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립하는 형제들
자발적으로 미지를 마주하는 영웅의 여정은 미지를 자애로운 존재로, 마르지 않는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뒤바꾼다. 경험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마르지 않는 힘과 능력을 얻은 영웅은, 필요에 따라 집단의 바깥에 서며, 자신이 획득한 힘과 능력을 무기가 아니라 도구로 사용한다. 영웅은 집단과의 동일시를 삶의 목표로 삼기를 거부하고 자기 양심과 영혼의 명령에 따라 살려 한다. 영웅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의미를 희생하지 않고, 의미를 좇음으로써 비극적인 인생의 조건에도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신념 체계에 관한 논의에서 '악'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악'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종교를 중시하지 않는 문화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구식 용어로 치부되고 인기를 잃었다. 한때악으로 규정되던 행위는 이제는 그저 불공평한 가정·사회·경제 체계의 결과로 인식된다(요즘 들어 예전만큼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견해이다). 또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잔인하고 파괴적인 범죄 행위가신체적 질병이나 선천적 결함의 발현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요즘은보통 악한 행동을 공포와 고통의 미학에 사로잡힌 사람이 저지르는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로 보지는 않는다.
리카르트 앙드레, 헤르만 우제너,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모음집을편찬한 이후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홍수 신화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퍼져 있다. 홍수 신화는 모든 대륙(아프리카는 희박하지만)과 다양한 문화층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우선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로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차례 혹은 여러 차례 발생한 대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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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인해 홍수 신화가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널리 퍼진 신화가 지질학적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사건에서 기인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대다수 홍수 신화는 어떤 의미에서 우주적 리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락한 인간이 살던 옛 세계'는 물에 잠기고, 시간이 흐른 뒤 물의 '혼돈'에서 신세계가 출현한다.
홍수 신화 가운데 꽤 많은 전승에서 홍수는 인간이 죄(종교적 과오)를 범한 결과 일어난다. 때로는 단순히 인간을 파멸시키고 싶은 신적 존재의 소망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 주된 원인은 인간의 죄인 동시에 세상의 노쇠에 있다. 우주는 단지 존재한다는, 즉 생존하고 창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서히 기운이 쇠하여 결국 붕괴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우주가) 재창조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바꿔 말하자면, 홍수는 새로운 천지창조를 위해 새해 축제 기간 동안 상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즉 '세계의 종말'과 죄 많은 인간의 종말을 대우주적 규모로 실현하는 것이다. 449
이집트 창조 신화에서 위대한 아버지를 상징하는 왕 오시리스에게는 그와 전혀 다른 악한 쌍둥이 동생 세트가 있는데, 세트는 결국 오시리스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4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류는 이 위대한 이야기의 교훈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인류가 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끝내 악이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잔인하고 선혈이 낭자했던 20세기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악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의 존재까지 부인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 눈에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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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띄지 않는 것이 바로 악마가 가장 바라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문화의 본질과 생성 방식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위대한 아버지인 문화는 우리 주위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낯선 것은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신성한 공간을 한정함으로써 우리를 미지로부터 보호한다. 문화가 생성되는 과정의 본질은 전 세계에 널리 퍼진 영웅 신화에 잘 드러난다. 영웅은 혼돈의 용을 자발적으로 마주하고 용의 몸을 갈라서 그 조각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그는 지나치게 노쇠한 폭군을 몰아내고 폭군의 손아귀에서 처녀인 어머니를 구한다. 이 같은 영웅 신화는 세계의 양면적인 본질을 드러낸다. 자연은 한없이 창조적인 동시에 파괴적이다.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인 사회 역시 구성원을 억압하는 동시에 보호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책에서는 영웅이 홀로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이는 우리 이야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경험의 구성 요소들이 지닌 근원적인 양면성은 자연과 사회만큼이나 어둡고 파괴적인 인간 개개인에게도 해당된다.
신화는 혼돈과 질서는 물론 모든 인간에 내재된 악한 본성을 인격체로 담아낸다. 인간의 어두운 측면은 영웅의 적수이며, 자발적으로 다가가서 미지를 탐험하는 대신 미지와의 대면을 회피하거나 미지지의 존재를 부인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적수는 사회를 쇄신하는 대신왕에게 간언을 하여 사회의 몰락을 부추긴다. 이 적수의 심상은 '악이라는 현상 자체와 마찬가지로 수세기에 걸쳐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두렵지만 유익한 일이다. 인류에게 이같이 유익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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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와 집단의 기억에 '악'을 담아낸 목적이다. 한 예로 기독교 전통에서 만든 악마의 심상은 악의 본질을 드러내는 훌륭한 사례이다. 암묵적, 명시적으로 악마를 모방하면 재앙이 초래된다. 악마의 특징을 묘사한 이야기들은 원한과 증오와 교만과 질투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 준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규칙 위반이나 폭력, 공격성, 분노, 고통, 실망, 불안, 공포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나쁜 결과를 낳았던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다. 때문에 인생은 끝없이 복잡해진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450“무엇이 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반드시 메타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선'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계속해서 적절히 찾아낼 것인가이다. 그렇다면 '선'이란 도덕 지식을 구축하는 과정이 왕성하게 일어나도록 돕는 환경이자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악인가?'의 문제도 이와 유사하게 다뤄야 한다.
악은 창조적 탐험을 거부하며 기를 쓰고 저항하는 것이다. 교만하게 미지를 거부하며, 사회를 이해하고 초월하고 혁신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결하고 용감한 사람들을 그들이 고결하고 용감하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다. 악은 어둠을 사랑하기에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을 퍼뜨리려 한다. 세계의 노쇠를 가속화하는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는 악한 영혼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런 행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로 쓸어 파괴하려는 신의 욕망을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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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한다.
거대한 악은 적어도 돌이켜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대개 (적어도 해석상으로는) 타인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수없이 세우고 역사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홀로코스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홀로코스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이 그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무슨 행동을 했고, 무슨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또 도대체 무엇이, 누가 독일 사회로 하여금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명령을 따르는 마당에 도대체 히틀러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획득한 절대 권력의 유혹에 저항하려면 얼마나 인격이 올곧아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계속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인격에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은 사회 환경의 제약 아래에 놓여있다. 우리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할 때, 주위 사람들은 그 잘못에 대해 불평하고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의 신경증적 성향을 억누른다. 만약 당신의 결점을 지적해 주고, 당신이 자신의 결점을 의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구세주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히틀러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히틀러도 단지 인간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히틀러도, 스탈린도, 이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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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도 모두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포악하고 퇴폐적인 성향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한계 때문에 대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기분에 따라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는 까닭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권력자가 아니기에 주위 사람을 난폭하게 대하는 선에서 만족하고는 스스로를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자부한다. 우리는 타인을 자기 뜻대로 굴복시키기 위해서 공격하고 힘으로 제압하며, 힘이 없을 때는 자신이 아프다거나 나약하다는 점으로 동정심을 이끌어 내고 교묘히 타인을 조종하려 한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사회가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헌신하며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고 가정해 보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중에 히틀러처럼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권한 부족이 도덕성과 곧바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왕들은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폭군이 되거나 타락한 삶을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폭군으로 살거나 혹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산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함으로써 “그런 악한 역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그 밖에도 스탈린 치하의 소련,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 등)과 같은 도덕적 재앙을 일으킨 이들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재앙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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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치명적인 적수, 악한 쌍둥이 형제를 알아보고 이해해야 한다.
구세주로 표상되는 인간의 영웅적 성향은 인간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다. 하지만 영웅에 '대항하는 성향도 영원히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끝없이 부인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존재를 고통 속에 몰아넣으려는 욕망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 박힌 본성이다. 위대한 극작가와 종교 사상가 들은 우리 내면의 악한 본성을 적어도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이야기와 심상으로 전달했다. 현대의 분석적 사상가들과 실존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생각을 '상위의식' 차원으로 추상화하여 논리적이며 의미론적인 형식으로 담아냈다. 이제는 자료가 충분히 쌓였기 때문에 우리는 악의 초상화를 명확히 그려 낼 수 있다.
적수의 출현, 발달 그리고 표상
사탄이라는 '인격체'는 종교와 신화를 통틀어 현존하는 악의 표상 중 가장 발전된 형태일 것이다. 얼핏 이 '인격체'는 공격성과 같이 구체적인 인격 특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는 하나의 개인적 혹은 사회적 '과정'을 표상한다. 악마는 전체주의를 발전시킨 영혼이다. 이 영혼은 이성적 사고를 우위에 두고 완고하게 자기 이념을 고수한다. 오류의 존재와 변칙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한 가지 적응 방식에만 의지한다. 그 결과 악마는 어쩔 수 없이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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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세계를 증오하게 된다. 이 같은 영혼의 특성은 본질적, 인과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 이 불가분의 관계는 개인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인격으로 개념화된다.
악마는 비극적인 인생의 조건에 원한을 품고 인생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이는 지적 교만으로 볼 수 있는데, 인생의 조건이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의 발달하면서 만물이 죽음으로 물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세계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지금 우리가 해석한 현재 상태가 견디기 어려운 상태이더라도, 절대적 신념이나 교만, 생에 대한 원한에 얽매이고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해석이 바뀔 수도 있다.
악마는 힘없고 나약한 인생은 존재 가치가 없다며 인류를 몰살하려 한다. 20세기에 악마는 특히나 악마의 심상이 무용하다며 폐기해버린 사회에서 끔찍한 고통을 초래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고통에 빠져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악한 본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과 스스로를 더 잘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가 가진 힘은 더욱 커져 가고, 더불어 우리가 심리적 통합을 이루고 자의식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도 함께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귀한 영혼은 자기 자신에게 경외심을 갖는다. 451
지난 14년간 악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될수록 나는 사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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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신화에 더욱더 매료되었고, 서구 사상에서 사탄을 다루는 이야기가 차지하는 위상에도 궁금증을 품게 됐다. 악마에 대한 사은 기독교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과적으로 서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신약』및 『구약에서 사탄을 직접 언급한 사례는 거의 없다(놀라울 만큼 적다. 지옥에 관한 이렇다 할 묘사도 없고, 지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하늘에서 일어났던 천사들의 반역과 전쟁에 관해서도 에둘러 약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죄인이 죽음 후에 맞게 될 무서운 심판에 대한 언급도 없다).
나는 지옥의 지배자 사탄에 대한 전통적, 문학적 표상이 '진정한 신화'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과 문헌에서 나타난 사탄의 모습은 마치 안개에 에워싸인 산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나는 사탄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 교리와 구전 그리고 단테와 밀턴의 문학 작품을 통해 접했다. 유년기에 나는 기독교 교육을 그다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이것저것 읽는 와중에 주워들은 풍문뿐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예수회가 죄의 대가에 관해서 한 무시무시한 설교라든가,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사탄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말이다. 『실낙원』을 예로 들면 사탄은 하늘나라의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존재였으나 자기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반역을 일으킨다. 하나님에게 패한 사탄은 뉘우치지 않고 지옥으로 쫓겨났고 거기서 영원히 죽은 죄인들의 영혼을 다스린다. 나는 이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사건이 실제일 리가 없다고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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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의 뱀과 악마의 관계가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내가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아담과 이브에게 자의식의 빛을 가져다 준 신이 태초에 만물을창조한 창조주보다 더 '높은 영'이라고 생각한 부류도 있었다. 또 영지주의자들은 흔히 낙원(기존의 안정적인 차원)으로부터 추방된 사건을상위 차원'으로 옮겨 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여겼다. 중세 기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상이 발전했다. 중세 기독교인에게 원죄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러온 '다행스러운 과오'였다. 이 말은 곧 기독교인들에게 낙원에서 쫓겨난 사건이 그 자체로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 결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내려오게 됐다(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는점에서 유익한 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인류를 혼돈으로 내몬 에덴동산의 뱀까지도 하나님의 도구', 즉 선택의 자유와 악마의 유혹처럼 문제의 소지가 존재하는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 나가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자애로운 하나님의 도구로 해석될 수 있다(루시퍼라는 이름 역시 빛을 가져온 자'를 의미한다).이나 교만과 오랫
나 역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가 이성동안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기독교 내부의 교조적 세력은 과학이 곧 이성이며, 이성이 곧악마라는 등식에 따라 과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교회가 새로이 등장한 과학적 진리에 반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한때 잘못 적용되었다고 해서 신화 속 사상이 사상으로서 타당성을 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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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니다. 이성적 사고 능력은 실제로 의심의 여지없이 강력한 힘을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이성적 사고가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파괴적인 역할만을 하는지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내 머릿속에서는 악에 대해서 모호한 연관성을 지닌 수많은 사상과 이야기가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과 함께 맴돌았다. 예를 들면 노트르담 대성당이 프랑스 혁명 당시 '이성의 신전'으로 바뀌어불리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악에 대한 사상과 이야기를 명확히이해하고 악의 본질을 논리적 혹은 정서적으로 파악하여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분명히 이해하려면 그것을 명확히 정의하는 '온전한 집합'을 형성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악에 관한 사상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들은'기지'나 '미지'에 관한 사상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재가 뒤섞인 '자연적 범주를 이룬다. 게다가 악이 선과 마찬가지로 고정되어 있지않기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물론 악이 완고하게 고정된 것을 추구하기는 한다).
악은 교만, 원한, 질투, 증오와 같은 동기 및 정서 상태와 관련이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와 동일시할 수 없는 '역동적 과정'이다. 한 예로 공격적 행위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는 그것이 발현된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마치 단어가 어느 문장이나 문단, 책이나 문화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악은 살아 있는 콤플렉스'이다. 악의 본질은 신화와 문학, 상상 속에서 악이 취한 '인격'을 살펴보면 가장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인격은 시간의 흐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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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개인의 삶과 도덕률이 극적으로 변하는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악의 메타 속성을 지닌다.
악마의 이미지는 좋든 싫든 적어도 서양에서 악이라는 개념이 취한 형태이다. 우리는 아직 악마라는 신화적 표상을 잊고 지나쳐도 좋을 만큼 악에 대한 명시적 모형을 만들지 못했다. 현대인은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낡은 개념이라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합리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교만한 생각이다. 심리학이 발전한 현대는 악한 본성에 사로잡히는 것이 어느 때보다 위험해지게 될 기술력을 갖게 됐지만, 그럼에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조상들보다 악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조상들은 적어도 악이라는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
한 예로 (비관적인 데다 불평등하긴 하지만) 원죄라는 엄정한 기독교 교리를 수용하는 사람은 적어도 '악의 존재'를 '인정'했다. 원죄는 적어도 인간의 내면에는 본질적이며 유전적인 악한 성향이 있다는 믿음을 퍼뜨렸다. 이 개념을 믿으면 자신의 행동과 동기가 명백히 선하게 보일 때조차 마음속의 악한 성향이 무심결에 우위를 점하지 않도록 늘 면밀히 자기 행동과 동기를 살피게 된다. 원죄에 관한 교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느 때라도 악을 범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게 만들고, 신화 속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지옥과 그곳에 사는 존재들을 마음속에 들여놓게 하기 때문이다. 악은 반드시 어딘가에 존재한다. 악의 근원을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쉽게 위선을 발견할 수 있다.
악이나 악마에 대한 심상과 개념을 일종의 잠정적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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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옛 사상들이 저절로 정리되었다. 나는 엘리아데로부터 '천상의 위계질서'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일신론은 그보다 더 오래된 다신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다신론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은 소위 영적 싸움을 벌인 결과 조금 더 근대적인 종교의 유일신으로 변모했다. 이 영적 싸움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들이 벌인 전투로, 관념과 심상 차원에서는 물론 실제 지상에서도 벌어졌으며, 신화에서는 천상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으로 그려진다(천상은 바로 개인을 초월하는 사상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영적 전쟁의 결과 만물을 지배하게 된 신은 여러 속성을 지닌 유일신이며, 수많은 천사와 옛 신들(인류의 계통발생 과정에서 상위 정신 과정에 속하는 영원하고 초개인적인 정신 과정들)이 내는 신성한 '반향'에 둘러싸여 있다.
기독교 신화는 사탄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늘나라의 천사장으로 묘사한다. 이 대목을 살펴보면 사탄과 이성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성은 인간 고유의 심리적 (영적) 특성 중에서 가장 발전되고 놀라우며 개인을 초월한 영원한 특성이므로 천사장으로 간주할 만하다. 그림 40은 외젠 들라쿠르아가 『파우스트」 제1부의 삽화로 그린 악마의 이미지이다. 452 가장 뛰어난 영혼인 이성은 커다란 유혹에 빠진다.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예찬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은 곧 한없는 교만과 스스로 전지하다는 사상을 낳았다.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자각한 이성은 자신에게 절대 지식이 있으므로 자신이 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신이 없어도 좋다고 믿기에 이른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75
그림 40. 천상의 영혼이자 사악한 지성, 악마
지고하신 분과 동등해지리라고 대망을 품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권에 맞서 불경스러운 전쟁, 오만불손한 싸움을 하늘에서 헛되이 일으켰더라. 453
믿고서.
스스로 전지하다고 믿는 이성의 신념은 말로 표현되지는 않더라도 절차와 심상의 형태로 나타나 전체주의의 무의식적 토대를 이루고, 세계 곳곳에서 파괴적인 얼굴을 드러냈다. 이에 관해서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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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이 말했듯 악마의 타락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도전하고 맞서 싸우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때 이후로 악마의 사회는 신의 사회를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모방한 사회였고,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지녔기에 타락한 천사인 악마를 연상시켰다. 야곱과 플라톤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던 천사들과 같이 이교도의 인생에는 악마의 보상이 따르는 듯하며, 이는 인간의 것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장엄한 (특히 몰락 직전의) 이교도 제국의 위엄을 설명해 준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살펴볼 만한 두 대목은 「이사야 15장에서 바빌론을 맹렬히 비난하는 대목과 에스겔 28장에서 두로를 책망하는 대목이다. 성경에서 바빌론은 스스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고 선언하는 샛별 루시퍼와 동일시되고 두로는 "마침내 네게서 죄악이 드러나기 전까지 에덴동산을 지키는 아름다운'그룹 (천사)'과 동일시된다. 『신약(누가복음 10장 18절)에서 예수가 사탄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존재로 묘사했기에 사탄은 기독교 전통에서 「이사야」에 나오는 루시퍼와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전승에 따라 하늘에서 쫓겨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첫 아들이었고 천사들을 다스리는 천사장이었으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크나큰 적수로 성장했다고 여겨졌다. 이교도 왕국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초인적인 악마의 세력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지상의 군주, 즉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454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신념이 왜 창조적 탐험에 반하는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77
걸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미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탐험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탐험은 의심스럽고 위험한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기지'와의 동일시를 절대화하면 '앞에 이르는 과정'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기회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이성이 절대 지식이라고 추정한다면 질서와 혼돈을 중재하는 신성한 '과정'이자 창조적 말씀인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죄를 짓게 된다.
