증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이것들 역시 그동안 세계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해 주던 전통적 현실 모형의 완결성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신화 속 우주에서는 사람이 우주의 중심에 있었다. 객관적 우주에서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을 차지했다가, 나중에는 태양마저도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인간은 더 이상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예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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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고 말았다.
과학적 세계관은 신화적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우리가 신화라는 편리한 환상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자 그에 근거한 도덕률 역시 함께 사라졌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00년도 더 전에 이 문제를 명확히 짚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한다면 그와 함께 그리스도교 도덕을 신봉할 권리도 포기한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체계이며 종합적으로 사유된 전체적 견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주요 개념을 해내 버린다면 그로 인해 전체가 붕괴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무엇이 자신에게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알지 못하며 알 수 없다고 전제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며 인간은 이 신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하나의 명령이다. 그것의 기원은 초월적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모든 비판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 있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신이 진리일 때만 진리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신에 대한 믿음과 함께 일어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실제로 영국인들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도덕을 보증하는 것으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더라도, 그들의 도덕은 단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 평가의 지배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며 그리스도교적 지배가 강렬하면서도 깊숙이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의 표현에 불과하다. 영국적 도덕의 기원은 망각되어 버렸으며 그것이 존립할 수 있는
정당성이 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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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14
이론의 전제가 거짓으로 드러나면 이론 전체가 폐기된다고 니체는 말했다. 하지만 기독교 도덕관은 여전히 평범한 서구인의 가치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 무신론자든, 식자층이든, 인습 파괴자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평범한 서구인은 살인하거나 도둑질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 사실을 타인에게, 때로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숨기려 들 것이다. 또 실천하지는 못할지언정 원론적으로는 이웃을 자신과 똑같이 대하려 할 것이다. 서구 사회(와 점점 더 많은 사회) 15를 지배하는 원칙들은 여전히 개인의 가치, 즉 개인의 고유한 권리와 책임에 대한 신화적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범죄 피해자들은, 설령 자신도 가끔 죄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하늘을 향해 '정의'를 구현해 달라고 외치며 법을 의도적으로 어겼다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현대의 실증적 사고 체계와 신화적 정서 및 행동 체계는 역설적이지만 공존하고 있다. 전자는 신식이고 후자는 구식이다. 전자는 과학적이지만 후자는 전통적이며 미신적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말로는 무신론자가 됐지만 성향은 명백히 종교적이며 '도덕적'이다. 현대인이 진실이라고 믿는 신념과 행동하는 방식은 더 이상 합치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여전히 자신의 경험에 초월적 가치(의미)가 있다는 듯 행동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지는 못한
* (우상의 황혼》(20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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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추상적 사고 능력이 스스로를 얽어매는 올무가 된 셈이다. 추상적 사고 능력 덕분에 현대인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얻었지만,그 대신 자기 존재의 의미와 유용성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 이 문제는 종종 비극으로 여겨졌고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 철저하게 다뤄졌다. 니체는 이런 현 시대의 문제를 신이 죽었기 때문에 생긴 필연적 결과로 보았다.
밝은 아침. 등불을 밝혀 들고 장터에 나와 “신을 찾소이다! 신을 찾고 있소!" 라고 쉴 새 없이 부르짖었다는 광인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없는가? 그 당시 주변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었기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왜, 신이 길이라도 잃었나? 한 사람이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어버린 거야?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아니면 어디 숨어 있는 건가? 우리한테 겁먹은 거야? 길이라도 떠났나? 다른 곳으로 가 버렸나? 사람들은 이렇게 떠들며 폭소를 터뜨렸다.
광인은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어디로 가시었는가.” 그가 외쳤다. “내가 대답해 주마. 그대들과 나, 우리가 신을 죽였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자다. 어찌 우리가 그럴 수 있었을까? 바닷물을 전부 마셔 버릴 힘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을 쓸어 버릴 빗자루라도 주었는가? 지구를 대양으로부터 떼어 냈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지구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또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가?계속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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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말이다. 아직도 위나 아래가 남아 있기는 한가? 무한한 무의 공간을 표류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텅 빈 공간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는가? 점점 추워지고 있지는 않은가? 더욱 어두운 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도 등불을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사토장이들이 신을 매장하고 있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지 않는가? 신이 썩는 냄새가 아직도 나지 않는가? 신 또한 썩는다.
신은 죽었다. 신은 여전히 죽은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다른 존재도 아닌 신을 죽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가 겨눈 칼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 누가 우리 손에 묻은 이 피를 닦아 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가 이 육신을 씻어 낼 수 있을까? 어떤 속죄 의식을, 어떤 성스러운 행위를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행위의 고귀함은 우리가 짊어지기에 너무 크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그저 그럴 가치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16
현대의 우리들은 부조리하고 불운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인생에 내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처럼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모순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실험이라는 위대한 방법론을 무기 삼아 득세한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는 신화를 죽였고, 신화는 부활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선조들의 계율을 '실천' 한다. “살인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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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간 경험적 사고의 혜택 없이 살아온 선조들을 이끌었던 바로 그 신화적 규범이 여전히 우리의 행동을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 규범은 영향력이 너무나 크고, 적어도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떨어뜨리는 이론 앞에서도 유지되고 확장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은 더 있다.
존재의 가벼움과 불확실성
고대 문명이 애초에 터무니없는 사상을 기반으로 일어났다면 어떻게 그토록 세련되고 찬란한 문명으로 번성할 수 있었을까? 문화가 살아남고 발전한다는 말은 그 밑바탕이 된 사상이 타당하다는 말이 아닐까? 신화가 미신적이며 원시적인 이론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효과적이었을까? 어째서 살아남은 걸까?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순수 이성주의자들의 이념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음에도 몇 세대 만에 본질적으로 무용함을 드러냈다. 종교적 사상에 바탕을 둔 전통 사회들은 경우에 따라서 수만 년간 그 본질이 변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오랜 세월 살아남은 전통을, 그 유용성을 무시한 채 그저 잘못된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과연 합리적일까? 어쩌면 그것이 겉보기에 너무나 비합리적이라서, 왜 옳은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는 고대 철학의 오류가 아니라 현대 철학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48 - 의미의 지도
우리는 조상들이 설명하는 '영적 세계'란 현대의 물질세계'를 원시적으로 개념화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적어도 현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신화 속 우주는 현대 과학의 우주와 같은 곳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위에 있는 신도, 우리 아래에 있는 악마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위'와 '아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조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선조들 역시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대상을 알지 못했다(하지만 선조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역사의 발상지인 고대 수메르의 창조 신화를 살펴보자.17
지금까지 우주 창조 신화에 관한 제대로 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수메르인들이 생각했던 창조의 결정적인 순간을 재현해 볼 수 있는 암시는 몇몇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남무 여신(그녀의 이름은 원시 바다를 상징하는 상형문자로 쓰여 있다)은 '하늘과 지구를 낳은 어머니 이자 '모든 신을 탄생시킨 시조'로 표현된다. 우주적인 동시에 신적인 총체로 그려지는 원시의 물이라는 주제는 고대 우주 창조 신화에서 꽤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물 덩어리는 처녀생식으로 한 쌍의 부부 신을 낳은 최초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그녀는 남녀의 원리를 구현하는 하늘 신(안)과 땅 신(키)을 낳는다. 이 최초의 부부는 히에로스가모스(신성 결혼)로 하나가 된다. 둘 사이에서는 대기의 신 엔릴이 태어난다. 엔릴이 부모를 떼어 놓았다고 서술하는 문헌도 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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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과 땅의 분리에 관한 우주 창조 신화의 주제 또한 널리 전파되었다. 18
이 신화를 보면 고대인들이 세계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잘 알 수있다. 세계는 원초적 바다에서 출현했고, 그 바다는 만물의 어머니이며, 하늘과 땅이 신의 행위로 갈라졌다. 이런 믿음에는 어떤 의미가있을까?
우리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있어 한없이 무지함에도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이런 신화적 이야기들이 과학적 설명보다 방법론적으로 열등할 뿐 그 기능과 의도는 같은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이런 터무니없는 추측으로 인해 현대인의도덕 추론과 행동 체계에 종교적 전통이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수메르인의 신화적 세계는 현대인의 객관적 현실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는 객관적 현실 세계 이상이자 이하이다. 객관적 현실 이상이라 함은, 고대의 원시 세계가 우리가 더는 현실의 일부로 취급하지 않는 정서나 의미 같은 현상을 포함한다는 측면에서이다. 한편 객관적 현실 이하라 함은, 수메르인들은 창조 과정에 관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이다.