전체주의적 교만은 겸손한 창조적 탐험에 맞서는 뿌리 깊은 악이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스스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가 존재한다.는 점과 기존 지식을 수정하고 행동 양식을 바꿀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겸손은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곧 용기이기도 하다. 스스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곧 미지를 맞닥뜨리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전체주의의 전제를 만들어 낸 '숨은 동기이다. 전체주의자는 두려움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든다. 전체주의자는 애국심 속에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지만 결국 스스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밀턴이 성경과 신화에 암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실낙원의 제4권에는 하나님이 '둘째 아들인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루시퍼를 '밀어낸다. 455 이 같은 '천상의 위계질서 변화'는 스스로를 '최고의 천사'로 치부하며 자기 혼자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이성이 창조적 탐험 영웅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성은 탐험 영웅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만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다. 하지
578 • 의미의 지도
만 이성적 영혼에게는 천국에서 누군가를 섬기는 쪽보다는 지옥에서 지배자로 군림하는 쪽이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악마는 “나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창조물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더 나은 것을 보지 못하는 영혼이다. 자신의 무지와 과오를 인정하고 창조적 탐험에 동참하는 대신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믿고 싶은 욕망이다. 악마는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끝내 부정한다.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적수와 '경험의 구성 요소'로서의 변칙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 기독교는 최악의 월권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안정이나 도덕률을 위협하는 존재와 악한 세력을 끊임없이 혼동한다.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신념을 거스르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천재를 이방인과 구분하지 못하고 그 같은 경험을 거부한다. 이와 같이 적수와 변칙을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은 이례적 사건, 이방인, 낯선 사상, 혁명적 영웅이 모두 안정된 상태를 뒤흔들고 정서 조절의 어려움을 초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하다(이런 현상은 악마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또 변칙을 악으로 범주화할 경우 변칙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동기도 이해 가능하다. 기존의 도덕률을 쇄신하는 영웅은 미지와의 불편한 대면을 이끌어내고 혼돈을 초래하지만, 이는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 같은 창조적 과정을 억압하고 전통에 목을 매면 전통은 머지않아 급격히, 훨씬 더 위험하게 무너지고 만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79
이것을 대다수 사람들이 막연히 악으로 규정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 음탕하거나 폭력적인 환상을 품었다면 그 자체는 악이 아니다. 악은 바로 자신이 그런 환상을 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환상으로 남겨 두어야 할 행동을 실현하는 것이다. 환상은 그저 하나의 정보일 뿐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무슬림의 존재나 신념도 악이라고 볼 수 없다. 악은 이방인이 지닌 낯선 신념이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념과 정반대라고 확신할 정도로 스스로 기독교의 신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거나, 고정된 도덕 체계를 자신의 해석에 따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인격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무지와 독선으로 무슬림을 박해하는 행위이다. 악은 불편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불편한 사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내면 깊이 자리한 나약함, 어리석음, 안이함, 무지는 그것 자체로는 악이 아니다. 이 같은 인간의 불완전함'은 인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결과이다(그리고 한계가 없다면 경험도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부인하는 행위는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에 악하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정하면 영적 성장이 멈춘다. 자신의 무지와 탐욕에 대한 인식은 가장 두려운 손님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수치심과 불안과 고통에 빠뜨리며, 때문에 악의 화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바로 그 인식이 우리를 빛 가까이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우리가 그 소식의 의미가 드러날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의 영원
사탄의 탄생,456에서 일레인 페이절스는 악마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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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적수라는 생각이 기독교인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어떻게 정당화했는지 설명한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기독교인의 적수이다. 악마가 곧 적수이므로 유대인은 곧 악마"라는 논리로 유대인을 박해했다. 페이절스는 사탄이라는 존재가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박해를 도덕적으로 미화하려는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납득할 만한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적대자'라는 개념이 발전해 온 과정은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해 보인다.
이처럼 폭넓은 초개인적 개념이 발전하려면 수세기에 걸친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악마의 심상이 의식적 동기에 의해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타자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악마의 심상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은 순수하게 악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꾸준한 시도의 결과였다. '타자'를 악마와 연관시키는 논리는 종교를 행동 차원이 아니라 신념 차원에서만 받아들인 사람들, 다시 말해서 행동으로 구현된 창조 과정을 메타 모방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종종 비합리적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나통하는 것이다. 이방인의 행동에서는 관념적인 철학으로든, 이례적인 사실, 더 적절히 표현해서 불편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악이 아니라 종교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신호' 이다.
인류가 악의 본질을 깨닫기까지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을 자초하는 과정을 상세하고 극적으로 표상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내치는 건 너무 성급한 행동일 것이다. 악에 대한 의식은 맨 처음에는 의례의 형태로 등장했고, 이후에는 신화 속에서 극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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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심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전해 온 표상을 살펴보면 적대자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대에 가장 잘 발전된 악의 화신의 형태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600년경까지 비교적 명시적인 교리를 갖춘 종교로 발전했던 조로아스터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암묵적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는 '구세주 신화, 선의 최종 승리와 우주적 구원을 선포하는 낙관적 종말론, 몸의 부활에 관한 교리'와 같이 이후에 기독교에 통합되는 여러 사상을 발전시켰다. 457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차라투스트라는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한다. 아후라 마즈다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심리적 특성을 지닌 신령들458 (천사와 유사한 아메샤 스펜타)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 같은 신령에는 아샤(정의), 워후 마나흐(선한 생각), 아르마티(헌신), 흐샤트라(권력), 하우르와타트(완전)와 아므르타트(불사)가 포함된다. 아후라 마즈다는 또한 스펜타 마이뉴(선한 영)와 앙그라 마이뉴(파괴의 영)라는 쌍둥이 형제' 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두 신에 관해서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유명한 가타 gaths (차라투스트라가 저술한 「야스나Yasna, 30장)의 전승에 따르면, 태초에 두 영이 있었고, 한 영은 선과 삶을, 다른 영은 악과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태초에 선한 영 스펜타 마이뉴는 파괴의 영에게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생각, 이념, 정신력, 선택, 말, 행동, 양심, 영혼 중 어느 것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곧 그 둘이 한쪽
의미의 지도
582 -
은 선하고(스타 마이뉴) 한쪽은 악한 것(앙그라 마이뉴)이 타고난 본성 때문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다.
차라투스트라의 신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원론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후라 마즈다가 '적신敵神'에 맞서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대립은 두영 사이에서 시작된다. 이와 달리 아후라 마즈다와 선한 영(성령)의 합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넌지시 나타난다(야스나 43장 3절 등을 참조). 요컨대 선과 악, 성령과 파괴하는 악마는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창조된다. 하지만 앙그라 마이뉴가 자유롭게 자신의 존재 방식과 악한 직무를 선택했기 때문에 지혜로운 주 아후라 마즈다에게 악의 출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반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아후라 마즈다.는 파괴의 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않았다. 이는 신이 모든 모순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악의 존재가 인간의 자유에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임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459
스펜타 마이뉴와 앙그라 마이뉴, 오시리스와 세트, 길가메시와 엔키두,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와 사탄 등 신화 속 '대립하는 형제들'은 인간의 두 가지 성향인 영웅과 적대자를 대표하며, '신의 쌍둥이 아들'이다. 원형적 구세주인 영웅은 미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늘나라'를 향해 전진하는 영원한 창조와 쇄신의 영이다. 반면 영원히 대립하는 적대자는 실제 인생과 환상과 철학 속에 나타난 부정하는 영으로, '불완전함을 보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미지'를 영원히 거부하고 엄격한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를 선택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예에서 보듯이 '대립하는 형제들' 신화는 본질적인 존재 양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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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임을 알면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자발적인 선택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나 부처는 악을 선택하라는 강력하고도 끈질긴 유혹을 받았지만 그 유혹을 거부하기로 선택한다. 반면 앙그라 마이뉴와 사탄은 결국 스스로에게 고통을 불러오게서도 악을 택하고 즐겼다. 이들의 선택은 어떤 특정한 삶의 조건 때문이라거나 본능에 이끌린 변덕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것이 악한지를 알면서, 그것도 왜 악한지를 알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악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악한 영과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사탄과 인류의 타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추락하리라.
그와 그의 부정한 자손들까지.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인가? 배은망덕하도다. 가지려 하는 모든 것을 주었건만, 추락하는 것은 자유이나. 충분히 일어서도록 옳고 바르게 만들었나니 460
선에 대한 거부를 정당화 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흔한 것은 자의식이 정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인생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 잔인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인식이 악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은 실제로 고통스러우며, 때로는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불공평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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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조리하며 뼛속 깊이 무의미해 보인다. 그렇기에 생이라는 것 자체를 근절해 버리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우스트」제1부에서 '거짓의 왕자'인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한다.
끝없이 부정하는 존재가 바로 나, 이 악마라오..
또한 그것은 당연한 일, 태어나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필히 멸망하기 마련이라..
그러니 처음부터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편이 낫겠지요.
여기, 악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나에게 득이 되지요. 몰락, 파멸, 죄악.
바로 그런 것들로 나의 힘이 커 간답니다. 461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제2부에서 이 같은 신조를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반복해 말한다.
지나간 것은 순수한 무와 매한가지.
영원한 창조를 위한 노고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창조된 것은 모두 순식간에 잊힐 것을!!
'지나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본래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데도 인생에 무엇이 있기나 한 것처럼 돌고 도는구나.
그래서 난 차라리 영겁의 공허가 낫다.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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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실은 끊임없이 세속적 현실로 실현된다(왜냐하면 인간은 늘신들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삶 속에서 신화적 주제를 구현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신들'이 벌이는 장난을 잘 알아차리는 위대한 인물에게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앞서 톨스토이의 자서전 일부를 살펴보면서483 혁명적 변칙을 경험한일이 그의 정서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그사건에 대한 톨스토이의 이차적인 사상적 반응 역시 앞서 살펴본 정서적 반응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이다. 서유럽에서 온 '신의 죽음'을알리는 '소식'은 이 위대한 작가의 암묵적, 명시적 신념 체계와 행동양식으로 차례차례 밀려들어 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그를 정서적으로 동요시키고 실존적 혼돈 속으로 몰아갔다. 혼돈 속에서 톨스토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는 커다란 유혹을받는다.
톨스토이는 「고백록」에서 이와 관련된 장을 '동양에서 유래한 이야기'에 나온 비유로 시작한다. 이야기 속에서 야수에게 쫓기던 한여행자가 오래된 우물 속으로 뛰어들다가 우물 벽에 자라난 포도나무 가지에 매달리게 된다. 우물 밑바닥에는 태고의 용이 입을 벌리고기다리고, 우물 위에는 무시무시한 야수가 있어서 그는 내려갈 수도올라갈 수도 없다.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팔에 힘이 서서히 빠지는와중에 두 마리 쥐가 한 마리는 검고, 한 마리는 희다) 나뭇가지를 양쪽에서 갉아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곧 쥐들은 나뭇가지를 다 갚아먹을 것이고, 그는 용의 목구멍 속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때여행자는 포도나무 잎에 꿀이 몇 방울 흐르는 모습을 본다. 여행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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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내밀어 꿀을 맛보고는 위안을 얻는다. 그렇지만 톨스토이는 더이상 삶의 고통을 무디게 하는 쾌락의 단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만다.
나는 스스로를 기만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행복은 태어나지 않은 자가 누리는 것이고, 죽음은 삶보다 나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놔주어야 한다.
지식 속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얻길 바라며 삶 속에서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주변에서 어떻게 살고 있고, 나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 이 의문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교육과 삶의 양식 면에서 나와 똑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이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처한 끔찍한 상황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이 네 가지 있었다.
첫 번째 해결 방법은 무지이다. 삶이 악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해 성립되는 수단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보통 여성이었으며, 매우 젊거나 둔한 사람들이었는데, 쇼펜하우어와 솔로몬, 석가모니가 본 삶의 문제를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기다리는 용과 자신이 매달린 나뭇가지를 갉아먹는 쥐를 보지 못하고, 그저 꿀만 핥는다. 하지만 꿀을 핥아 먹는 것은 잠시일뿐이다. 무언가 그들의 관심을 용과 쥐 쪽으로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꿀을 핥아 먹는 것도 곧 끝이 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배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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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해결 방법은 쾌락주의이다. 삶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용이나 쥐를 보지 않고 당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즐기는 데에서 성립되는 수단이다. 가지에 잔뜩 묻어 있는 꿀을 가능한 잘 핥아 먹는 삶의 방식이다. 솔로몬은 이 방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한다. 하늘 아래,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해 아래 허락한 한평생 일을 하는 동안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가서 즐거이 그대의 빵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그대의 포도주를 마시라…... 이 모든 무의미한 삶의 날들에, 그대의 이 모든 헛된 날에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과 삶을 향유하라. 이것이 하늘 아래 애쓴 그대의 노고와 삶에 주어진 몫이므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라. 그대가 누울 무덤에는 일도, 성찰도지식도, 지혜도 없으니."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번째 해결 방법을 추구한다. 이들이 처한 조건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고, 이들의 둔감한 도덕성은 신분이나 지위의 이점이 우연적인 것임을, 모두가 솔로몬처럼 1천 명의 여인과 궁전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한 남자에게 1천 명의 아내가 있다면 1천 명의 남자에게는 아내가 없다는 점을 궁전 한 채를 지어 올리기 위해서 1천 명의 사람이 이마에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는 점을, 오늘 그들을 솔로몬이 되게 했던 우연이 내일은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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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몬의 노예가 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게 한다. 이들의 아둔한 상상력은 석가모니에게 번뇌를 안긴 문제들, 즉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라도 찾아와 이 모든 즐거움을 파괴해 버릴 질병과 노쇠함과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한다. 이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아둔한 사상과 빈곤한 상상력을 긍정적 철학으로 여긴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이들은 이 문제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꿀을 빨아먹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하지도 않고 그런 척할 수도 없었기에 이 사람들을 따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진지하게 삶을 영위하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쥐와 용을 한번 본 이상 못 본 척 외면할 수는 없었다.
세 번째 해결 방법은 '힘'이다. 삶이 악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삶을 없애 버리는 것으로 성립되는 수단이다. 오로지 대단히 강하고 논리적으로 한결같은 사람들만이 이렇게 행동한다. 죽은 자의 축복이 산자의 것보다 더 위대하고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서 우리를 농락하는 장난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거기에 종지부를 찍는다. 밧줄에 목을 매든지 물에 뛰어들든지 심장에 비수를 꽂든지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든지 어떤 식으로든 삶을 끝장내는 것이다.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 중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개 정신력이 정점에 이르고 이성을 약화시키는 습관이 아직 들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의 전성기에 이를 실행한다. 나는 이것을 가장 가치 있는 해결 방법이라 보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네 번째 해결 방법은 나약함이다. 삶이 악하고 무의미하며 삶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을 연명해 가는 것으로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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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수단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것을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행동할 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기만을빠르게 끝낼 힘도 없이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보인다. 이것이 나약함의 방법이다. 나는 무엇이 더 나은지 알고 거기에 이를 수도 있으나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나 자신도 네 번째 범주의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 끔찍한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이 네 가지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안간힘을 써도, 이 네 가지 방법 외에는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464
톨스토이의 이성과 지력은 '신의 죽음'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이 제기한 삶의 딜레마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피할 수 없는 무의미한 고통으로 점철된 삶, 그 악랄한 장난'을끝내 버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인간과 인생의 조건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갈등을 확실히 깨닫게 된 후로 일할 의지도.살아갈 의지도 잃어버렸다. 당시의 그는 인간이 끝없이 혼돈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과 혼돈을 최종적으로 완전히 굴복시키는 대신(그래서 만물을 끔찍하리만큼 고정된 것으로 만드는 대신) 끊임없이 혼돈을 마주하면서 그것을 실체로 바꿔 가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톨스토이에게 삶의 염증을 안겨 준 사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실존적 조건과 그에 더해 자신에게 또 다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삶은 더더욱 불공평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전락한다. 누군가는 주위 사람보다 가난하고, 몸이 약하고,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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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볼품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사람들보다 무능한 면이 있다(물론 모든 면에서 무능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사람에게 타고난 재능과 특권이 제멋대로 배분되었다는 인식은 원한과 증오에 뿌리를 둔 철학을 정당화하는 합리적 토대가 되며, 때로 계급 전체를 대표하기도 하고 그저 한 개인을 위한 것일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삶에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무엇보다 커지는데, 특히 지금껏 불공평하게 억압당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구자리처드 3세는 모든 혁명가와 반역자 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리고 하늘이 내 몸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지옥이 그에 상응해서 내 마음도 비뚤어지게 만든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았으니.
나는 형제도 없다. 형제와도 전혀 닮지 않았으니,
그리고 이 '사랑' 이라는 단어도, 그건 백발의 노인이 신성이라 부르는 것인데,
서로 비슷한 사람 안에나 있는 것이지
내 안에는 전혀 없다. 내겐 나 자신밖에 없다. 465
악은 고난을 핑계로 인생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미흡하며 그러므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무엇을 하든 현재 상태를 개선할 수 없다."며 못 박는 것은 잠정적 결과를 최종 결과 취급하는 섣부르고 조급한 판단이다. 이는 회복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이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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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희망과 의미의 존재를 부정한다고해서 저절로 그에 상응하는 부정적 정서인 불안과 절망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덧없다고 생각한다면 고통 역시 덧없다고 믿어야 할 것 같지만, 고통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경험의 긍정적인 측면을 쇄신하는 과정을 거부하면 경험의 부정적 측면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 삶에 대한 염증을 불러올 만큼 커다란 고통에 또 다른 고통이 더해지면 그저 자살을 감행하기보다 더 악랄한 짓을 저지르는 인격이 형성된다. 이처럼 적대자는 교만에서 출발하는 전형적인 경로를 따라 발달하여 (교만과 헛된 야망이 나를 타락시켰도다. 466) 마침내 한없는 증오와질투에 사로잡힌다. 467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일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기쁨을 위해 악을 행하노라.
신의 고고한 의지를 거스르며
그에 반하는 존재로, 그때에 그의 섭리가
우리의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려 한다면,
우리의 일은 그 목적을 그르치는 것이다.