신화는 고대의 원시 과학이 아니다. 신화는 과학과 질적으로 다르다. 과학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특성'이나 '분명한 목표가있을 때 거기에 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설명한다. 반면 신화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의미 차원의 세계'를 설명한다. 신화가그린 세계는 '인식의 장'이 아니라 행동의 장'이다. 신화는 사물을그것이 지닌 정서적 가치와 동기적 의미의 측면에서 설명한다. 수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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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인의 하늘(안)과 땅(키)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만물을 낳은 위대한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다.
우리는 실증주의 이전 시대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려다가 결국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익숙하게 여기고 높이 평가한 나머지 그것이 전부라고 추정하고, 그 외의 사고방식은 모조리 과학적 사고라는 이상에 못 미치는 근삿값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사고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사물의 가치를 밝히고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가치에 따라 '범주화 한다는 말은 사물을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분류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수메르인의 '하늘'은 그들의 정서와 행동에 유사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들을 모아 놓은 범주이다. 땅을 비롯한 다른 모든 신화적 범주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에 '신'이 된다. 신은 행동을 관장하며, 적어도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범주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금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메르인은 무엇보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와 사물의 가치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원시 과학의 특성으로 치부하지만 그들이 설명한 현실은 사실 현상, 즉 행동 무대로서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수메르인들도 우리만큼이나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실증 과학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써 왔다. 다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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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두가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밝히려고 한다. 실증 과학은 과거, 현재, 미래의 현상과 더불어 정적인현상과 동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훌륭한 과학 이론은 현상을 밝힐 뿐아니라 변화도 예측하고 통제하도록 해 준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마주할 때 일어난 '정서'는 그 사물의 일부가 아니다. 따라서 정서를비롯한 모든 주관적인 현상은 과학적인 논의에서 제외하거나, 적어도 그 사물의 실제 특성으로 정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물을 파악하고 논의하고 비교하는 실증 과정은 수고롭지만, 집단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비교적 불변하는 특성을 밝히는 도구로는 굉장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유용한 방법론은 사물의가치를 밝히는 일, 다시 말해서 사물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논의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밝히는 데에는 소용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그 결과로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할지를 밝히는 데에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평가는 필연적으로 도덕 판단이 되고 만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얻은 정보는 도덕 판단의 길잡이 역할은 할 수 있지만, 옳고그름을 판별해 주지는 못한다. 설명의 영역에서는 실험이라는 실증적 방법론이 설득력 있고 보편적인 검증 과정을 맡아 주지만, 도덕의영역에는 이런 과정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 판단을 건너뛸 수는없다. 모든 사회와 개인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아니든 도덕 판단을 한다. 행동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치 판단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행동해야 하며, 행동은 우리가무수한 대안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선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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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곧 가치 판단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충분치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어려운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전통적으로 도덕 판단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 도덕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내려졌다.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암묵적, 명시적으로 작동하는 신화적 관습에 따라 선택되었다. 그런데 신화적 관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우리는 신화적 관습을,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니체는 다시 한 번 가치와 의미에 대한 현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짚어 낸다. 이제 문제는 예전처럼 “특정 문화적 제약 속에서 어떻게행동할 것인가?"가 아니게 되었다. 니체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그런 질문 자체에 의문을 표했다.
우리의 도덕학자들은 도덕적 사실을 임의적인 발췌나 우발적인 기준(예를 들면 주변 환경, 계급, 종교, 시대정신, 기후와 지역 등)에서 아주대략적으로 알았을 뿐이고, 각기 다른 민족과 시대, 과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흥미조차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 문제를 전혀 주시하지 않았다. 많은 도덕을 비교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도덕 문제가부각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모든 도덕학'에는 한 가지, 도덕 그 자체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에 어떤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19
이러한 '도덕 문제'는 오늘날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현실적으로보편적 도덕률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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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오늘날 인류는 엄청난 파괴력과 창조력을 지닌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에 비등하게 존재의 가벼움과 불확실성, 혼돈에 휩싸여 있다. 끊임없는 문화 교류와 비판적 사고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오랜 세월 내려온 전통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신념 없이는 살 수가 없고, 과학으로는 신념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 부상한 이후로 우리가 의지하게 된 신화가 거부한 신화보다 더 세련되고 완전했던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20세기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은 겉보기에도 그것들이 대체한 과거의 신념 체계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진정한 예술성과 창의성을 겸비한 창조물에 수반되기 마련인 신비하고 불가해한 요소도 결여되어 있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근본 명제는 합리성과 논리성, 명확성을 갖추었지만 끔찍이도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세상은 거대한 이념 투쟁으로 갈가리 찢겨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는 쉽게 속아 넘어간다. 한 예로 서구에서 뉴에이지 운동은 전통적 영성이 쇠락하면서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나타난 것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작은 것에 연연하고 거대하고 터무니없는 문제는 묵인하고 넘어간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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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우리가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면, 이성적으로 납득되고, 더 나아가 경탄하고 믿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까? 현대 인류가 지닌 막강한 힘 때문이라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동기가 부여된 셈이다. 게다가 시기도 좋다. 세기말 무렵 공산주의 체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새천년이 다가왔다. 우리는 니체의 예언대로 자행된 20세기의 거대한국가통제주의 실험의 여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주의 신조에는 '생을 부정하려는 의지'가 어설프게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 신조를 생각해 낸 인간과 종족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나는 몇몇 대규모 실험을 통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이 생을 부정하며 그 뿌리를 잘라 낸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를 바란다. 지구는 크고 사람들에게는 아직 힘이 남아 있다. 따라서 귀류법을 통해서 그런 실질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대가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지불한다 해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다.20
개인으로서는 집단 속에서든 인간의 행동 양식에는 어떤 자연적인' 혹은 감히 '절대적' 이라고까지 말할 법한 제약이 있는 듯하다. 몇몇 도덕적 추론이나 이론 들은 명백히 '틀렸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 본성에는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태동기부터 소멸기까지 소련식 공산주의를 특징 짓던 관념적 순수 이성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행동을 이끌어 갈 가치 체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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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낼 수 없음이 드러났다. 어떤 체계는 관념적으로는 이치에 맞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 작동하는,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불가해한 체계보다 더 이치에 맞다고 해도 그렇다. 사회적 상호작용 양식은 사회적 행동의 본보기로 작용한다는 면에서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인데, 그중 어떤 것들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며,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 양식을 추종하며 실천하던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논리적이고 지적이며 계획적인 체계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비이성적이고 초월적이며 불가해하고 종종 어처구니 없기까지 한 인간적 특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묻겠다. 인간이란 그리도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거늘,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지상의 모든 축복을 듬뿍 주고 행복의 바다에 흠뻑 잠기게 하여 오직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물거품만 표면에 샘솟게 해 보라.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를 먹거나 세계사의 존속을 궁리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 보라. 그리하더라도 그는 순전히 배은망덕과 악의만으로도 당신에게 비열한 속임수를 쓰려 할 것이다. 심지어 당밀 과자를 잃을 위험이 있더라도, 그저 자신의 치명적이고 기상천외한 요소를 이 모든 긍정적인 양식에 밀어 넣고 싶어서, 가장 치명적이며 효용성없는 짓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바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계속 지니고 싶어 하던 환상적인 꿈이며 저속한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지 자연 법칙이 일정표를 무시하고 아무것도 원하지 못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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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막 두들겨 대는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입증해 보여야 하듯이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설령 인간이 피아노 건반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