그에 더해 선에서 악의 방도를 찾아내는 것이다. 468
톨스토이의 허무주의, 즉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인생을끝내고자 하는 욕망은 고양된 자의식이 맺은 악의 열매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일한 열매도, 가장 교묘한 열매도 아니다. 죽음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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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욕망보다 훨씬 교묘하고 효과적이어서 당사자나 주위 사람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 악의 열매는 자기 자신을 전통이나 관습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은 애국심이라는 가면을 쓰고 국가 권력을 유용하여 파괴적인 일을 벌이기 쉽다. 니체는 이러한 '애국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도덕의 정의: 도덕은 삶에 보복하려는 숨은 의도를 지닌 그리고 보복에 성공한 퇴폐주의자의 습성이다. 나는 이 정의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469
이와 같은 삶에 보복하려는 진짜 동기와 그 결과로 인해 맞은 파국에 대한 묘사는 현재까지 심리학에서 발견한 그 어떤 과학적 정신병리 이론보다도 인간의 도덕적(심리적) 타락 과정과 전체주의와 퇴폐주의라는 두 가지 최종 양태를 더 정확하고 명쾌하게 보여 준다. 지금도 우리는 개인의 사소한 잘못과 자기 배반이 모여 우주적 차원의 악이 발현된다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이성만 남은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범한 오류의 규모와 중요성을 축소하고는 자기가 겸손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93
의미의 지도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적대자
거짓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자 누구인가?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자이다. 470
인간은 발달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의식의 팽창을 경험하기에 미지와의 비극적 대면을 피할 수 없다. 사회화를 통해 받아들인 문화적 규범도 우리를 미지로부터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다. 보호막 없이 개인으로서 미지를 대면하는 것은 자의식의 출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자의식이 출현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더 철저히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인간이 느끼는 수치심은 신화에서는 스스로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침내 인간이 경험 세계에서 상처입기 쉬운 나약한 존재라는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경험이 지닌 이러한 본질 때문에 인간에게는 언제나 거짓을 동원하여 경험 세계에 적응하려는 강력한 동기가 존재한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대상을 맞닥뜨리는 경험은 두려움과 회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거짓된 안식처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성향은 공감하고 이해할 만하다. 성장 과정은 두렵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의 낙원과 같은 어머니의 품을 떠나 타락한 남성의 사회로 들어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회화 이후에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도 똑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이 되는 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청소년으로 이행하는 과정 자체는 영웅
594 · 의미의 지도
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때때로 적응 양식으로서 영웅과의 동일시를 거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이 첫 단계마저 거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성숙 과정에서 인간은 더 큰 자유를 얻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삶의 불안정성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숙 과정은 두렵고 가치 없는 일로 폄하되기도 한다.
성장 과정에서는 개인이 처한 '환경'이 변한다. 또한 개인의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행동 레퍼토리 역시 확장된다.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 것이다. 점차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경험 반경은 마침내 부모의 그늘을 넘어서게 된다. 끝없이 기지의 영토를 넓혀 가는 능력은 적응력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인생의 유한함과 죽음에의 인식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때맞춰 등장하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고, 어린 시절의 무지에 목을 매거나 타인의 명령 뒤에 숨고 싶은 동기가 강하게 부상한다. 하지만 자신의 취약성과 유한함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철저히 주관적이며 고유한 경험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이 능력은 신성한 로고스이며, 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실패와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기독교의 십자가 상징 역시 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십자가에는 신성과 죽음이 역설적으로 뒤섞여 있는데, 무한한 창조력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신,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연약한 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개인은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런 시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95
공간적 한계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지만 경험 세계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의식에 대한 해독제로 끝없이 스스로를 초월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경험 세계를 확장하려면 미지를 향해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탓에 그 능력을 사용하는 걸 거부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집단 정체성에 목을 매기도 한다. 미지로부터 도망치는 동안 우리는 불가피하게 관습과 습관의 노예로 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최선의 자기를 성가시다며 거부한다. 미지와, 쌍둥이 격인 사회로부터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고유한 인격을 병적으로 집단에 예속시키고, 진정 자신을 구원할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존재 양식을 거부한다. 위대한 아버지는 혁신을 증오하며 그를 막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살인을 일삼는 존재이다. 또 새로운 지식의 원천인 위대한 어머니는 자신의 얼굴을 본 이를 얼어붙게 만든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존재들 앞에서 과연 누가 도망치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지만 도망치면 지금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늙고 병들어 결국 죽고 만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에서 변덕스러운 인생의 변화로부터 보호받는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보호자인 어머니에게 반응하며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 무력한 아기는 어머니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지만, 어머니는 무시무시한 세상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한다. 성장 과정에서 인생의 유한함이 아이를 위협할 때, 문화는 아이의 행동을 제약하면서 중재에 나선다. 하지만 문화의 요구를 따르려면 그만 한 책임을 져야 하며, 어머니와의 의존 관계를 포기하고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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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문화는 성장 과정에 있는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인격에 한계를 부여한다. 사회가 개인의 개성과 관심 그리고 의미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집단으로부터 보호받고 역사적 지식을 전수받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집단에 바친다. 집단 정체성의 수용은 정상 발달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이다. 집단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맹목적인 어머니의 배려를 넘어서 성장하지만 집단은 그 대가로 개인을 억압하고 순종을 강요하며 고유한 개성을 포기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집단이 근본적으로 악하다거나 인간이 겪는 고통이 모조리 사회에서 비롯된다고 말은 아니다. 집단은 단지 개인의 선택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확장된 힘이다. 역사에는 수세대에 걸쳐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수립된 행동적 지혜와 개인의 힘과 능력을 엄청나게 확장시켜 줄 잠재력이 있다. 문화와 문명은 모든 사람에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집단 정체성을 수용하는 일이 훈련의 일환이 되어야지 개성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의 발달 단계로서 훈련을 거쳐 규율 잡힌 개성이 재출현하여 자신을 스스로 통솔하기까지 미숙한 개성을 잠정적으로 집단에 제물로 바치는 것이어야 한다.
집단에 속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시기는 아동기의 의존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 꼭 필요한 발달 단계이지만, 집단은 개인에게 지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집단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곧 개인차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집단의 관점에서 어떠한 편차나 약점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97
까지도 거부하며, 개성을 억압하고, 신화 속 어릿광대를 희생시키고,순진하고 나약한 동생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집단은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그것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사회 체계를 지키기 위한 조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집단은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다. 과거에 만들어진 고정된 체계로서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자는개인차나 개인의 약점을 증오하지만, 더 너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마저도 오히려 우리에게는 강점이 될 수 있다. 개인차에는 불가피한 집단의 한계를 초월하고 개인의 한계를 확장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변화도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전체주의자는 자신의 약점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강점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도리어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줄 유일한 능력을 억누르고 약화시킨다. 실제로 자신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지켜 줄 유일한 과정, 즉 창조적 탐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여러 대륙을 거치며 많은 나라와 민족을 본 여행자에게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의 특성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나태한 경향이있다고 대답했다. 누군가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겁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대답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관습과 여론의등 뒤에 숨는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로, 단한 번 생겨났다는 것을, 어떤 이상한 우연도 갖가지 다른 기이한 것들을 뒤섞어 하나의 존재로 다시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속으로는 잘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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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 알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마음인 듯 숨기는 것이다. 왜일까? 관습을 고집하고 관습 속에 숨은 이웃이 무섭기 때문이다.
개인이 이웃을 두려워하게 하고, 무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도록 내모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소수의 몇몇 드문 경우는 수치심일 것이다. 그 외 압도적인 다수의 경우는 편안함과 타성, 요컨대 여행자가 말했던 나태한 경향이다. 그의 말이 옳다. 인간은 겁도 많지만 그보다는 더 게으르다. 그들은 아무 조건 없이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자신을 내보이라는 요구를 그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오로지 예술가들만이 남에게 빌려온 매너와 어물쩍 끼워 맞춘 견해에 질색하며, 이런 비밀, 모두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떳떳하지 못한 마음. 모든 인간은 유일무이한 불가사의라는 신념을 내보인다.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모든 인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근육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며, 홀로 그 자신이라는 것을 용기 있게 알려 주려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철저하고 일관되게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신이 아름답고, 눈여겨볼 만한 존재임을, 자연의 모든 작품들처럼 새롭고 놀라운 존재임을, 그리고 결코 따분한 존재가 아님을 알려 주려 한다.
위대한 사상가가 사람들을 경멸할 때는 그들의 나태함을 경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처럼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교류하거나 지식을 나누는 일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럴 자격조차 없어 보이는 까닭이 바로 그들의 나태함에 있기 때문이다. 무리에 속하지 않으려거든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성향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너 자신이 되어라! 지금 너의 행동과 생각과 욕망은 모두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599
진정한 너 자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471
고유한 개성을 부정하면 과거의 지혜로운 전통은 현재의 맹목적인 족쇄로 전락한다. 법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에 법률을 문자 그대로만 적용하는 것은 문화를 우롱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가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지형이 변하면 잘 다져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해서는 목표 지점에 다다를 수 없다. 변화에 발맞춰 습관과 신념을 바꾸지 못하면 스스로를 기만하고 세계를 부정하며 곧 으스러질 소망으로 현실을 대체하게 된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결과, 자기 삶의 토대를 무너뜨려 불안한 미래를 맞으며 안식처가 되어 주던 과거에 갇히고 만다.
과거의 집단적 지혜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은 거짓을 수단으로 고집스럽게 어리석음을 택한다. 이들은 이미 진실로 밝혀진 사실을 대놓고 거부한다. 궁극적 진실이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한다. 이들은 성실히 노력하여 자신들이 보아 온 현실 세계와 자신에 대하여 설명하는 도덕 이론을 형성한다. 이 이론은 가상의 초월적 관점에서 보자면 불완전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모든 것을 보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래야 한다면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지금까지 보고 들은 현실을 표상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일이다. 스스로 경험한 자연과.. 사회 환경을 특징짓는 현상과, 그 환경에서 나타난 자기 자신의 모습
600 - 의미의 지도
을 표상하고 적응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아이의 진실과 어른의 진실이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이와 어른은 처한 현실, 곧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직한 아이는 어른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아이답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의 능력을 갖추고도 여전히 아이였을 때의 도덕률을 따르는 어른은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거짓된 사람은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행동 양식 및 해석 도식, 즉 과거의 도덕적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거나 새로운 욕망을 실현할 수 없음에도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한다. 또 자기의 시선에 이례적으로 보이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쟁이는 자기만의 경기를 선택하고 자기만의 규칙을 정한 다음에 속임수를 쓴다. 이들은 성장하는 데 실패하며, 의식 과정 그 자체를 거부한다.
대개 거짓된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다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한다(물론 적극적인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들은 탐험을 하고 기존 지식을 쇄신하는 데 일부러 실패한다. 경험 세계에 변칙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저 현재의 행동과 평가 기준을 제시하는 목표 지향 도식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그 오류가 정확히 어디서 무슨 이유로 발생했는지, 의미가 무엇인지는 발생한 변칙을 분석하는 첫 단계에서는 '가설'에 해당할 뿐이다. 변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하려면 변칙의 구체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공을 들여서 순전한 정서 정보로부터 행동과 신념, 더 나아가 정신과 인격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변칙을 경험하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01
지 않는 것은 거짓을 일삼는 가장 단순하고 흔한 방법이다. 아무것도 살피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잠시나마 자신이 범한 오류에 깃든 위험을 감출 수 있다. 이처럼 창조적 탐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절차 및 서술 기억을 구태여 쇄신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듯이 현재에 적응하며, 새로이 생각해 보기를 거부한다.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질서와 혼돈을 중재하려면 용기있게 행동해야 한다.
과거 영웅들의 정체성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만 거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영웅이 되기는 거부하는 거짓말쟁이들은 반드시 그 정체성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집단 정체성을 수용하면 과거에 구현된 능력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문화가 지닌 집단적 힘과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같이 강력한 힘이 비겁하고 기만적인 인간의 손에 들리면 굉장히 위험하다. 거짓말쟁이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측은히 여기거나 수용하지 못하며 자신의 약점뿐 아니라 강점까지도 그 진가를 인정하지 않기에 타인의 약점이나 강점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응한다. 거짓말쟁이는 현재에 필요한 차이를 두둔하거나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에 최선이던 가치를 추구하는 척한다. 이런 탓에 거짓말쟁이는 자기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폭군이 된다.
거짓말쟁이는 변칙을 허용하지 못한다. 변칙은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불안을 견뎌 낼 수 있거나 견뎌 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문화의 정서 조절 체계를 이루는 도덕 이론에 어긋나는 행동 양식이나 경험을 일단 '회피' 하다가 나중에는
- 의미의 지도
602
'적극적으로 억압한다. 여기서 회피한다는 것은 곧 변칙적인 경험을 '무의식' 상태에, 불완전하게 실현된 상태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위험한 생각이 지닌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위협적인 환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수용할 수 없는 자기 행위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적극적 억압은 흔히 생각하는 심리적 '억압'이 아니라 실제로 오류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배신, 종교적 탄압, 노골적인 무력행사 같은 공격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쟁이들은 현재 도덕 이론의 오류를 드러내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온갖 조치를 취한다. 이 기만적인 사람들은 누군가 나쁜 소식을 전할 때, 그 정보를 유용하게 활용하기보다는 정보의 출처를 제거하려 들고,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을 탄압한다.
거짓말은 손쉽고, 잠깐이나마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거짓말에는 끔찍한 결과가 뒤따른다. 낯선 경험을 회피하거나 억압하면, 그 경험은 확실히 위험한 것으로 각인된다. 위협적인 경험으로 범주화되는 것이다. 낯선 영역을 회피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 영역이 맞닥뜨릴 수 없는 위험'으로 규정되면, 그 영역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더 확장된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경험이 불가해하고 혼돈스러우며 감내하기 어렵게 느껴지고, 적응의 수단으로 거짓에 의존해 온 누적 효과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다. 거짓에 의존하면 문화는 억압적인 것으로, 변화는 위협적인 것으로 뒤바뀌고, 개인은 융통성과 적응 능력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한다. 거짓에 의존하면 점차 두려움이 커져서 병적이다시피지나치게 과거에 동일시되거나 퇴폐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전자는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03
개인적·정치적 편협성인 전체주의로, 후자는 개인적·사회적 타락인 허무주의로 발현된다.
부정하는 영을 받아들인 사람의 인생은 결국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지고 만다. 새로운 것, 그렇기에 희망을 간직한 것은 무엇이든 확실한 처벌과 위협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용 가능한 행동의 폭도 가혹할 만큼 축소된다. 그 결과 거짓말쟁이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 메마르고 의미 없는 인생을 증오하게 되고, 결국 인생을 송두리째 파멸시키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는 행동에 돌입한다.
마라부는 흙바닥에 세계를 상징하는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 원 안에는 인간을 상징하는 전갈을 넣었다.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 전갈은 원 주위를 빠르게 돌기 시작했지만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전갈이 가장자리를 따라 원을 여러 바퀴 돌았을 때 마라부는 막대기를 땅에 대고 원을 반으로 나누었다. 전갈은 몇 초간 가만히 멈추었다가 출구를 찾아 점점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지만 출구를 찾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전갈은 감히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몇 분이 흐른 뒤 마라부는 반원을 또 나누었다. 전갈은 극도로 흥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은 전갈의 몸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아졌다. '진실이 드러난 순간 이었다. 멍하니 얼떨떨해진 전갈은 마침내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독이 든 꼬리를 쳐들고 전갈은 미친 듯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전갈은 혼과 힘이 다할 때까지 돌고 또 돌았다. 완전한 절망 속에서 전갈은 맴돌기를 멈추고 독이 든 꼬리 끝을 내리더니 스스로를 쏘아 죽었다. 고통이 끝난 것이다. 472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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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과의 절대적 동일시미지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혼돈 창조적 탐험 과정의 거부
그림 41. 적대자의 악순환
거짓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가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영역, 즉 '탐험을 마친 익숙한 영토'가 점점 줄어든다. 마지막에는 결국 자기 자신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스스로의 인격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 움츠러들고 미숙해지고 마는데, 이는 '우주 발생 이전의 물질'을 '영'과 '세계'로 뒤바꾸는 과정에 계속해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에게는 나약함과 두려움, 원한과 증오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게 안전을 지나치게 추구하느라 거부해 왔던 혼돈은 마침내 승리를 거둔다. 거짓에 기댄 사람은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필연적으로 지하 세계를 향해 소용돌이쳐 내려간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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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 체계인 기지는 과거에 이룬 적응의 구체적인 결과물이며, 위계적으로 통합되고 표상된 과거 영웅들의 유산이다. 하지만 과거에 이룬 적응은 자연현상이 늘 인간의 해석 능력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과거의 지혜를 절대적으로 신봉할 때, 과거는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개인 고유의 이례적 경험을 용인하지 못하는 압제로 변질된다. 잠재적 적응 방식으로써의 영웅적 탐험 과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조상을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명백히 드러난 인간의 나약함을 목격하고 이것이 신의 잔혹함과 인간의 무가치함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라며, 미숙하고 교만한 자기 인식에 빠져 영웅적 탐험 과정을 거부한다.
자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은 법의 정신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법률의 지배를 받기를 바란다.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억압하는 이면에는 미지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차이를 억압하는 개인과 사회는 더 이상 창조적 혁신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을 영웅과 동일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억압적인 과거의 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 편에 서게 되고 결국 고통을 겪는다. 이 같은 원리는 유다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유다는 자기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대며 영웅인 그리스도를 전통적 권위자들에게 팔아넘겼지만 곧 절망에 빠져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그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
606 · 의미의 지도
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말하였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마태복음 27장 3~5절
위대하고도 무서운 아버지에게 영웅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곧 혼돈에서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한없이 두렵고 부정적인 경험을 견딜 만하고 유익한 경험으로 바꾸는 과정을 거부하면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31 ~33절
성령, 즉 거룩한 영혼을 거스르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을 납득시키려고 자신이 추종하는 과거의 유산이 가장 위대하다고 거짓말을 한다. 또 실제로 의연하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대신 강직하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07
고 용감한 사람인 척한다. 진정 용감하게 행동하면 집단으로부터 외면받게 될지 모르며, 집단과의 동일시만이 그가 머리를 수면 위로 내놓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부정하며, 신화적으로표현하자면 하나님과의 동일시를 거부한다. 또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여 경험 세계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행동 양식과 신념 체계를 고치거나 다시 만들기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때가 이르면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갑자기 몰락하고 만다.