도, 자연과학과 수학으로 이 점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는 사리를 알지 못하고 배은망덕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비뚤어진 행동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혼돈과 파멸을 초래하고 온갖 괴로움을 자초하면서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것이다! 그는 세상에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저주할 수 있으니(이것이 인간의 특권이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주요한 차이점이다). 어쩌면 저주만으로 자신이 원하던 바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자신이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만약 혼돈과 암흑과 저주, 이 모든 것 역시 계산하여 도식화할 수 있어, 사전에 계산할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 이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이성을 다시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인간은 이성을 없애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미쳐 버리기라도 할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은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매 순간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동굴 생활을 해서라도! 그러니 아직까지 없던 일이라고 하여, 욕망이 무엇에 좌우되는지 모른
다고 하여, 어찌 죄를 짓지 아니하고, 찬미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21
지금 우리는 인류 전통의 지혜가 담긴 신화와 의례에 관한 자료들을 대부분 온전히 접할 수 있다. 지금껏 살았던 거의 모든 인류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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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암묵적 가치 체계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형성해온 신화와 의례를 정확히 설명하는 자료를 갖게 된 것이다. 이들 신화는 적절하게도 성공적인 인간 존재의 본질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이 방대한 종교 철학 자료를 주의 깊게 비교 분석한다면, 인간의 동기와 도덕의 본질을 잠정적으로나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신화의 공통적인 근원을 규명하는 일은, 진정한 인류 보편의 도덕체계를 만드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경험 과학의 정신과 종교의 정신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보편적인 도덕 체계를 확립하면, 개인의 내적 갈등은 물론 개인 간, 집단 간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엄격한 실증연구를 바탕으로 삼는 심리학에 근거하여 여러 신화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은 하나의 수렴적인 검증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이상과 현실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신화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단순히 세계 무대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논의하거나 원시 신앙을 살펴보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전자는 전통적으로 종교에서 행했던 방식이고, 후자는 전통적으로 과학의 추정 방식이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의미 체계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통합해야 하는데, 이 의미 체계에는 경험의 가치가 위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신화는 객관적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주관적 현실의 본질을 밝히는 현상학자의 관점을 취한다. 신화 속에는 “지금 일어나는 경험을 어떤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심상의 형태로 담겨 있다. 여기서 경험의 의미란 곧 그 경험이 우리 정서와 동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 결과 어떤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는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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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신화에서 얻게 되는 정보는 “현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그렇게 바뀌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 문제에 관한 해답일 것이다. 이상적 미래상을 그리려면 비교와 대조 대상으로서 현 상태를 진단해야 한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가치는 지금 떠나려는 장소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현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즉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하위 질문이 포함된다.
1. 현실은 어떠한가? : 우리가 경험하는 현 상태에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2. 현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3.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현 상태를 이상적인 상태로 바꾸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현재 상태를 진단하고 그것을 기초로 행동의 목표를 명확히 세우면 현재 행동의 결과를 평가하는 확실한 기준이 생긴다. 이때 목표는 머릿속에 떠올린 가상의 상태이며, 바람직한 동기나 정서가 존재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목표를 수립한다는 것은 곧 여러 동기 및 정서상태의 이상적 위계에 대한, 다시 말해 무엇이 선인가에 대한 이론을 수립한다는 말이다. 목표는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지식을 고려하여 세운 완벽한 미래상으로, 계속해서 세부적, 전반적으로 현재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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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비교된다. 완벽한 미래상이란 신화적 용어로 풀이하자면 '약속의 땅'으로, 일종의 영적(심리적 상태가 될 수도 있고 정치적 유토피아(국가)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이 둘을 동시에 의미할 수도 있다.
“현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이상적 미래상을 그려야 한다. 이상적 미래상은 현 상태에 대한 해석에 바탕을 둔다. 그리고 현실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현 상태가 정서적으로 수용할 만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하려면, 현실을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로 바꾸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이 무엇인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수정된다. 그리고 그 답이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한 그것은 신화적 관점에서 우리 지식의 일부가 된다. 신화의 지식 구조는 "현실은 어떠한가?”, “현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려진 세계the known'는 탐험을 마친 영토이자 안전하고 익숙한 장소이고 세속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세계는 신화와 이야기 속에서 공동체, 왕국, 국가로 비유된다. 이런 서사 속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특수하고 제한된 의미를 이상적인 미래상과 비교하여 이해하고, 그 틀 안에서 적절한 행동 양식을 구축하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현실과 이상을 비롯해 현실을 이상으로 바꾸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모형을 그리며, 그 과정에서 환상과 행위로 나타나
60 · 의미의 지도
바람직한 미래 상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현재 상태
그림 1. 알려진 세계의 영역과 구성 요소
는 자신의 소망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타인(개인, 가족, 공동체)의 소망을 견준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사회 계약이다. 따라서 알려진 세계는 암묵적, 명시적으로 전통과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영토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공유하는 확실한 영토'는 신화 속에서 인생의 고정된 측면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문화가 인간이 처한 환경에서 비교적 불변적 요소임을 고려할 때 일리가 있다.
'알려진 세계에 관한 이야기', 다시 말 애국심을 고양하는 의례, 민족 영웅 서사시, 문화적 ·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화와 상징들은 탐험된 영토를 묘사하며 의미망을 짠다. 이 의미망을 공유하고 있으면 의미를 놓고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다. 경기의 규칙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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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수용하면 규칙을 놓고 다툴 필요 없이 경기를 할 수 있는 것과마찬가지이다. 그러면 평화와 안정, 잠재적 번영의 시대가 온다. 좋은 경기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경기는 늘 더 나은 경기를 가로막기도 한다. 더 나은 경기를 할 가능성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알려진 세계를 설명하는 역할에 있어서 신화는 가장 막중한책임을 맡고 있다. 하지만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면 알려진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지식을 얻게 된다.
우리 모두는 현실과 이상을 비롯해 현실을 이상으로 바꾸기 위해 해야 할 행동에 대한 모형을 만든다. 그리고 행동의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행동을 수정한다. 하지만 단순히 행동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도 바꿔야 한다. 현 상태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이상적 미래상을 재구성해야한다. 이것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이고, 그 변화가실현되는 과정은 굉장히 복잡하다. 하지만 신화 속에는 이런 변화의본질이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처럼 획기적인 변화를 다룬 신화들은 기본적으로 길way'의 구조를 취한다. 문학 비평가 노스럽 프라이 Northrop Frye는 길이라는 개념이 문학 작품과 종교 문헌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언급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행위는 문학에서 흔히 메타포로 활용되는 길 떠나는 행위와 비슷하다. 이야기 속에는 가야 할 길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서 여정을 떠나는 사람이 등장한다. 여정journey 이라는 단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하루, 다시 말해서 낮 동안을 의미하는 주르jour나
62 - 의미의 지도
주르네journee와 연관이 있으며, 이야기 속에서 여정은 대개 하루의 여정, 즉 해가 떴다가 지는 사이에 느린 이동수단으로 다닐 만한 공간을 일컫는다. 여정이라는 메타포를 단순하게 확장하면 이 하루의 순환은 인생 전체를 상징하게 된다. 하우스먼의 시 기상나팔」("일어나라 청년아. 여정이 끝나면 잠을 잘 시간이 충분하리라.")에서 아침에 일어나는 행위는 곧 죽음으로 끝나게 될 생의 여정을 지속한다는 의미의 메타포이다. 이 심상의 원형은 「전도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전도서는 누구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낮 동안 일하라고 촉구한다.
'길'이라는 단어는 언어가 메타포적 비유를 겹겹이 쌓아 가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영어에서 '길way'이라는 단어는 가장 흔하게 어떤 방식이나 방법을 나타내는데, 이때 이 방법이나 방식은 순차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을 암시하며, 이런 반복은 우리를 메타포의 핵심인 길로 이끈다. .….… 성경에서 '길'은 보통 히브리어 '데렉derek' 과 그리스어 '호도스hodos'의 번역어인데, 성경은 시종일관 우리를 목적지로 이끄는 곧은 길과 우리를 호도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굽은 길을 매우 강조해서 대비한다. 곧은길과 굽은 길이라는 메타포는 기독교 문학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단테의 『신곡』을 읽다 보면 세 번째 줄에 잃어버린 혹은 잊힌 길에 대한 표현이 나온다" 나는 올바른 길을 잃었네."), 길이라는 메타포는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흔히 팔정도라고 불리는 덕목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교에서 말하는 도 역시 아서 웨일리Arthur Waley 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way'로 번역했는데, 나는 이 단어가 향하여 가다head-going'를 의미하며, 급진성을 대표한다고 본다. 도교 경전인 『도덕경』은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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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메타포적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인데, 동양에서 흔히 쓰는 경구로 표현하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지만 『도덕경』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 결국 '도' 역시 어느 정도는 특징지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도교에서 말하는 길은 구체적으로 '계곡 길'이며, 겸손과 몰아我, 모든 행위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휴식 상태, 즉 무위無爲를 향해 가는 길이다. 22
'길'은 인생의 여정이며 목적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길의 내용은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구체적인 여정을 말한다. 반면 길의 형식은 어떤 중심 사상을 받아들이고 따르려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말한다. 이런 본성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답을 찾는다.