지속적으로 적응 양식을 쇄신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한때 생명의 물이 흐르던 주위 환경을 늪으로 만들고 만다. 생명을 주던 물은생명을 앗아가는 늪으로 바뀐다. 과거에 범한 오류와 해결하지 못한트라우마, 현재 겪는 문제들로 질척이는 이 늪은 프로이트가 언급한'억압된 기억'으로 점철된 '무의식'이다. 하지만 처리되지 않은 정보는 기억이라고 할 수 없고 미처 탐색하지 못한 대상은 기억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현실'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결과는 억압된 기억이라기보다는 '영혼과 세계로구축될 수 있었던 잠재된 가능성'이며, 그 대부분은 기억 속에 저장되기보다는 세계 속에 암묵적인 형태로 존재한다(여기서 암묵적이라는말의 뜻은 답장을 하지 않은 편지나 갚지 않은 빚, 해결하지 못한 다툼처럼 아직않은 잠재적 '문제'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맞닥뜨리지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 만들어 낸 이 높은 점점 깊어져 도저히통과할 수가 없게 되고, 장기간의 회피가 점점 영토를 확장한 결과'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간다(그리고 늪지 괴물에게는 굶주린 미리가 점점 더 많이 생겨난다). 그리고 마침내 혼돈의 용이 깨어난다. 안전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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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익숙한 세계 아래에 영원히 잠들어 있던 티아마트를 깨우고 만 것이다. 적응 양식이 두려움과 불신에 사로잡혀 제한적이고 억압적으로 변해 갈수록, 다시 말해서 거짓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용은 더욱더 참혹하고 위험하며 강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가 결정된다. 경험의 어느 측면을 제거하려 들면 그 측면은 적수가 되고 만다. 빛 없이 어둠 속에 숨긴 모든 경험적 측면들은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서 빛에 굶주린 채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부른다. 온전한 현실 그 자체로서의 경험을 부정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실은 환상과 다르다. 현실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인식하면 결국 자신이 부인한 경험에 담긴 정보를 위협적인 미지의 세계에서 빼내어 적응의 목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하는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 현실 세계에는 행복한 인생을 보장할 만큼 충분한 정보가 이미 담겨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남겨 둔 모든 과제들, 다시 말해서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탐험하지 않고 남겨 둔 모든 영토에는 유능한 인격을 얻어 낼 수 있는 잠재 정보가 여전히 남아 있을지 모른다. 만약 경험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정보의 근원으로 타당하다면, 우리가 회피하거나 억압하거나 가치 폄하했던 경험의 구성 요소 안에는 여전히 지속 가능하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선을 향해 자발적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는 사람은 지금껏 폐기되었던 정보를 재통합하고 현재로써는 소화할 수 없을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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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보이는 정보를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이를 자발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사회적, 개인적 차원에서 거부된 적대적 세력'을 불가피하게 맞닥뜨림으로써 재앙을 겪게 된다. 신화 속에서 재앙은 무서운 어머니가 선택한 장소에서 그녀와 의도치 않게 재회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같은 '오이디푸스적 근친상간'은 마지 못해 무서운 어머니와 재회한 영웅의 고난으로 귀결된다. 영웅은 끝내 죽임을 당하거나 사지가 잘리거나 거세를 당하는 등 '남성적' 의식을 잃고, 지하 세계가 승리를 거둔다.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두려운 미지로부터 보호받고 사회 구성원으로 수용될 만한 인생을 산다. 이들의 노예 같은 삶의 방식은 집단을 강화한다. 그러나 집단이 수용하는 특정한 행동 양식과 신념 체계는 결코 미지의 영역과 개인의 잠재력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연재해나 이방인이 아니며 일탈하거나 나약하거나 비겁하거나 열등하거나 복수심에 불타지 않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똑같이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굳은 미소'라는 사회적 가면을 쓴다.
반면 참된 개인은 집단의 수용과 보호 바깥에 서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솔직히 드러낸다. 자기 결점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약함, 약점, 복수심, 비겁함, 차이를 드러낸다. 이런 사람은 집단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고 집단적 억압의 표적이 된다(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경우 스스로 자신을 비판하게 된다). 하지만 어리석고 나약하고 무지한 이 사람은 집단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는 참된 개인으로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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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살고 진실하게 경험하며 진실하게 고통받는다. 자신이 타고난 한계를 의식하고 그 결과를 이해할 때 개인의 주관적 경험의 본질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주관적 경험 세계에 적응하려는 시도가 강화된다. 바로 이것이 버림받은 자, 병자, 맹인, 절름발이와 같이 구제받지 못한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이다. 주관적 경험, 즉 우리를 착각으로 몰아넣는 집단의 제약을 벗어난 개인적 현실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면 기존에 따르던 도덕률은 완전히 붕괴한다.
그래서 자의식의 출현은 곧 어머니와 아버지의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에덴에서의 추방은 '진정한 낙원'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며, 인생의 변덕스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지는 못해도 무시무시한 미지를 지속 가능하고 생산적인 세계로 바꿔 나가는 영웅의 정체성을 수용하기 위한 길이다. 경험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려면 인간의 경험 세계를 특징짓는 죽음의 한계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식해야 한다. 주관적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이다.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역설적인 겸손이다. 이처럼 영웅의 겸손한 태도는 지금 현재 상태가 얼마나 강하고 안정되어 있든지에 관계없이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맞닥뜨리고 수용해야 한다는 믿음에 토대를 둔다. 더 나아가 이 믿음은 개개인이 미지의 도전을 받아들여 더욱 번영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잠재력에 관한 믿음에 기초한다. 영웅으로 살려면 먼저 이 관점을 믿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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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이것은 용감하고 창조적으로 행동하며 종교를 실제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약이다. 따라서 영웅의 겸손은 “지금의 나는 아직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아니다.”라는 신중하면서도 희망에 찬 신념이다.
적대자의 기만적 태도는 현재의 지식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며 미지가 마침내 정복되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 믿음은 인간의 나약함을 부인하고 인간이 전지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적대자는 “내가 하는 행동이 해야 할 모든 행동이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암묵적, 명시적으로 어쩔 수 없이 영웅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가치 있는 것이 이미 실현됐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낙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태도이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으면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근절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 자체가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적대자는 자기 자신조차 동정하지 못한다. 지금 존재하는 '완벽한 세계' 속에서 불완전한 것이란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대자는 타인의 고통은커녕 자신의 고통조차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다. 세상에 이보다 딱한 처지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역설적으로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경험 세계를 창조하고 쇄신하는 과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자신의 부족함을 부인하면 영원히 지옥에 거하는 적대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옥은 무엇보다도 경험의 구성 요소가 균형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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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적대자의 기만적인 적응 양식을 받아들인 사람 중 문화의 규범을 수용한 사람들은 안전 지향성과 공격성이 점차 강화된다. 반면 집단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대가가 너무 크거나 어느 집단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거나 혹은 경험 세계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져 전체주의적 행동 양식마저 무척 희망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타락한 인격과 퇴폐적인 삶의 태도를 받아들인다.
영웅을 부정하면 문화적 규범을 절대화하는 '전체주의'가 고개를 든다. 이때 모든 지식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하나의 구체적인 틀, 즉 신화로 표현된 가정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미지를 부인하거나 회피할 때는 과거에 수립된 구체적인 관점을 신격화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이때 모든 사물은 영원히 지금의 존재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 과거의 지혜에 의문이 제기되면 미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불안감이 조성된다. 이처럼 미지와의 대면은 미지의 대상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믿는 환경에서는 유익하게 여겨지지만 이 영웅적 원리를 믿지 못하는 곳에서는 파괴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성장한다. 보수주의는 개인의 창조력을 파괴하는 억압으로 뒤바뀔 때, 삶을 북돋는 것이 아니라 삶을 거스르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보수적이기만 한 사회는 살아남지 못한다. 미래는 과거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절대적 보수주의자는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을 제한하려 들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가 온전하고 완벽하다면, 그리고 개인이 이미 자기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했다면, 모든 것을 탐험하고 깨닫고 성취한 인간의 경주는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 그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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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 반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얻었다고 여기는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탐험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다.
영웅을 부정하는 태도는 전체주의와 더불어 전통적 질서 혹은 질서 그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는 '퇴폐주의'를 부른다. 퇴폐주의자의 행동 양식과 해석 도식은 전체주의자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하지만 퇴폐주의자는 동료 격이자 겉보기에 훨씬 더 완고해 보이는 전체주의자만큼이나 교만하다. 이들은 '특정한 그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그 무엇과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굳게 믿는다. 생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은 분명 무언가에 속아 넘어간 나약하고 무지한 사람이라며 인생에서 얻고자 노력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이렇게 퇴폐주의자는 미다스와는 반대로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은 대개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미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집단 정체성을 수용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지에 적응하는 문제를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해결한다. 집단은 그 집단의 핵심 가치를 수용하고 다른 구성원 앞에서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적어도 집단의 예측 범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전체주의자는 집단에 열렬히 적응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 주위로 점점 더 굳건한 장벽을 세우고는 위협적인 미지를 저지하고자 계속해서 헛되이 노력한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까닭은 세계관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 안에 잠재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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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적 측면을 믿지 못하고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보지 못하며 혼돈의 유익한 측면을 상상하지 못한다. 겁에 질려 노예의 규율을 받아들이고 집단의 보호를 받으려 하지만 노예 상태를 넘어서고자 할 만큼 겁에 질리진 않은 것이다.
반대로 퇴폐주의자는 집단이 갖고 있는 억압적 측면만 눈여겨본다. 그들은 개인의 악마적 측면을 편리하게 덮어 놓고는 자신의 '반항'이 훈련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일 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퇴폐주의자는 무서운 어머니에게 영혼을 집어삼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의 근원을 사회적 규제에서 찾으며 혼돈을 유익한 안식처로 여긴다. 그는 위대한 아버지를 내치고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제대로 된 도전에 맞닥뜨리는 순간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짐승의 배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퇴폐주의자는 한 개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뒤엎으며 집단에 속하지 않고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한다. 집단에 속하려면 적어도 청소년에게 주어지는 책임을 수용해야 하는데, 미성숙한 세계관을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보니 그 책임마저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단의 가치관이 환경적, 문화적, 지적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집단을 한번쯤선뜻 믿어 보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버지가 병에 걸렸다면 생명의 물이 흐르는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미신을 믿기에 자신은 지적으로 우월하다며 책임을 회피한다. 이처럼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는 욕구, 즉 영웅적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욕구는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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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가 된다. 이러한 신념의 부산물로서 고통에 빠진 저항 세력'의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들의 비겁함을 감추는 훌륭한 가면이 된다.
전체주의자와 퇴폐주의자는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찌그러진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고 난 지금 막 줄리네 집에서 돌아온 참이야. 줄리네 소파에서 두 딸을 옆에 두고 앉아 있는 동안 문득 내가 지금까지 하나뿐인 인생을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 깨달았어. 내가 자네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끝까지 참고 들어주기 바라네. 고해성사를 꼭 해야겠는데 좁은 방에 앉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성직자에게 털어놓자니 이야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거든. 자네는 인간의 악마적이고 비합리적인 본성을 주의 깊게 살핀다는 면에서 진정한 종교인이나 다름없으니 내 고백에 흥미가 생길 걸세..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자기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이나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을 떠올려 보게나. 나는 내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던 사람들을 향해 품었던 끔찍하게도 사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다.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 왜 이리도 생각 없이 사냐며 내가 품었던 오만한 경멸은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저 질투와 앙심에 불과한 것이었네. 두려움을 이겨 내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훌훌 털어 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누구든 증오하고 꺼렸다..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독립과 성공을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주의로 치부하면서 어머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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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독립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이룬 성취를 모조리 허물어 버리는것이 내 희망이자 포부였다네. 그것이야말로 내 의무라고 여겼지. 내눈에 이기적으로 비치던 세상을 쓸어 버리고 싶은 내 충동에는 분명 광적인 면이 있었네.
내가 그런 충동을 실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런 상상을 할 때면 나는 언제 땅이 갈라져서 나를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만약 세상에 정의가 존재한다면 그렇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일세. 도덕적 판단 능력은 눈곱만큼도없으면서 나는 누구든 내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을 비난해 댔네. 이런사실을 깨닫고 보니 내게 친구랄 만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궁금하더군. 물론 전에는 내게도 친구가 있었네. 내 경멸을 용인할 만큼충분히 자기를 경멸하던 사람들이 바로 내 친구였지.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해 줄 구세주가 몇몇 있다니 인류로서는 얼마나다행한 일인가. 자네는 내가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했다는 걸 알고 있나? 나는 나 자신이 공격성을 비롯해서 여타 반사회적인 감정은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네. 그럼 방금 고백한 그 증오는 뭐냐고묻겠지? 그건 반사회적 감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네. 그 감정은 타당한 상식에 기초하고 있으니 말일세. 무엇보다 이 세상에는 개자식들이 있고 누군가는 그들을 상대해야만 하니까. (나한테서 오존 냄새가 나지 않는가? 사람들이 번개 맞기 직전에는 찌릿한 느낌이 든다더군.)
개자식이란 표현이 아주 정확해, 융의 책 '아이온,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네. “흔히 그런 사람 옆에는어린 아들이 순조롭게 성장해서 결혼에 이르도록 일일이 챙기고 한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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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생하면서도 정작 자기 아들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어머니가 있다. 이런 어머니와 아들은 비밀스런 음모 속에서 서로 삶을 배반하도록 돕는다.” 융의 통찰은 내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내게는 근사한 핑곗거리가 돼주었네. 내 속에서 희석되지 않은 악이 매일 조금씩 드러났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네. 예를 들어 불만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나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묻지 않았네. 대신 누구 책임인가를 물었지. 그리고 언제나 타인이 제대로 행동했다면 그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결론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네. 그게 왜 악이냐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해 놓고 거기서 내 잘못은 눈 감고 넘어가려고 단단히 결심했다.면, 그리고 대신 내 문제를 책임질 희생양을 찾기로 했다면, 그건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이나 스페인의 종교 재판, 레닌의 문화 정화를 일으킨 사고방식에서 돌 던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게 아니겠나.
내가 자본주의의 결함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체계를 악용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평했을 때 자네가 내게 한 얘기가 무엇이었나?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안정만 추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는 자세가 미덕이 될 수는 없다."는 식의 말이었지.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과 나태함을 미덕으로 포장하는 편이 훨씬 쉽다.. 시골에서 으스대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둔 농부들을 탈탈 털고선 스스로 평민의 친구라며 거들먹거리던 치들처럼 말일세! 나는 내가 같은 상황에서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사리사욕이 없는 마음에서 도덕성이 비롯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혀 있어서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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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선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사고방식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왜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지. 아니면 왜 자기 삶의 목표를 명확히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한번도 묻지 않았네. 그런 사람에겐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융은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Relations Between the Ego and the Unconscious」라는 글에서 개인은 무의식 상태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이 갈등을 상위 차원에서 해결함으로써 의식에 이른다고 말했네. (나는 이러한 성인의 무의식 상태가 장기적 갈등이 없는 아이의 무의식 상태와는 다르다고 이해했네.) 바로 지난주에 나는 또다시 그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가만히 앉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던 중에 나에게 의미가 있고 성취감을 주는 활동을 바탕으로 대강의 인생 계획을 세워 볼 때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반대 의견이 들려오더군. 그렇게 살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그 계획은 이런저런 면이 잘못됐다는 식이었지. 결국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 이 행성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직업도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내가 상상한 옳은 길을 그르다며 비판하는 소리가 비합리적인 망상일 뿐이라며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가는 만큼, 나는 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단 말일세. 개별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활동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고 있는지 날마다 신문에서 보고 있지 않느냐고.
물론 자네 영향을 받은 덕분에 요즘에는 그런 생각의 늪에 그리 오래 빠져 있지는 않아. 이제는 산업화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 나서기를 바라거나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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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도해 볼 일이지,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자답하곤 하네. 이런 생각의 늪에 빠질 때 가장 힘들고도 가련한 문제는 이성은 인생 계획이 성공을 거둘 것임을 100퍼센트 확신하고 싶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런 확신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국 운이 따르고 인내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일이 잘 풀리리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점일세. 나는 이성으로 계몽된 현대의 정직하고 세련된 쥐이다 보니 믿음이니 뭐니 하며 종교적 냄새를 풀풀 풍기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필요 없다. 네. 믿음은 확실히 불합리한 것이고 그 어떤 불합리한 것도 내 행동의 지침으로 삼을 수는 없네.
예전에 나는 그저 직업 선택을 운에 맡기고 최대한 내 관심사를 결정에 반영하지 않음으로서 이 문제를 피해 갔네. 그러면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따라서 현 시대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있다고 믿었지. 또 애초에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 책임을 질 필요도 없었네. 이렇게 바위처럼 굳건한 토대 위에서 세상을 바라봤고 또 자기 자신을 등식에 넣을 만큼 멍청한 주변 사람들을 바라봤네.
나는 내면에 우리가 관심이라고 부를 만한 삶의 동기가 존재하고 그 동기가 삶에 응답하여 불확실성과 역경을 헤쳐 나가도록 이끌어 준다고 믿는 비합리적인 믿음이 있어야 내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네. 여기서 문제는 바로 이걸세. 이처럼 자신의 비합리적인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면 개인의 관심과 열정이 불확실하고 험준한 인생을 헤쳐 나가도록 우리를 지탱해 준다는 증거를 이성이 명확히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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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하는데 그 증거를 얻을 유일한 길은 위험을 감수하고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걸세. 이런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특출한 사람이네. 대다수 사람들은 타인, 그것도 소위 말하는 믿는 사람들의 안내와 지지가 필요하단 말일세. 이런 생각을 논할 때 종교적용어가 유용하게 쓰인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갑자기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악마가 내면의 가장 높은 자리에 합리적 지성을 두는 것을 상징한다던 자네의 말이 생각이 났네. “지옥에서 다스리는 것이 하늘에서 섬기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그렇다.면 지옥이란 인생의 수많은 위험을 명확히 의식한 이성이 개인을 사로잡아 인생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방해한 결과, 편지의 앞쪽에 묘사한것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하늘나라는 아마도 이성이 스스로 믿음 아래로, 그러니까 신에 대한 믿음 아래로 예속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도대체 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네 책에 관심에 깃든 신성」 이라는 장이 있더군. 이제야 자네 생각이 이해되기 시작했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네. 신에 대한믿음은 곧 자신의 관심에 불을 붙이고 부모의 품을 벗어난 세상으로 이끌어 주는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네. 이 같은 개인의 관심을 부정하는 것은 곧 신을 부정하는 것이고 하늘나라로부터 곧장 모든 열정이 좌절 속에서 영원히 불타 버리는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의미하겠지.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면서 했던 말이 뭐였나?미래에 닥쳐올 죽음의 공포 속에서 죽는 날까지 땅에서 수고해야 하리라는 그런 말이었지. 나는 이 말도 이제 확실히 이해할 수 있네. 내가
몇 년간 이 일 저 일 전전하면서 보낸 시간을 떠올릴 때 가장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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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기억은 당시 내가 느꼈던 일상의 무의미함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명징한 인식이었네. 하지만 지금처럼 내가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죽음이 먼일 같고 일하는 것도 꽤 견딜만하고 즐겁기까지 하다.. 473
이러한 사회적 병리 발생에 관한 이론'은 전체주의 혹은 퇴폐주의 인격과 사회 운동이 개인의 선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펴는 도교 사상을 살펴보면 이 이론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교의 전통에서는 인간의 경험 세계가 본질적으로 서로 구분할 수 없는 배경에서 떨어져 나온 구별 가능한 부분, 즉 도로 구성된다고 믿었다. '의미' 혹은 '길'로 번역되는 4.74 도는 존재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 나타난다. 도는 '음'과 '양'으로 나뉘는데, 이 둘은 각각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 요소인 '여성'과 '남성'을 상징한다. 고대 중국의 철학은 대부분 이 원물질인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를 병리적 이상의 원인으로 여긴다. 중국의 현자는 이 여성적 원리와 남성적' 원리 사이의 조화를 이루거나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고, 부조화의 원인이 된 잘못된 행동이나 해야하지만 책임감이 부족해서 실행하지 못한 행동을 찾아 진단하고 고친다. 음과 양은 전체를 표상하는 원의 형태에, 서로 대칭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좌우 소용돌이 무늬로 도식화된다. 검은 무늬 안에 있는 흰 점과 흰 무늬 안에 있는 검은 점 덕분에 이 문양은 더욱 정교해진다. 지나친 혼돈은 질서를 갈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음은 양의 어머니가 된다. 반면 지나친 질서는 숨 막히는 획일성에 대한 해독제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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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혼돈 여성성질서남성성 낮기지 전체주의 밤미지 퇴폐주의 허무주의 파시즘 그림 42. 경험의 구성 요소
이렇게 양은 음의 아버지가 된다. 현실을 맞닥뜨릴 생각도, 미지의 필요성을 인정할 생각도 없는 전체주의자는 자신의 나약함을 병적으로 과도한 질서' 속에 감춘다. 질서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퇴폐주의자는 자신의 미성숙함을 병적으로 과도한 혼돈 속에 감춘다. 전체주의자는 질서를 얻기 위해 성가신 자유를 기꺼이 희생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도록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고통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퇴폐주의자는 혼돈에 깃든 끔찍한 본성에 무지한 데다 질서라는 짐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규율과 책임 없이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퇴폐주의자는 삶에서 반드시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런 순간에도 인생에 진짜가 있음을, 자기가 겪는 고통이 진짜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 데다.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인생
로서 혼돈에 대한 갈망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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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낭비하며 어리석게 살아왔는지를 고통스러운 자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적 적응 양식은 예측할 수 없는 미지를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다. 현대인들도 자기 조상들과 다름없이 은연중에 이방인을 혼돈의 용과 동일시한다. 이방인은 뜻밖의 행동을 하고 예상 밖의 생각을 품고 있는데, 이것이 온전히 발현되면 사회를 극도로 뒤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는 미지를 회피하며 불확실성을 제한한다. 그에 따라 집단 구성원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대개 지도자와 똑같이 행동하고 가정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실업률이 오르거나 정치 체제가 흔들리는 것 같이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과거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휩싸인 전체주의자는 세계가 항상 질서 정연해야 한다고 믿는다. 무질서는 생각만 해도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체주의자가 창조한 세계는 한없이 메마르고 기계 같은 조직이 된다. 이렇게 동질성이 높아지면 적어도 잠시 불안이 경감되고 제한되겠지만, 불가피하게 닥쳐오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생물학에 빗대면 마치 자신이 속한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다양성이 없으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 다양한 대처 방식을 찾지 못하고 대체로 올바르지 않은 하나의 해결책만을 내놓게 된다. 차이와 미지는 억누르면 언젠가 반드시 부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못 본 척하고 넘어간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고 대개 특유의 발달 경로를 거쳐 더욱 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자들이 강요하는 질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씨앗을
624 · 의미의 지도
품고 있다.
전체주의자들은 완고할 뿐 아니라 잔인하며, 자기 안정을 희생하면서까지 잔인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한 예로 나치는 유대인을 박해하는 것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데 부담이 될수록 더욱더 가혹하게 박해했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증오는 너무나 강해진 나머지 제3제국 시기에 이르면 미지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원동력으로 일어난 애국심을 넘어서게 된다. 전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조국과 질서에 대한 비겁한 사랑은 깊이 파고들어 가 보면, 존재의 비극적인 조건들과 그 조건들을 명백히 드러내는 나약한 인생에 대한 증오에 불과하다.
올바른 지각이 없어, 그들은 이렇게 뇌까린다. “우리 인생은 짧고 슬프다. 수명이 다하면 별수 없이 죽는다.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우연이었고 죽고 나면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코로 쉬는 숨은 연기와 다름이 없고, 우리의 생명이란 심장의 고동에서 나오는 불꽃에 불과하다.
불꽃이 없어지면 우리의 육체는 재가 되고 영혼은 하염없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때가 지나면 우리의 이름조차 잊힌다. 누가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해주겠느냐? 우리 인생은 구름 조각들처럼 지나가 버리고 햇볕에 쫓기고, 열에 녹아 버리는 안개와 같이 흩어져 버린다.
인생의 하루하루는 지나가는 그림자, 한번 죽으면 되돌아올 수 없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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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음이라는 도장이 한번 찍히면 아무도 되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어서 와서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자. 늙기 전에 세상 물건을 실컷 쓰자.
값비싼 포도주와 향료를 마음껏 즐기자. 봄철의 꽃 한 송이도 놓치지 말자.
장미꽃이 지기 전에 장미 화관을 쓰자.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 환락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우리의 몫이며 차지이니 우리가 놀고 즐긴 흔적을 도처에 남기자.
가난한 의인을 골탕 먹인들 어떻겠느냐? 과부라고 특별히 동정할 것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 해서 존경할 것도 없다.
악한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을 정의의 척도로삼자.
「지혜서 2장 1~11절
전체주의자의 잔인성은 질서가 병적으로 강화될 때 나타나는 정서적 결과이다. 생명의 물이 고갈된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좌절에 끔찍한 권태가 더해지고, 더 나아가 질서가 점점 더 엄격해지면서변칙이 늘어난다. 그러면 고통과 좌절과 무력감에 더하여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과도하게 시달린 사람에게는 앙심을 품고 잔인하게 행동할 이유가 충분히 많다. 전체주의자는 잔인하게 행동하려는 동기가 생길 수밖에 없는 정서 상태로 자신을 몰아간다.
오류를 범할 때마다 미지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체주의자는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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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 하지만 오류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험에서 매번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렇듯 계속 적응하지 못하면 미지는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부정적인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 환경은 서서히 끊임없이 변하므로 여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현실과 환상의 괴리가 커지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쌓여 간다.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일수록 더욱 오랫동안 변화를 회피한다. 하지만 곧 미지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서 더 이상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 시점에 이르면 혼돈의 용이 지하 세계에서 등장해 그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그러면 그는 용의 배 속에서, 어둠 속에서, 지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는 증오가 찾아들기 마련이다.
한편 퇴폐주의자는 입버릇처럼 세상에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무언가를 성취해 볼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권위적인 전체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류로부터 자유롭다. 오류도 무언가 가치 있고 바람직하며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폐주의자는 "봐, 여기 무언가 새로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어.이게 바로 지금껏 내가 배운 모든 지식이 틀렸단 증거야. 역사는 믿을 게 못 돼. 규칙이란 임의적인 거고 인류가 이룬 성취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이런 판국에 뭔가를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기생충처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를 갉아먹으며 과거에 얹혀살고 있는 셈이다. 그 상태를 계속 고수해 나간다.면 그는 자기가 걸터앉은 바로 그 나뭇가지를 자르고 스스로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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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지 않던 야수의 아가리 속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습관적인 회피와 거부는 매우 직접적으로 인격을 약화시킨다. 인격은 탐험한 영토가 넓고 적절히 행동할 줄 아는 상황이 많을수록 더 강인해진다. 학습을 통해 강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 양식은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탐험을 통해서 생성되고 새로워진다. 이전과 다르거나 새로운 경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이 처한 환경은 단순히 성장의 결과나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서 바뀌기 마련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 철저히 준비를 해 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 더욱이 미래를 준비하려면 현재를 고스란히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변칙은 말 그대로 영혼의 '양식'이다. 미지는 탐험 과정에서 인격을 만들어 가는 원료인 것이다. 변칙을 거부하면 인격은 굶주리고 노쇠하며 점점 더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진실을 마주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미래에 진실을 마주할 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지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된 사람은 모든 지식이 솟아나오는 근원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자기 인격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키기도 한다. 이 같은 인격 해체는 저절로 가속화된다. 인격이 조금씩 나약해질 때마다 앞으로 더 나약해질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가복음 4장 25절
628 • 의미의 지도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증거를 외면하는 사람은 현재의 신념에 위협이 되는 모든 정보를 억압하고 파괴하려 들 가능성이 크다. 회피하고 억압하여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인격의 부분들은 의식적인 적응과정에 활용될 수 없고, 왜곡되고 무시당했기에 도리어 적응에 저항한다. 이처럼 행동과 심상과 사고가 분열될 때 인격은 약해진다. 나약한 인격으로는 의식 세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외부 사회와 내면화된 사회의 표상을 지키기 위해 개인차를 억압한 결과는 미지 앞에서의 나약한 인격으로 드러난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가복음 3장 25절
| 20세기의 우화
융은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인식하지 못한 심리적 모순은 운명처럼 세상 속에서 실연된다.”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물씬 묻어나는 표현이다. 세상이 어떻게 심리 상태(혹은 개인이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심리 상태)를 실연한단 말인가? 추상화의 목적은 경험을 표상하고, 이 표상을 조작하여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같은 장난감을 갖고 싶다면 우리는 장난감에 대한 권리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두 사람 중 하나라도 협상을 거부하면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도덕 차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시름에 잠겨 마음속 전쟁을 끝내지 못하면, 동요가 행동에 반영되고 심리적 모순이 행동으로 드러나 사람들의 눈총을 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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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분쟁을 해결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그 영향은 추상화 사슬을타고 내려가 우리의 말과 심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시대에 뒤떨어진 정체성과 신념을 제때 죽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 목숨을잃는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에서 스탈린의 공포정치 기간에 소련에 질서가 수립된 방식을 묘사했다.
A. B는 페초라강 어귀의 수용소 아다크에서 숙청이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밤이면 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이'자신의 소지품을 든 채' 호송대에게 끌려 나갔다. 그리고 밖에는 3구역의 작은 건물이 있었다. 사형수들이 한 번에 한 명씩 방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있던 감시병들이 달려들었다. 입은 부드러운 무언가로 틀어 막히고, 양손은 등 뒤로 하여 끈으로 결박되었다. 그러고 나면 마차가 있는 뜰로 끌려 나갔다. 죄수들은 한 번에 다섯에서 일곱 명씩 수레에 내던져져 '언덕', 즉 수용소 공동묘지로 실려 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이미 준비되어 있던 큰 구덩이에 버려져 생매장되었다. 악랄해서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끌거나 옮길 때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제압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다크에서는 이런 일이 밤마다 무수히 계속되었다.
바로 이렇게 우리 당의 도덕적,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475
강제수용소를 창안하고 설립하고 효율적인 집단 학살 장치로 정교하게 가다듬어 나간 과정은 인생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원동력 삼아 인류가 이루어 낸 최고의 기술적, 문화적 성취일 것이다. 강제수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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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는 영국에서 처음 창안되었고 독일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변모했으며 소련과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됐고 발칸 분쟁에서 되살아났다. 죽음이 유일한 생산품인 이 완벽한 공장은 말 그대로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증오와 기만과 비겁함이 협력하여 만들어 낸 관료 체계가 거둔 최고의 공적일 것이다. 이 효율적인 도축라인에서 지난 세기에만 수천만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말살당하고 노예로 부려지다 희생당했다. 이 같은 공포 정치를 통해서 압제자들은 거짓에 기초한 자신의 도덕 지식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체제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 Concentration Camp(원어 그대로 해석하면 ‘집중 캠프'라는 뜻이다.)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무언가 으스스한 느낌, 섬뜩하고 빈정대는 듯한 풍자적인 느낌을 준다. 수용소(캠프), 그것은 여름의 태양, 휴가, 풍자적 희극, 가장 무도회이자 군정, 복종, 효율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의 수용소'이다. 그것은 캠프를 두고 한 악마의 농담, 블랙 코미디이자 환상 속 이상과 순수 이데올로기, 전체주의자의 지상 낙원을 부지런히 좇다가 현실에 등장한 디스토피아적 상태이다. 강제(집중) 수용소는 임의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집중시켜)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그곳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제한하며, 인생을 집중, 증류, 축소하여 생의 본질, 즉 인간 활동의 기저에 있는 핵심 가치에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게 한다.
강제수용소는 수용소 문학이라는 장르를 낳았다. 여기에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혹독한 조건, 이를테면 11킬로미터 두께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옥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살을 태우는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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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새로이 돋아나게 만들어 또다시 불타는,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다.47수용소 문학 작품들에는 기묘할 정도로 비슷한 정서와 묘사가 등장한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낯설고 극단적으로 위협적인 경험에 대한 인간의 선천적 적응행동 및 사고 양식이 계속해서 재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모든 측면에서 일반적인 삶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노골적이고, 발가벗겨져 있다.
실례하오. 그대들.……… 삶을 사랑하오? 그래, 그대들 말이외다! '내 사랑, 삶이여! 오. 삶이여, 사랑하오!'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노래하고, 춤도 추는 그대들 말이지. 그렇소? 그럼 쭉 사랑하시오! 수용소의 삶도 사랑하시오! 그것 역시 삶 아닌가!!
그곳, 운명과 전투를 치르지 않는 곳, 거기서 그대, 영적으로 소생하리라.....….
그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네. 언젠가 축 늘어질 자신의 운명을 477
수용소의 생활 환경은 극단적이어서 거기서는 평소의 행동 성향이 증폭되고 영혼에 깃든 특성이 확대되어 나타난다.
수감자들은 대개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레, 부당하게, 인정사정없이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다. 수감 대상자들은 자기 의사에 상관없이 지하 세계로 추락한다. 자신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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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대한 판단, 미래에 대한 희망처럼 자기가 살아오면서 확립하고, 문화와 인격 속에 굳게 자리 잡힌 방어막을 고스란히 안고서 말이다. 이 자기기만적인 안전한 세계로 운명이 쳐들어오는 시각은 어두운 밤이다. 체포는 사전 경고 없이 이른 새벽에 일어난다. 이른 새벽은 사람들이 쉽게 겁에 질리고, 당황하는 시간이다. 집 안에 무력하게 모여 불안에 떠는 가족들의 안전이 비열하고 억압적인 당국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순진한 희망 속에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기 쉬운 시간이다.
"그만, 너는 체포됐다!”
그러면 당신은 새끼 양의 울음소리처럼 겨우 더듬거리는 것 외엔 아무 대답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체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순간 현재를 과거로, 불가능한 일을 절대적인 실재로 바꾸는 갑작스러운 섬광이자 타격이다.
그것으로 만사가 끝장이다. 체포되고 첫 한 시간, 아니 첫 하루가 다가도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아직은 좌절한 당신 앞에 서커스의 모형 달이라도 희미하게 깜박거린다. 뭔가 잘못됐어! 곧 바로잡아 주겠지!"
이제 전통적인, 심지어 문학적인 체포의 심상은 엉클어져 버린 당신의 기억 속에는 제대로 남지 못하고 가족이나 이웃의 기억 속에 쌓여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귀를 찢는 한밤의 초인종 소리일 수도 있고,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일 수도 있다. 흙도 털지 않은 군홧발로 당당하게 들이닥치는 주 보안요원들일 수도 있고, 그들의 등 뒤에 선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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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주눅 든 민간인 목격자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체포의 이미지는 떨리는 손으로 끌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갈아입을 속옷, 비누, 요깃거리,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가져가도 되는 건지, 어떤 옷이 제일 나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보안요원들은 계속 채근하며 방해한다.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거기서 알아서 먹여 줄 거야. 잠자리도 채근하는 것뿐..)
따뜻해." (모두 거짓이다. 계속 겁을 주려고...... 야간 체포는 즐겨 쓰이는 방식임이 분명하다. 그에 따른 주요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의 모든 거주자가 첫 번째 노크 소리를 들으면서 공포에 빠진다. 체포되는 사람은 따스한 침대에서 끌려 나온다. 그는 몽롱하고 잠이 덜 깨어 무기력하고 판단력도 흐리다. 야간체포를 하면 요원들은 위력 면에서도 우세해진다. 무장한 다수가 바지단추도 다 못 채운 한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478
체포는 갑자기 인격을 상실하고 가족과 친구와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격리당하는 신세가 됨을 뜻한다. 이처럼 모든 게 계획적이고 강압적으로 뒤바뀌는 순간, 집단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징표는 모조리 제거되고 이전에 품었던 이상은 파괴된다. 그때까지의 목표 지향 활동이 무용해지고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이 드러나고 가차 없이 이용당한다. 체포된 사람은 이전의 정체성과 예측 가능한 환경,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빼앗긴다. 심지어 야속하게 옷과 머리카락까지도 말이다. 이전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극도의 경멸과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사회적 맥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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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대립하는 형제들
락과 정체성이 완전히 파괴되면 지금 막 체포된 사람은 자신의 벌거벗음과 나약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 결과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비참한 상태가 되어 낯설고 불확실한 지하 세계로 떨어진다.
우리는 소독실 대기 장소로 보이는 작은 헛간 같은 곳에서 기다렸다. 나치 친위대원들이 나타나 담요를 펼치면 모든 소지품과 시계, 보석을 던져 넣어야 했다. 우리 사이엔 아직도 순진한 수감자들이 있어서 보조 역할로 와 있던 고참 수감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결혼반지나 메달, 호신품 등을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압수당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한 고참 수감자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으려 했다. 슬쩍 그에게 다가서며 코트 안주머니에 품은 종이 뭉치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봐요. 이건 과학 책 원고입니다. 무어라고 말씀하실지 압니다. 목숨을 부지한 걸 기뻐해야 한다고, 그것이 내가 운명에 기대할 수 있는 전부여야 한다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원고를 지켜야 합니다. 제가 평생을 바쳐 온 연구가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래, 이해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처음에는 동정하는 것 같더니 그다음은 재미있어 하고, 그 표정이 비웃음으로, 무례함으로 바뀌더니,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수용소 수감자였던 사람들이 지금도 쓰고 있는 말이다. 망할 놈!" 그 순간나는 명백한 진리를 깨닫고 내 심리적 반응의 첫 단계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행동을 했다. 지금까지 내 삶의 전부였던 것을 내버린 것이다. 479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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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사람에게는 공포스러운 세계에 감금되어 노예처럼 사는 동안 그를 지켜 줄 정교한 심리내적 체계가 없다. 치명적인 공포를 쫓고 행동을 이끌며 희망을 주는 그 어떤 기대나 바람도 체계적으로 품지 못한다. 그는 강제로 낙원에서 쫓겨난 후 자신의 근원적 한계와 벌거벗음을 가차 없이 의식하고 노예처럼 끝없이 노동에 시달린다. 그 결과 극심한 공포와 우울, 심리적 혼돈에 빠져들기 쉽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형무소의 하늘은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먹구름과 화산이 폭발하는 듯 잿빛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하늘은 폼페이의 하늘, 심판의 날의 하늘이었다. 체포된 사람이 그저 이름 모를 아무개가 아닌 이 세상의 중심.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는 형무소의 하늘은 무한이 높고, 맑고, 심지어 원래의 하늘색보다 더 열었다.