이 길의 중심 사상은 구체적으로 네 종류의 신화로 드러나며, 앞서 제기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극의 형식으로 더 온전한 해답을 제시한다. 네 종류의 신화는 다음과 같다.
1. 현재 혹은 기존의 안정된 상태를 묘사하는 신화(현 상태는 낙원으로 묘사될 때도 있고 폭정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2. 기존의 안정된 상태를 위협하거나 희망을 주는, 예기치 못한 이례적인 사건의 발생을 묘사하는 신화
3. 예기치 못한 이례적인 사건의 발생으로 기존의 안정된 상태가 깨지고 혼돈이 도래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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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미래 상태바람직한미래 상태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현재 상태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현재 상태하장이례적 정보혼돈(미지의 세계
그림 2. 메타 신화로서 길의 순환
4. 혼돈으로부터 안정을 되찾는 과정을 묘사하는 신화(낙원을 되찾거나 폭정이 다시 시작된다.)
길이라는 메타 신화는 현재와 미래, 현재를 미래로 바꾸는 방식을설명하는 특정한 관념(신화)이 구축되고 필요에 따라 완전히 재구축되는 방식을 보여 준다.
태초에 신의 은총을 입었던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그 결과고통스러운 현 상태로 추락하여 낙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소망을 품는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은 이러한 메타 신화의 한 예이다. 이는
제1장 경험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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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독교 도덕률은 이상적 미래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재건을 목표로 삼는 하나의 '행동양식'으로 봐야 한다.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며, 오래전 잃어버린 낙원을 재건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제는 매우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주제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도 영원히 자의식을 벗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그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끈질긴 열망 때문일 것이다.
메타 신화에서 보면, 길은 출발지와 종착지가 같다. 그 지점은 바로 우리의 도덕 지식, 즉 신념이 조건부로 확립된 상태를 말한다. 신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한 신비가 어느 시점에서는 그동안 믿고 따랐던 행동 양식을 파고들어 와 그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였을 때의 행동 방식은 아동기 환경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을 수 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환경이 변하면 한때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던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인생계획과 목표도 바뀐다.
알려진 세계(현재의 이야기)는 미지의 세계(혼돈)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경험에 확실하고 예측 가능한 체계를 부여한다. 미지의 세계에도 나름의 특성이 있다. 하지만 혼돈을 처음 마주할 때 우리는 혼돈의 객관적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감정에 미치는 영향, 정서적 가치로 인식한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일단 놀란다. 이 놀라움에는 걱정과 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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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이 뒤섞여 있으며, 이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을 때 경험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예상 밖의 일'이라는 말은 곧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기대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곧 우리의 지식이 온전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장소에 있다는 것은 혼돈에 휩싸여 있다는 말이다. 그곳에서 뭔가 새롭게 배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혼돈에 휩싸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혼돈에 휩싸일 때 우리는 겁을 집어먹는다. 알려진 세계에서는 두려울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세계 너머는 공포가 지배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린다.
하지만 이런 보수적인 전략이 늘 통하지는 않는다. 현재 상태에 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이 미래를 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는 스스로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를 수정해 나가야 한다. 이때 요령이라면 안정감을 잃지 않도록 조금씩 수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 알려진 세계에 수정을 너무 많이 가하면 혼돈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고 수정을 너무 적게 가하면 현재 상태에 고착되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미래가 다가오는 순간 혼돈에 빠지고 만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돈을 맞이하면 우리가 알던 세계는 뜻하지 않게 허물어져 내린다. 그때는 말 그대로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지의 세계가 불시에 등장하는 상황을 되도록 회피하려 든다. 이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보호해 주는 문화의 '이야기'를 온전히 지켜 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이다.
제1장 경험의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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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걸림돌을 만난다.불행히도 재앙 역시, 그것이 우리가 초래한 것이든 아니든 곧잘 일어난다.걸림돌에 적응하듯 우리는 재앙 역시 우리가 처한 환경의변치 않는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해 왔다.인생의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듯이 우리는 재앙도 해결할 수 있다.하지만 그 과정에는 더 큰 대가가 따른다.우리는 재앙에 적응하고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기에.재앙을 이겨 내고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수도,혹은 완전히 파괴당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