종교인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한 지점에서 똑같이 출발한다. 우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 하지만, 그래 머리는 이미 깨끗이 밀렸지 않은가! .… 어쩌다 이랬지? 어째서 우리를 밀고하는 자들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어떻게 적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얼마나 그네들이 미웠던지!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을까?) 왜 이리 무모했더냐! 너무 맹목적이지 않았는가! 실수는 왜 이리 많았던가! 어떻게 바로잡는다? 서둘러 바로잡아야 해! 글로 남겨야 한다……. 이야기해야 한다.…... 반드시 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릴 구할 수 있
636 · 의미의 지도
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우리는 제206조 양식에 이름을 쓰게 될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재판관이 우리에게 직접 선고를 내리거나 궐석 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호송 행렬이 시작된다. 우리는 미래의 수용소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때 얼마나 잘 지냈는지! (못 지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놓쳐 버린 기회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얼마나 많은 꽃을 두고 왔던가! ...…언제 다시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오, 아주 다르게, 정말 지혜롭게, 그렇게 나는 살 것이다! 우리가 풀려날 그날? 그날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이 날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이다. 그날까지 살아남는다! 살아남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것은 단순히 관용구 같은 표현이고 일종의 습관적인 말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러나 말은 그 온전한 말뜻과 함께 부풀어 오르고, 잔혹한 맹세가 되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맹세를 누가 하든, 맹세한 자는 피비린내 나는 폭발 앞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자신의 불행으로 공동체와 세상까지 빛을 잃게 만들었다.
이것은 수용소 생활의 거대한 분기점이다. 이때부터 길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진다. 그중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간다. 오른쪽으로 가면 목숨을 잃고, 왼쪽으로 가면 양심을 잃는다.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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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갈 정도로 고되게 일을 시킨다. 수감자들은 순전히 고통의 미학을 위해서, 가혹한 작업 조건과 극도로 궁핍한 환경에서 생산적인 일의 패러디481에 불과한 의미 없는 노동을 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의 수용소 생활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순간은 기상 시간이었다. 미처 동도 트기 전에 날카롭게 울리는 세 차례의 호각은 기진맥진하여 누운 잠자리로부터, 꿈속의 간절함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았다. 잠에서 깨면 우리는 젖은 신발을 잡고 몸부림을 쳤는데, 부종으로 염증이 생기고 부어오른 발을 신발 안으로 밀어 넣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구두 끈 대용으로 쓰던 철사가 끊어지거나 하는 사소한 문제로 투덜대거나 끙끙 앓는 소리도 흔히 들렸다. 어느날 아침, 나는 용감하고 위풍당당해 보이던 사람이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발이 너무 작아져 도저히 신을 수 없어서 눈 쌓인 마당에 맨발로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순간에도 나에게는 작은 위안이 있었으니, 그것은 주머니에서 꺼낸, 기쁨에 여념이 없이 베어 무는 작은 빵 조각이었다. 482
영하 50도 이하의 날씨에는 작업이 취소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날 일지에는 수감자들이 일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수감자들은 작업장으로 내몰렸고, 그날 수감자들을 쥐어 짜서 얻어 낸 성과가 어떠하든지, 다른 날에 기록을 더해 생산율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추운 날에 동사한 사람들은 졸렬한 의무 부서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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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사유를 조작해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더는 걷지 못하거나 몸이 상해네발로 기듯 뒤처진 자들은 다시 데리러 가기 전까지 도망치지 못하도록 호송대가 사살했다.) 483
20세기에 의도적으로 자행된 이 경악할 만한 만행에 관해 몰입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처럼 사악한 행위가 대부분 사회적이고 순종적인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과 자기 이해에 도달하고 나면 문학과 신화에 나타난 악의 힘과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악은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초월적 인격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난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파괴와 해체, 고통과 죽음만 추구하는 악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인간성의 한 측면이다.
오 장미여, 너 병들었구나!
폭풍이 울부짖는 밤
보이지 않는 벌레가 날아와
네 침상에서
진홍빛 환희를 찾아냈다.
|
그의 어둡고 은밀한 사랑이
네 생명을 파괴하는구나. 484
르완다 집단 학살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소련 내부의 억압으로 죽은 수천만 명의 희생자들(솔제니친의 추정), 중국 문화혁명 기간에 학살된 수많은 사람들(대약진 정책(!)이라니, 특히 희생자들을 집어삼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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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나타나는 또 하나의 블랙 유머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의도적인 강간과 수치를 경험한 수백 명의 무슬림 여성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본이 중국 본토에서 자행한 대학살과 같은 사건들은 인간의 동물적 측면이나 혹은 사회적, 심리적 영토를 지키려는 욕구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보다는 모든 인간의 영혼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병, 다시 말해서 견딜 수 없는 자의식과 고통스럽고 한계 지워진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병적으로 거부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공격성을 타고나거나 사회화되지 않아서 통제 불가능한 포식동물이 아니다. 이런 설명으로는 기껏해야 범죄자의 공격성밖에는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맹목적이고 자발적으로 사회에 길들여지는 것이 실제로 가장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인간의 악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나치를 무시무시하게 만든 것은 독일인의 범죄 성향이 아니라 규율이었고,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 들이 파괴적인 노동수용소에서 동족을 대규모로 박해하고 학살하게 만든 것도 다름 아닌 그들의 충성심과 애국심, 헌신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사회의 희생자라거나,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힘에 휘둘려 비뚤어진 무고한 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은 자기 모습대로 사회를 창조했고, 사회는 인간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만큼 인간을 타락시킨다. 인간은 악을 위하여 악을 선택한다. 인간은 고뇌 속에서 기뻐날뛰고 고통 속에서 즐거워하며 파괴와 질병을 찬양한다. 자기 형제를 고문하여 죽이고 그 무덤 위에서 춤을 춘다. 자기 자신과 타인의 나약함을 경멸하며 끊임없이 파멸하고 뒤흔들고 파괴하고 괴롭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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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하고 집어삼키려 한다.
들판에 불그스레한 바위가 두 개 있는 듯 보였을 테다. 세계 어디선가 우리 시대 젊은이들은 소르본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넉넉한 휴식 시간에 테니스를 즐기며 교내 카페에서 국제 문제를 토론하기도 할 것이다. 책을 내거나 그림을 전시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고루한 세계를 비틀어 새롭게 바꿀 방법도 모색할 것이다. 고전 작가들이 주제나 소재를 죄다 써 버렸다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할 것이다. 그 젊은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진보된 경험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자신의 정부와 보수 반동분자들을 욕할 것이다. 라디오 인터뷰에서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최근에 혹은 처음으로 출간한 책 속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을 멋들어지게 설명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 특히 우리 소비에트의 번영과 정의에 대해 확신에 차 평가할 것이다. 그저 언젠가 나이가 들어 백과사전을 편찬하면서야 훌륭한 러시아인의 이름은 알파벳의 모든 글자를 훑어도 찾기 힘들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옆에서 보면
빗방울이 뒤통수를 때리자, 서서히 젖은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이 실리다 말았거나 뒤집혀 있는 갱차들이 보였다. 모두 사라졌다. 갱도 어디에도, 뒤쪽 너른 들 어디에도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잿빛 빗줄기에 마을이 보이지 않았으며, 수닭도 마른 곳으로 숨어 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도 혹여 누가 슬쩍하지 못하도록 삽을 주워들었다. 삽은 우리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무거운 손수레처럼 삽을 뒤로 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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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마트로니나 공장 우회로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벽돌을 굽는 호프만식 가마를 둘러싼 긴 복도가 있었다. 바람이 새어 들어와 춤지만 건조했다. 우리는 벽돌로 된 둥근 천장 아래 먼지 속에 몸을 파묻고 주저앉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석탄 더미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죄수 둘이 485 그 속을 파고들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뭔가 발견하자 이로 물어보고는 자기 자루에 넣었다. 그러더니 자리에 앉아 각자 잿빛 비슷한 덩어리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자네들 무얼 먹고 있나?"
"이건 '해양 점토'라네. 의사가 먹지 말라고는 안 하더군. 아무런 효험도 없지만, 뭐 또 해가 되지도 않는다나. 배급 식량에다가 이거 1킬로그램씩만 더 먹어 주면, 정말이지 배가 좀 찬다니까. 어서 찾아보게. 석탄 속에 많아."
그리하여 채석장에서는 저녁때까지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 마트로니나는 우리를 밤새 내버려 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방에 전기가 나갔고, 작업장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우리 모두는 당직실로 불려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서로 팔짱을 끼라고 명령했고, 우리는 개 짖는 소리와 욕설을 들으며 보강된 호송대와 함께 주거 지대까지 호송되었다. 사방이 칠흑 같았다. 우리는 어디가 마른 땅인지, 굳은 땅인지 분간도 못 한 채 움직였고, 진흙이라도 밟고 발을 헛디디면 같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수용소 안 역시 어두웠다. 오직 개인 취사용 버너 아래에서 기분 나쁜 불빛만 새어 나왔다. 그리고 지저분한 식당에는 배식구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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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유 램프 두 개가 타고 있었다. 구호를 읽을 수도 없었고 멀건 쐐기풀죽 두 그릇도 잘 보이지 않았다. 입술로 더듬어 그릇 내용물을 빨았다.
그리고 내일은, 매일매일은 똑같을 것이다. 붉은 진흙으로 갱차 여섯 량을 채우면 거무튀튀한 죽 세 국자, 형무소에서도 우리 몸이 점차쇠약해졌던 듯싶지만, 여기서는 훨씬 더 빨랐다. 벌써 머리가 원원 울리는 것 같았다. 대항하는 것보다 굴복하는 것이 더 쉽다는 기분 좋은나약함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막사 안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우리는 홀딱 젖은 옷을 입은 채 맨바닥에 누웠는데, 아무것도 벗지 않는 편이 온습포를 두른 듯 더 따뜻했다.
뜬눈으로 검은 천장을,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여! 주여! 포탄과 폭탄 아래, 살려 달라 기도했나이다. 그리고 이제 간절히 바라오니 죽음을 내리소서!486
독일이나 소련에서 강제수용소를 건설하고 조직하고 운영한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편리한 가정일 뿐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487 강제수용소의경비병이나 수감자의 모습은 모두 현대인의 일면일 뿐이다. 지옥은끝없는 나락이다. 왜냐고? 지옥보다 더 나쁜 곳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이야. 불이다! 나뭇가지가 탁탁 소리를 내고 늦가을의 밤바람이모닥불의 불꽃을 이쪽저쪽으로 날려 댄다. 내부는 어둡고, 모닥불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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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나 혼자 있는 데다. 목수들이 남긴 부스러기도 더 던져 넣을 수 있다. 이 구역은 특권을 누렸다. 너무나 특권을 많이 누렸기 때문에 마치내가 자유인으로 사는 것 같았다. 이곳은 낙원의 섬이었다. 마르피노라는 '샤라시카'는 죄수들이 일하는 과학 연구소이다. 아무도 날 감시하거나 감방으로 부르지도 않고, 모닥불에서 쫓아내지도 않는다. 나는 솜옷 상의로 몸을 감싸고 있는데도,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매서웠다.
하지만 몇 시간째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여자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다가 그대로 얼어 버린 듯했다. 이따금씩 그녀가 재차 애처롭게 간청했다. "소장님! 용서해 주세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마치 여자가 바로 내 귀에 대고 신음하듯 바람을 타고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당직실에 있는 교도소장은 난로를 켜고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곳은 바로 우리 건물 옆에 있는 수용소의 당직실이었는데 거기서노동자들이 이쪽으로 건너와 수도관을 놓고 낡은 신학교 건물을 수리했다. 내가 보는 맞은편에, 여러 가닥으로 꼬인 철조망 바리케이트 너머로 당직실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 밝은 등불 아래 고개를 떨구고벌을 받는 젊은 처녀가 서 있다. 그녀의 회색 작업복 치마를 펄럭이는바람이 다리와 얇은 스카프를 쓴 머리를 때린다. 낮에 그들이 우리 구역에 참호를 파고 있을 때는 따스했었다. 그리고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간 또 다른 여자는 블라디키노 포장도로까지 기어올라 탈출했다. 감시병들이 실수한 것이었다. 그곳은 모스크바 시영 버스가 다니는 길이었다. 감시병들이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그녀를 잡기에 이미 늦었다.경보를 울리자 악독하고 음침한 소령이 도착했다. 그는 만약 여자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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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면 탈출에 대한 연대 책임으로 한 달 동안 전체 수감자들의 면회와 소포를 끊어 버릴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작업반 동료들은 분을 못 이기고 모두 고함을 질러댔다. 특히 그들 중 한 명은 사납게 눈을 굴렸다. 꼭 잡혔으면 좋겠는데, 제기랄! 저자들이 꼭 잡아서 사람들 앞에 세워 두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버렸으면!” (이것은 그녀가 상상해 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수용소군도에서 여자들을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추위를 맞으며 당직실 바깥쪽에 서 있는 여자는 그때 한숨을 내쉬고 이렇게 말했다. 하다못해 우리 대신 나가서 자유롭게 지내라!" 감시병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녀가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용소로 돌려보내지고 그녀만 당직실 앞에 '똑바로 서 있게 한 것이었다. 그때가 저녁 6시였는데, 이제 밤 11시였다. 그녀가 자세를 좀 바꿔 보려 하자, 감시병이 고개를 내밀고 이렇게 외쳤다. 똑바로 서, 안 그러면 재미없을 줄 알아!” 이제 여자는 움직이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용서해 주세요. 소장님! 수용소에 돌아가게 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나 수용소 내부에서도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들어와!" |
그들이 여자를 그렇게 오래 바깥에 방치한 것은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그녀가 작업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도 순진하고 어리석은 금발의 소녀라니. 실이나 한 타래 훔치다가 잡혀 왔을 것이다. 그래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내비친 것이더냐, 누이야! 평생 못 잊을 교훈을 주려는가 보다.
불이야. 불이다! 우리는 치열하게 싸웠고, 모닥불 속에서 승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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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모습일지 보았다. 바람이 모닥불 밖으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날렸다.
아가씨여, 저 불꽃과 그대에게 약속한다. 온 세상이 이 일을 알게 하겠노라고, 488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벌받는 소녀가 아니라 수용소 소장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가 바뀌어야 할 이유도, 우리 안에 있는 악과 싸워야 할 이유도 없다.
대체 만악의 원조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리도 깊은 적의가 나오겠는가..
인류를 그 뿌리에서부터 뒤흔들고
땅과 지옥을 뒤섞어서 위대한 창조주에게 앙갚음할
그런 생각이. 489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삶을 맞닥뜨린 후(그렇다. 그것도 삶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타락했다.
우리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거대한 수용소의 분기점에서, 이 영혼의 갈림길에서 대다수는 오른쪽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490
하지만 이들이 타락한 까닭은 단지 수용소의 처참한 삶의 조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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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만은 아니었다.
빵은 공평하게 나눠 주지 않고 무리 위로 던진다. 잡아라! 주변 사람들을 때려눕히고 그 손에 쥔 빵을 잡아채라! 제공되는 빵의 양은 한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둘은 죽어야 하는 정도이다. 빵이 소나무에 걸렸다. 나무를 넘어뜨려라. 빵이 탄광에 묻혀 있다. 가서 끄집어 내야 한다. 이런데도 자신의 슬픔, 과거와 미래, 인류와 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가? 당신은 내일이면 아무 가치도 없을 타산에 차서 지금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한다. 당신은 노동을 싫어한다. 그것은 주적이지. 당신은 주변 사람들도 싫다. 생사의 경쟁자이니. 당신은 팽팽한 질투와 불안감으로 서성인다. 어딘가 지금 당신 등 뒤에서 당신 몫이 될지도 모를 빵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어딘가 벽 너머에서 누군가가 당신 그릇에 담길지도 모를 감자를 퍼 가는 것은 아닐까.491
수용소의 극단적인 생활 여건은 수감자들이 수용소에 갇히기 이전에 이미 양심보다는 자기 몸을, 영혼보다는 안전을 택하기로 한 결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계기일 뿐이다.
사람들을 들여다보라.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 동안,
3분의 1은 삶을, 3분의 1은 죽음을 따른다.
그저 삶에서 죽음까지 흘러가는 사람들.
그들 또한 3분의 1이다. 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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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느끼던 탐욕과 두려움은 수용소의 극한 환경 속에서 솔제니친이 목격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듯한 행동으로 표출된다. 탐욕과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이나 과거나 미래나 혹은 인류나 신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잃고, 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일상에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대체로 수용소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 사회 체계와 자기를 절대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자기를 거부하는 방식, (스스로 획득하지 않은) 물리적 안전과 심리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이데올로기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하루는 친구 파닌과 함께 스톨리핀 객차 중간 선반에 누워 있었다. 몸도 편하고 호주머니에 절인 청어가 들어 있고 목도 마르지 않아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역에선가 우리 객차에 사람을 밀어 넣었는데……… 그중에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있었다! 수북한 수염과 안경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 대학의 교수였다. 우리는 네모난 구멍으로 머리를 길게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첫 마디만 듣고도 여간내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투옥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한참을 더 갇혀 있어야 하는 데다 즐거운 농담거리를 소중히 여겼다. 재미 좀 보려면 내려가야겠다! 객차에 여유 공간이 충분해서 우리는 누군가와 자리를 바꾸고 남자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좁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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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괜찮소."
"투옥된 지 오래됐습니까?"
“꽤 되었다오."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았나요?"
"있던 만큼 있어야겠지요."
"보세요. 가난에 찌든 마을이군요. 짚더미하며, 쓰러져 가는 통나무집하며."
"다 제정 시대의 유산 아니겠소."
“소비에트 시대가 벌써 30년입니다."
"30년이면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요."
“집단 농장 농부들이 굶어 죽고 있으니 끔찍한 일입니다."
“그네들 솔이라도 들여다보셨소?"
“객차에 있는 아무 농부한테나 한번 물어보세요."
"수감된 자들은 모두 음험하고 편견에 치우쳐 있다오."
"하지만 저는 집단 농장을 직접 봤는걸요."
"드문 경우였을 거요.
(수염을 기른 이 남자는 그중 어디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쉽게 말하지.)
"노인들한테 물어보세요. 제정 시대에 잘 먹고, 잘 입고, 명절도 많았다지 않습니까!"
"물어볼 생각도 없소. 인간의 기억이란 게 원체 주관적이라 모든 과거는 포장되게 마련이오. 죽은 소는 젖도 두 배로 줬다지 않는가. (이따금 속담까지 인용했다!) 게다가 우리 사람들은 명절을 싫어하고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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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즐기니."
"그럼 왜 많은 도시에 빵이 부족한가요?"
"언제 말이오?"
"예를 들면, 전쟁 직전에요."
"거짓말! 전쟁 전에는 모든 게 형편이 좋았소.”
"들어보세요. 당시 볼가강 연안의 모든 도시에는 사람들 수천 명이 줄을 서서……."
"그건 지역적인 공급 문제였고, 당신 기억력이 문제인 것 같구려.""그렇지만 지금도 부족합니다!"
"웬 허황된 소릴 하는 거요! 국고에 곡물이 1천억 톤이 넘게 있는데."
"그럼 그 곡식은 다 썩었겠군요."
"그 반대로, 신품종 개발도 성공했다오."
......… 그런 식의 이야기가 한참 이어져도, 남자는 태연하다.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내뱉는다. 그와 다투는 것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대장간이란 대장간은 다 다녔는데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의 부고를 쓸 때 '숭배의 시대 비극적으로 죽은 이라고 쓰지만 희극적으로 죽은 이'라고 고쳐 써야 한다.
하지만 그의 운명이 다르게 작용했다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얼마나 삭막하고 하찮은 사람인지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에 실린 그 이름을 공손히 읽었을 테고, 남자는 민중의 대표가 되거나 심지어 외국에 나가 러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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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의 논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와는 노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아니, 체스를 두는 게 아니라 '동부' 게임이라고나 할까. 정말로 그런 게임이 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게임이다. 상대에게 두어 번 정도 맞장구를 쳐 주고, 그 사람이 자주 애용하는 말을 써 준다. 그럼 상대가 기분이 좋아진다. 그는 주변에 적밖에 없는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니 으르렁거리는 데에도 지치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상대가 자기편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는 인간적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 자신이 역에서 본 것을 털어놓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대화하며 웃어요. 삶은 계속된다오. 당은 사람들을 지도하고, 누군가는 이 보직에서 저 보직으로 옮겨지지요. 그러나 우리, 당신과 나는 여기 갇혀 있구려.. 우리 같은 이들은 수도 몇 안 된다오. 우리는 진정서를 쓰고 또 쓰면서 우리 사건을 재검토해 달라고 구걸하고 특사 사면해 달라고 빌어야겠지요.….
혹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대학에서 한 동무를 집어삼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자는 진실되지 않은 듯싶고 우리 편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해도 일이 잘 풀렸던 것이다. 논문에 실수도 없고, 이력도 깨끗하다. 그러다 문득, 문서 기록국을 뒤지게 됐는데, 뭔가 찾았다! 이 동무가 쓴 오래된 브로슈어를 발견한 것이다. 이 브로슈어에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직접 보고 자신의 필체로 남긴 메모가 있었다. “경제학자란 놈이 똥 같은 소릴 지껄여놨군." "자. 이제 예상하시겠소만, 우리 동무가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그 뒤로 이 머저리 사기꾼 놈을 처리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쫓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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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위를 박탈해 버렸지."
기차가 덜컹거린다. 이제 누구는 앉아서, 누구는 누워서 다들 자고 있다. 이따금 호송 군인이 하품하며 복도를 지나다닌다.
레닌의 전기에 누구도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일화가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493
나약한 인생에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인간은 영원히 제몸 하나 지키지 못하거나 필요한 자원을 얻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인간은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는 도덕 지식, 다시 말해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에 따라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하나의 적응 양식(권위주의적, 퇴폐주의적, 창조적 적응 양식)을 선택한다.
수용소에서 타락하는 사람들은 이미 수감되기 전에 타락했거나, 타락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유로울 때도 타락하고, 때로는 사회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이다.
모이세예바이체를 우롱하려고 그녀를 초소에 묶어 두라 지시한 호송 장교는 침을 뱉었던 수감자들보다 극심하게 타락하지 않았겠는가?자, 그러면 작업반 동료들은 모두 그녀에게 침을 뱉었을까? 아마도 각 조에 두엇이나 그러지 않았겠나. 실제로, 아마 그랬을 것이다.
타치아나 팔리케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에 비열하지 않았던 인간이 수용소에 와서 갑자기 비열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의미의 지도
II
652 -
만약 어떤 사람이 수용소에서 급격하게 악해졌다면, 그것은 그가 악해진 게 아니라 단지 전에는 내보일 필요가 없던 내면의 비열함이 표출된 게 아니겠는가?
보이첸코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수용소에서의 삶이 의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식과 확고한 믿음에 따라 수용소 안에서 짐승이 될지 인간으로 남을지가 결정된다.
대담하고 단호한 선언이다! .… 그러나 그 혼자만 그리 생각한 건 아니었다. 화가 이바셰프 무사토프도 정확히 똑같은 주장을 펼쳤다. 494
이렇게 타락한 사람들, 왼쪽 길을 택한 사람들 중 일부는 무너져 내리고 썩어 간다. 병에 걸리고 죽음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완전히 망가지고 지쳐서 마지막 희망으로 죽음을 끌어안는다.
미래,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수감자의 운명은 암울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서, 동시에 정신적 버팀목도 잃어버렸다. 자신을 방치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대개 이런 일은 부지불식간에 위기의 형태로 발생했는데 그 증상은 수용소 생활을 해 본 사람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별 의미가 없긴 했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때문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개 이런 증상은 어느 아침, 수감자들이 옷을 입거나, 씻고 마당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달래도, 때려도, 겁을 줘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거의 미동도 없이 그저 누워 있을 뿐이었다. 만약 이 위기가 병으로 인한 것이라면, 병상에 끌려가지도, 자신을 위한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53
무언가를 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야말로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는 가만히 자신의 배설물 위에 누워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이 위험한 포기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극적인 사례로 목격했다. 우리 구역 상급 감시자이자, 상당히 유명한 작곡가 겸 대본 작가였던 F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박사,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내, 이상한 꿈을 꾸었지, 어떤 목소리가 뭔가 원하거나, 알고 싶은 것을 말하면 모든 질문을 대답해 주겠다 하지 뭔가. 내가 뭘 물었을 것 같소? 나를 위해서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고 싶다고 했다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나를 위해서 말이오! 언제 우리가 수용소에서 해방되고 고난이 끝날지 알고 싶었거든."
"언제 그런 꿈을 꾸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1945년 2월이오." 그는 대답했다. 그때는 막 3월이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목소리는 무어라 대답하던가요?"그는 슬쩍 "3월 30일이라더군." 하고 속삭였다.
F가 이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아직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꿈속에 들은 목소리가 옳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된 날이 가까워지는 동안, 수용소에 들어오는 전쟁 소식으로는 약속된 날짜에 우리가 해방될 일은 없어 보였다. 3월 29일, F는 급작스럽게 병이 났고 고열에 시달렸다. 3월 30일, 그의 예지가 그에게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했던 그날, F는 의식이 혼탁해지는 듯싶더니 정신을 잃었다. 3월 31일에 그는 죽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발진티푸스였다. 495
의미의 지도
654 •
한편 또 다른 부류의 수감자들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용소 권력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한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지치도록 일하던 사람들의 반대편에선다. 스스로 속박과 박해를 경험하고 나면 타인을 박해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썼다.
카포(동료 수감자를 감독하는 관리자) 선발 과정은 비관적이었다. 오로지 가장 악랄한 수감자들에게만 이 일이 돌아갔다(비록 다행스러운예외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치 친위대가 맡은 카포 선발과는 별개로,모든 수감자 사이에서도 일종의 자기 선택 절차가 계속 진행되었다.
보통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끌려 다니다 보면, 오직 생존 투쟁에서 모든 양심의 가책을 버린 수감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숨김없이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인정사정없는 폭력과 도둑질, 친구들을 배신하는 짓도서슴지 않았다. 496
대부분의 카포가 이전의 삶보다 수용소에서 훨씬 잘 지냈다. 대개카포들은 감시병들보다 더 가혹하게 수감자들을 대했고, 나치 친위대원들보다 더 잔인하게 그들을 때렸다. 497
솔제니친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자네 쓰러지고 처벌받고 삶을 송두리째 뺏겼군그래. 하지만 밑바닥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55
은 피하고 싶겠지? 총을 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나? 혈육도 밟고? 자! 받으라고! 도망가면 쏴 버려! 우리는 심지어 자넬 동지라고 부르고 적위군 배급도 주지.
그리하여…… 죄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총대를 꽉 움켜쥐고 발포한다. 그는 민간 감시병들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실제로 '사회 활동'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었나? 아니면 그저 가장 저급한 인간적 감정에 토대를 둔 냉혹하고 경멸적인 타산이었을까?) 498
수감자 대부분은 수용소에 갇히기 이전에는 사회에 잘 적응한 정상인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사회 체계와 사회가 거둔 성공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사회가 규정한 현재 상태와 이상적 미래상,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당하게 투옥되면 자기 지위를 상실했고, 자칫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크게 느낀다. 또한 자신을 이러한 박탈과 불안으로부터 지켜 주어야 하는 국가가 잘못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과거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던 사회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과거에 누린 지위가 불완전하거나 부패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불안, 우울, 소멸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 솟구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종종 현실이 된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위협을 마주하게 됐단 말인가?
명백히 드러난 불의를 합리화하고 부정하면 또 다시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할 기회가 부여되지만, 그러려면 자아 분열이라는 상당한 심리적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 그 같은 거짓을 믿고 따르려면 개인은
656 - 의미의 지도
더 많은 경험과 가능성과 의미를 집단에 바쳐야 한다. 이처럼 성령을거스른 죄의 대가로 그 사람은 법의 정신이 아니라 법률을 광신적으로 따르게 된다.
잘 가라, 언제나
기쁨이 머물던 행복의 터전이여, 경배하라.공포를, 악마의 세계를, 네 심연의 지옥을.
받들라. 너희 새로운 주인을,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마음이라. 499
또 충실히 거짓을 일삼으며,
잘 가라, 참회여! 선은 모두 내게서 떠나갔다.악이여, 너 나의 선이 되리라. 하다못해,너로 인해 갈라진 땅이나마 하늘의 왕과 함께 다스리고,아마 반 이상을 내가 다스릴 것이라.오래지 않아 인간도, 이 신세계도 깨닫게 되리라.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격정에 얼굴이 흐려지고,분노와 질투와 절망으로 몇 번이고창백해진다. 그 때문에 변장한 얼굴이 망가지니혹여 보는 자 있었다면 위장이 드러났으리라경건한 마음은 이런 추악한 근심에는
흐려지지 않는 법이니, 그것을 눈치채고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57
평온한 겉모습으로 내면의 동요를 가리는구나.
허위의 창조자요. 성자 같은 연기로
복수심에 싸여 깊은 악의를 감추고
거짓을 행한 최초의 존재이니, 500
잔혹과 기만에 충성을 다하며,
아. 왜 분노는 말이 없고 격노는 벙어리가 되어야나는 갓난애가 아니다. 비겁한 기도로내 악행을 뉘우치는 갓난애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하고자 한다면 지금껏 벌인 악행보다. 1만 배나 더 악한 일을 행할 것이다. 내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선한 일을 했다면 나는 마음속 깊이 그 일을 후회한다. 501
하는가?
선을 미워한다.
내 주위에서
즐거움을 보면 볼수록, 더 많은 번뇌를 느낀다. 역으로 증오에 둘러싸인 것 같도다.
모든 선은 나에게 골칫거리가 되고,
천상이라면, 내 상태 더욱 좋지 않으리라.
내 바라는 건, 여기도 아니요..
- 의미의 지도
658
천상의 존재를 굴복시키지 않는 한, 그곳도 아니며, 나의 바람에 의해 나의 비애를 덜고픈 건 아니나,
다른 이들도 나처럼 만들고 싶음이다.
그리하여 응보가 돌아온다 하여도.
오로지 파괴하는 행위로
잠재울 수 없는 마음을 덜기 때문이다. 502
인간은 자기와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애착을 갖기 마련이다. 불의에 희생당한 자에게 공감하는 사람은 불의를 저지를 수 없다. 반대로 폭군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나마 고통스러운 심리적, 사회적 도덕 갈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폭군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서는 자기 인격에 자행된 불의를 부인하고 자기 경험을 조작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조작은 수감자와 수감자, 인간과 인간, 인류와 자신을 잇는 유대감을 끊는다.
나에겐 절망뿐. 날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가 죽어도 날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그래, 동정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나조차 나 스스로를 동정할 수 없는데.503
박해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안위를 도모하는 피해자는 스스로 박해자가 된다. 그 결과 자신에게서 적응하고 통합하고 성장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을 박탈한다. 솔제니친은 열혈 공산주의 당원들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59
자신들이 만들고 지지한 체제에 의해 투옥되고 파괴되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묘사한다.
그들에게 닥친 상황은 그저 '고통스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러한 타격을, 그러한 몰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 사람들'로부터, 친애하는 당으로부터, 어느 모로 보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적어도 당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불친절한 질문은 금기시되었다. “당신은 무슨 연유로 투옥되었습니까?" 수감자들 중 유일하게 점잔 빼는 족속들! 1945년,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수감자나 전체 감방 사람들에게 체포 당시 일들을 우스운 일이나 되는 듯 되짚으며 진저리를 내곤 했는데 말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는 일례가 있다. 올가 슬리오즈베르크의 남편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가택 수사를 하고 그녀도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가택 수사는 4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그녀는 이 4시간 동안, 바로 그 전날까지 자신이 비서로 있던 브러시 공장의 스타하노프 노동자 대회 회의록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이제 영원히 작별해야 하는 자신의 아이들보다 회의록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더 신경 쓰였던 것이다! 심지어 가택 수사를 지휘하는 수사관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자, 이제 자식들과 작별 인사를 하시오!"
또 이런 일례도 있다. 카잔 교도소에 있는 엘리자베타 츠벳코바는
- 의미의 지도
660
열다섯 살 난 딸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엄마! 말해 줘요. 엄마가 정말 죄를 지은 건지, 아닌지 편지로 대답해 줘요. 난 엄마가 무죄 이길바라고, 그렇다면 나는 콤소몰(소비에트 청년 정치 조직에 가입하지도,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가 유죄라면, 다시는 편지도 안 보내고 엄마를 미워할 거예요.” 그리고 이 어머니는 작고 흐릿한 등불이 켜진 축축한 무덤 같은 감방에서 괴로워했다. 내 딸이 콤소몰에 가입하지 않고 어찌 살아간다는 말인가? 어떻게 내 딸이 소비에트 정권을 싫어하도록 둘 수 있겠는가? 나를 미워하는 게 낫다. 그리고 그녀는 답장을 썼다. “내가 죄를 지었단다. ....… 콤소몰에 들어가거라!"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인간이 견뎌 내기 너무 힘든 일이다. 가족의 도끼에 찍히고 그 생각을 정당화해 줘야 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신이 주신 영혼을 인간이 만든 도그마에 맡기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값이다. 심지어 지금도 정통 공산주의자라면 누구나 츠벳코바가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단언할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아이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일이며, 어머니가 딸을 잘못 이끌고 딸의 영혼에 해를 끼친다고 말해도, 그들은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다.
하나 더 있다. Y. T는 자신의 남편이 당을 지원하는 일에 반대했다.는 아주 진심 어린 증언을 했다!
오. 지금이라도 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비참했던지 그들이 이해라도 한다면 불쌍하기라도 하련만! 오늘이라도 그때와 생각을 바꾸었다면 이 이야기는 다르게 쓰였을 텐데!!
충성심이라고?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억지 고집일 뿐이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61
이 진화론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진화는 거부하면서 진화에 충성하는 것인가? 17년간 유형 생활을 한 니콜라이 아다모비치 빌렌치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을 믿었고, 틀리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충성인가 고집인가?
아니다. 그들이 감방에서 정부의 모든 행동을 옹호한 것은 연기도, 위선도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념 논쟁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 곧 미쳐 버렸을 테니까.504
“내가 틀렸다는 증거는 견딜 수 없어. 모두다 그 증거 탓이라고!"영웅은 이례적인 정보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의미를 캐내어 문화적 적응 체계에 통합시키는 과정을 상징한다. 반면 악의 화신인 악마는 절차, 일화, 언어 차원에서 이례적인 정보를 부인하고 영혼의 혁명적 적응 과정을 가로막으려 한다.
하나만 말해 보라. 누가 벽돌을 쌓았는가?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든 이가 누구인가 말이다. 꽉 막힌 자네들이었던가? 505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잠재력을 좁고 한정된 영역에 가둔다. 그처럼 적응 범위가 좁아진 사람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만 인생의 풍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이것은 틀림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행동은 늘 표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전체주의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을 잃고 무시무시한 혼돈에 휩싸일까 두려워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
662 - 의미의 지도
의 초월적 능력을 부정한다. 이데올로기는 변칙은 곧 해체이며, 해체는 곧 공포라고 선언한다. 또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악한 것이고, 그러므로 변칙은 악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례적인 정보가 그 자체로 악은 아니다. 이례적인 정보는 적절히 처리하면 개인과 사회를 쇄신하는 힘을 갖고 있다. 악은 변칙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인생의 의미도 진리도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의 결과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지옥으로 뒤바뀐다.
이제는
잃어버린 기쁨과 영원한 고통을 생각하고
괴로워한다. 이리저리 비참한 눈길을 돌려
엄청난 고통과 낙담을 목격하네.
고집스러운 교만과 변함없는 증오가 뒤섞인 눈.
곧, 천사의 시력으로 바라보니
이 음울한 곳은 황폐하고 거칠구나,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 사방에서
거대한 용광로처럼 타오른다. 그러나 이 화염에
빛은 없고 외려 가득한 어둠으로
비통한 장면만 보이는구나.
슬픔의 장소. 애절한 어둠, 그곳에
평화와 안식은 깃들지 아니 하리, 희망은 오지 않으리.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지독한 번뇌는
여전히 몰려오고, 불길의 홍수가 휘몰아친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63
꺼지지 않는 유황불로,
영겁의 응보가 기다리는 곳,
반역자들을 위해, 여기 그들의 옥이라. 신과 천상의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완전한 어둠 속, 그들의 자리니라.
가장 먼 곳보다 세 배나 멀리 떨어진 곳 506
사실이란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그 자체로 악하지는 않다. 그것은 (끔찍한) 현실일 뿐 악은 아니다. 선하거나 악한 것은 바로 사실을 대하는 태도이다. 악과 관련된 사실은 있어도 악한 사실이란 없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부인하는 태도가 바로 악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억압하는 순간 전통을 보호하려는 보수성은 자기와 다른 모든 것을 짓밟는 권위주의로 뒤바뀌고, 변혁을 꾀하는 진보적 희망은 현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퇴폐적 욕망이 된다. 악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끔찍한 사실이라고 혼동하는 것은, 마치 선을 영웅적 탐험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으로 나온 고정된 결과물이라고 혼동하는 것과 같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악과 혼동하고 나쁜 소식을 전한 사람을 탓하는 이들은 부정하는 태도를 합리화하고 흉포한 억압을 정당화하며 퇴폐주의와 권위주의에 도덕의 가면을 씌운다.
이례적인 경험을 부정하면 성장 가능성이 사라져 인격이 나약해진다. 또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과 고통 속에서 인류를 말살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진실을 억압하면 반드시 인격이 약화되고,
664 - 의미의 지도
TS
주관적 경험 세계가 의미를 잃고 메마르고 괴로워진다. 이와 반대로 자기 무지를 인정하는 겸손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변화를 위한 필수 전제이다.
신화는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력을 발전시키도록 모방의 본보기를 제시하며, 도덕적 행위와 의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영웅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격려한다. 영웅의 이야기는 개인과 사회의 안정을 뒤흔드는 유의미한 사실을 맞닥뜨릴 때, 전제적 국가를 따르거나 퇴폐적인 삶을 사는 대신 심리적으로 무너질 각오를 하고 자발적으로 제3의 길을 택하는 인간상을 소개한다.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사람은 행동과 사고가 편협해져서 약자를 증오하고 경멸하며 잔인하게 대하고, 가장 중요한 적응 전략으로 흔히 거짓을 택한다. 그 결과 이들의 경험 세계는 곧 지상에 있는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를 정화천에서 불붙여 거꾸로 내던졌고,
그는 불에 타 끔찍해진 몰골로 떨어져
영원한 사슬에 묶여 형벌의 불길 속에서
바닥없는 지옥에 살게 되었다. 507
사회 구성원이 수용한 도덕과 비도덕의 정의는 해당 사회가 받아들인 길의 개념에 따라 달라진다. 그 특정한 길의 한계 안에서 목표달성을 돕는 행동과 심상, 사고는 선으로 규정되며, 목표 달성을 방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65
해하는 것들은 어리석고 악하다고 규정된다. 따라서 빛 가운데 사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중시하는 개인이나 사회에게는 진리가 낯설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상위 도덕 차원에서 유익하며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대상이 하위 도덕 차원에서는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위 차원의 도덕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런 기능의 필요성이나 타당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혼돈의 용에 물든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혁명적 관점으로 바라본 최선'을 평가 절하하는 사람은 그 자신과 자기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 제한되고 편협한 목표는 위축되고 뒤틀린 인격을 낳는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최고의 자질, 참된 재능과 남다른 면모를 변칙의 영역에 내던지고는 그것을 자기 야망을 위협하고 좌절시키는 방해물로 취급한다. 이처럼 성장하지 못한 인격에게 인생과 책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이 되고원한과 증오는 이런 인생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 여겨진다.
이들과 반대로 삶의 길을 새롭게 정의하려면 행동과 심상과 사고를 재평가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하여 재등장한 혼돈을 겪어 내야 포괄적인 질서가 재구축된다. 이례적 정보가 출현했을 때 목표와 이상을 자발적으로 재평가하면 그동안 억압되었던 행동과 심상과 사고가 드러난다. 영웅적 탐험 과정을 목표로 삼고 진리와 용기, 사랑에 가치를 부여하면 지금까지 억눌리고 뒤틀렸던 가능성을 재통합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666 - 의미의 지도
생의 가장 위대한 시대는 우리의 악을 최선이라 부를 용기를 얻었을 때 온다. 508
그렇다고 모든 동기나 사실, 행동 가능성이 어느 상황에서나 똑같이 유익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선이나 악으로 규정하는 대상이 달라진다는 뜻이다(우리의 자기 인식은 대개 임의적인' 문화적 토대에 근거한다), 권위적인 남편의 요구를 일일이 다 들어주는 희생적인 아내를 예로 들어 보자. 그녀는 폭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악으로 규정하고 금기시한다. 순교자 역할을 맡고 공격성을 혼돈의 용과 동일시한다. 그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 짓발히고도 아무 말도 못 하는 비참한 신세로 살아간다. 편안하고 다정한 아내'라는 지금까지의 편협한 정체성을 벗어 버리고 남편을 무는 방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내의 행동은 남편의 나약하고 전제적인 성향을 강화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이들의 결혼 생활은 사회의 일부분이므로 사회를 개선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내는 화를 낼 줄 모르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타고난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에 위협이 될 만큼 부당하게 자기 권력을 확장하는 남편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다. 이처럼 현재의 불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잘못된 욕망으로 규정했던 동기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억압해 온 동기를 그대로 행동으로 표출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표현하지 못하던, 때로는 인정하지도 못하던 자신의 동기
장 대립하는 형제들 - 667
를 심리적, 사회적 체계 속에 적절하고 조화롭게 통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장 43~48절
사회적으로 확립된 특정한 길을 수용하면 경험의 의미를 잠정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목표는 여러 행동과 생각 중에서 수용하여 발전시켜야 할 쪽과 금지하여 억압해야 할 쪽을 결정한다. 만약 개인이나 사회의 목표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상태로 남거나 왜곡되면, 개인과 사회를 구원해야 할 행동과 사고가 억압되고, 즉 견디기 어려운 비극적 자의식의 무게를 표출시키
- 의미의 지도
668
고, 결국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병폐로 이어진다. 신과 인간에 대한 신성한 사랑이 아니라 물질적 안정이나 사회적 수용을 목표로 삼은 사람은 결국 진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결과, 경험 세계에 온전히 적응하는 데 실패한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69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서로 말하였다.
「마가복음 10장 17~26절
우리가 최선을 다해 섬기는 최상위 가치는 한 사람의 개인이자 사회적인 존재로서 무엇을 떠받들고 무엇에 복종할지를 결정한다. 만약 안정과 권력에 무엇보다 큰 가치를 부여하면 결국 모든 것이 편의주의에 따라 해석되고 만다. 이 같은 노선을 취하면 장기적으로 나약한 인격과 편협한 사회 환경이 발전하여 결국 심리적으로 붕괴되거나 사회적으로 혼돈이 일어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손님을 초대했다. 만찬이 준비되었을 때에 그가 손님을 초대하러 종을 보내었다. 종이 먼저 한 사람에게 가서 이르기를 '주인께서 만찬에 초대하십니다.” 하였으나 그가 말하길, '어떤 상인이 내게 돈을 빌렸는데 그가 오늘 밤 오기로 했소.. 내가 가서 그들과 상의해야 하므로 초대에 응하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이에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이르기를, '주인께서 만찬에 초대하십니다.” 하였으나 그가 종에게 이르기를, '친구가 결혼하는데 예식 준비로 바빠 초대에 응하지 못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말
670 - 의미의 지도
하였다.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이르기를, '주인께서 만찬에 초대하십니다.' 하였으나 그가 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땅을 샀는데 오늘 세를 받으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에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고하기를 초대한 모든 사람들이 사양하였습니다. 하니 주인이 종에게 이르기를 길에 나가서 아무나 보이는 자들을 데리고 오라.' 상인들과 사업가들은 내 아버지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509
자기가 옹호하는 가치가 아니라 가진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 인격을 위하여 소유물을 희생할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가 선택을 강요할 때, 그는 최선의 자기가 되기를 포기하고 자신이 쌓아 놓은 소유물을 택할 것이다. 이 결정에 따라 더욱 나약해진 그는 더 이상 비극적인 자의식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거짓의 편에 붙어 자신과 사회를 타락시키는 일에 적극 나설 것이다.
만약 행동을 이끄는 목표가 계속 병적으로 제한된 상태로 남아 있다면, 최상위 목표가 감각적 쾌락이나 사회적 수용, 권력 혹은 경제적 안정 같은 것에 머무른다면 어떨까? 그러면 이러한 목표에 반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경멸스러운 주인을 섬기도록 강요받으면서 병적으로 왜곡되고, 더불어 악으로 규정되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괄적인 구원 활동에 활용되지 못하고 예속되고 억압되고 정체될 것이다. 이렇듯 인격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고 병들면 인생에 진정한 위기가 닥칠 때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파멸하고 만다. 인간의 경험 세계를 묘사하는 길의 신화는 낙원을 잃고 비극이 발생한 후 구원되기까지의 여정을 아우른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진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71
정한 인간만이 간절히 구원을 바란다.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부정한다.
그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복음 25 장 44~45절
그리고 모든 희망을 잃는다.
심상과 의미로 표상되는 자기 모형은 현실에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나 품는 환상,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렇듯 모형과 현실이 불일치하고 진실을 일부러 외면한다는 것은 곧 이상적 행동 · 심상·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이례적인 행동 심상 · 사고가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억압하는 행동 · 상상 · 생각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렇듯 환상으로 현실을 대신한 모형을 계속 사용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적응하고 변화를 꾀하기가 어렵다. 그런 삶 속에서는 고통이 한없이 팽창한다.
672 - 의미의 지도
어디로 달아나도 지옥이다. 나 자신이 지옥이니. 가장 깊은 심연에서 더 깊은 심연이 날 집어삼키려 위협하듯 입을 벌리고 있으니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야 천국 같도다. 510
전통적으로 악의 표상인 악마는 자기 행동과 표상에 오류가 있다. 거나 자기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완고한 자만심을 꺾느니 차라리 영원히 고통받기를 택한다. 죄를 자백하고 신과 화해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를 거부한 채 영원히 부인하고 부정하는 영으로 남는 것이다.
아, 이렇게 항복이구나.
참회의 여지는 없는가, 사면의 여지도 없는가?
복종 외에는 도리가 없네. 하지만 내가 경멸하는
그 단어는 어렵구나, 수치심이 두렵구나.
내가 다른 약속과 다른 허풍으로
유혹한 하계 천사들에 둘러싸여.
복종할 바에야 전능한 그를
제압하겠다 뽐내면서, 아아, 이런! 그들은 모른다.
내 그 헛된 자만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그 번뇌로 내심 얼마나 신음하는지.
근사한 왕관과 왕홀을 들고 지옥의 왕좌에 앉은
나를 그들은 흠모하지만,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73
더욱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나는 더 심하게 타락하고 더 무섭게
고통의 왕좌에 있음이라. 야망이 찾은 기쁨이란 그런 것.
그러나 내가 참회하고 은혜를 입어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다 해 보자.
그러면 곧 높은 지위는 오만한 성격을 불러내고
곧 거짓 맹세도 주워 담으리라. 고통 속에 한 맹세는
지독하고 공허하여 물리기 쉽다 하리라.
진정한 화해란 결코 자라지 않음이다.
치명적인 증오의 상처가 이리 깊게 뚫린 곳에서는,
추락할 수는 있겠지. 비싸게 치르리라.
이중의 고통으로 바꾼 짧은 휴식.
처벌자는 안다. 그러니 내가 빌지 않는 만큼
그도 평화를 내어 주지 않는다.
모든 희망은 이리하여 사라졌노라. 511
이처럼 “내가 틀렸어, 잘못했어, 내가 바뀌어야 해."라고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부정하면 희망은 사라지고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실을 부인하면 신으로부터, 의미로부터,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의미 없는 삶은 기댈 곳 없는 고통 그 자체이자 마땅히 파괴해야 할 대상이 되고 만다. 프라이는 메타노이아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674 - 의미의 지도
생명의 길은 '메타노이아'로부터 시작된다. 메타노이아는 (공인된 성경 번역에 따르면) '회개' 라는 단어로 번역되는데, 회개라는 단어는 언뜻 하고 싶은 모든 일을 그만두라'는 식의 도덕적 금지를 암시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생을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관점을 전환하고 영적으로 변화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너른 시야를 갖게 되면, 무엇보다 그 당사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것에 애착을 갖게 된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마태복음 3장 8절)라는 세례 요한의 말은 유대인을 향한 것이었다. 뒤이어 요한은 유대인들이 중시하는 사회적 정체성(아브라함의 자손) 이 영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 메타노이아와 죄의 변증법은 이 세계를 예수가 '집'이라고 표현한 진실한 정체성의 왕국과 『구약 성경에서 죽음이나 무덤의 형태로 나타나는 지옥으로 나눈다. 지옥은 죽음과 무덤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이 역사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스러운 세계이기도 하다. 512
메타노이아는 적응 그 자체이다. 스스로 자기 오류를 극복할 수 있음을 믿고 오류를 인정하며, 그 결과 '대립하는 가치 사이에 끼인 불쾌한 분열을 겪고 나서 내외적으로 재통합을 이루고 회복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남는 목표를 포기하여, 평온하고 순박한 이들이 가는 길로 가자마자, 수감자라는 상태는 당신의 이전 성격을 놀라운 방식으로 바꿔 버릴 것이다. 당신 자신도 전혀 기대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75
5-3 대립하는 형제들
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악의에 찬 감정과 짓눌려서 생긴 혼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증오와 짜증, 초조함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미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억압된 상태로 인해 그와 정반대의 감정이 싹을 틔워 자라는 것이다.
예전에 당신은 매우 참을성이 없었다. 끊임없이 서둘렀다. 게다가 시간은 또 왜 늘 부족한지. 그러나 이제 시간이 많아서 달마다. 해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시간이 넘쳐난다. 그러면 혈관을 타고 당신을 진정시키는 이로운 분비액, 인내심이 흘러나온다.
당신은 상승한다. 발밑에서 돌이 바스락거린다. 우리는 그렇게 상승한다.
전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타인을 판단했다. 그리고 그만큼 절제 없이 칭찬했다. 그러나 이제 유순한 이해력이 당신의 비원칙적인 판단의 기초가 되었다. 당신은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의 약점도 이해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강점에 놀라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의 강점을 닮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면서 갑옷으로 감싼 듯한 자제력은 당신의 심장과 온몸을 덮는다. 질문을 서두르지 않고 대답 또한 서두르지 않는다. 당신의 혀는 쉽게 흔들리던 유연성을 잃었다. 당신의 눈은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서 번득이지도 않고 슬픔으로 어두워지지도 않는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인지 우선 확인해 봐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슬픔인지'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 삶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찾았다 기뻐 말고, 잃었다 슬퍼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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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전에는 무미건조했던 그대의 영혼은 이제 고통으로 무르익었다. 기독교의 교리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당신은 주위에 함께 갇힌 이들 중 당신과 정신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깨달았는가. 갇힌 후에야 비로소 난생처음 진정한 우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또 당신은 혈연으로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과거의 삶 속에서 당신 곁에서 당신을 사랑해 주었으나 당신은 모질게 대했던 가족들..
바로 이것이 무한히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생각의 바른 방향이다. 과거의 삶을 돌아보라. 당신이 저질렀던 나빴거나 부끄러운 모든 일을 기억하라. 그리고 생각하라. 이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당신은 무고하게 수감되었다. 국가와 법 앞에 뉘우칠 것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 앞에서는 어떠한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는 어떠한가? 513
메타노이아를 거부하면 지상 세계가 지하 세계에 물든다. 반대로 메타노이아를 의식적으로 수용하면 인격이 바뀌고, 그에 따라 행동과 심상과 사고가 바뀐다. 이에 관하여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썼다.
강제수용소에서 살던 우리는 막사를 지나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77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눠 주고 위로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들의 수는 적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도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단 한 가지, 인간의 마지막 자유는 빼앗지 못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사고방식과 자신이 나아갈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늘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매일,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릴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으로부터 내면의 자유를 빼앗겠다고 위협하는 권력에 복종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선택은 당신이 전형적인 수감자가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여 이 상황의 놀잇감이 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했다. 514
솔제니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남겼다.
불안에 떨던 일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믿음을 찾았고, 그로 인해 더 강해지고, 망가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산재해 있어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이 갈림길에서 선택을 내릴 때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만 나쁜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더욱 아프고 힘든 이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또 징벌 구역과 새로운 징역으로 위협받으면서도 밀고하기를 거부한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질학자인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그리고리예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41 년 지원병으로 봉사했던 과학자인 그는 바지
678 • 의미의 지도
마 근처에서 포로가 되어 모든 형기를 독일 수용소에서 보냈다. 이 뒷이야기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또 우리나라에서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았다. 나는 겨울에 에키바스투스 공공 작업장에 갔다가 그를 알게 되었다. 크고 고요한 눈동자를 보면 그가 솔직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흔들림 없는 솔직함이었다. 이 사람은 절대 고개를 숙이는 법을 몰랐다. 그는 10년 중 단 2년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했으며 거의 형기 내내 집에서 음식 소포도 받지 못했지만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 사방에서 수용소 철학을 심어 주고 영혼을 타락시키려 했으나 그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케메로보의 안치베스 수용소에서는 보안대장이 그를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부리려 했다. 그는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솔직히 당신과 얘기하면 기분이 아주 더러워져. 나 말고도 당신 좋다는 사람은 많을 테니 딴 데 가서 알아보시지.”
"이 자식, 네 발로 기게 해 줄 테다."
"그렇다면 차라리 목 매 죽고 말지."
이렇게 그는 형벌장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반 년 정도 견뎠을 때쯤. 정말 용서받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다. 집단농장으로 보내졌을 때, 그는 지질학자로서 준장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열심히 괭이질을 하고 풀도 베었다. 그리고 정말 어리석게도, 에키바스투스 채석장의 회계 담당자 자리도 거부했다. 작업자의 작업일지를 부정 계산해야 하며, 그 일로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민간인 십장이 맨 정신일 때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일이 있기나 할까?) 그래서 그는 바위를 캐러 갔다! 그의 정직함은 정말 말도 안 되게 이질적이어서, 야채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79
저장실 작업반과 함께 감자를 가공하러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훔쳐도. 그만은 감자 한 돌 주머니에 넣는 법이 없었다. 특별 지역인 기계공장의 수리 작업반이라는 좋은 자리에 있을 때에도 단지 독신인 민간인 공사 감독 트레이비시의 양말 세탁을 맡지 않으려 그 자리를 떠났다. (작업반 동료들은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똑같은 것 아닌가? 아니, 절대 다 똑같지 않다!)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가장 고되고 힘든 일을 고르다니, 그래도 그는 혼들리지 않았고 내가 그 증인이다. 그리고 더욱이 밝고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이 그의 몸에 미치는 놀라운 영향 때문에(비록 아무도 이러한 영향을 믿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쉰에 가까운, 젊지 않은 나이였던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의 신체는 수용소에서 더욱 강해졌다. 그의 류머티즘 관절염 초기 증상은 완전히 사라졌고, 발진티푸스를 앓고 난 후 그는 더욱 건강해졌다. 겨울에는 포대 자루를 머리와 팔 부분에 구멍을 내어 입고 다녔지만, 감기가 걸리는 일도 없었다. 515
자신의 부족함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선과 악을 재평가하는 일은 호루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호루스는 도덕률을 쇄신하는 과정으로서, 과거의 도덕률보다 더 상위에 존재한다). 그런 사람은 도덕률을 재평가하고, '세상을 창조하고 쇄신하는 인물, 질서와 혼돈 사이를 중재하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러한 인물의 정체성 안에는 인격의 모든 측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는 구세주이며, 구세주의 어려운 과업을 이루려면 인격의 모든 측면이 드러나고 구원받고' 단일한 체계로 통합되어야 하기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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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과거의 미성숙한 도덕관념으로 인해(여기에는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최고의 도덕적 성취로 상정하는 도덕관념도 포함된다.)억눌리고 제대로 자라지 못하던 인격의 모든 측면(심상과 사고로 나타나는 인격의 이차적 표상까지도)이 창조적으로 재통합된다.
이례적인 경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경험에 마주하거나 생각하기에 너무 두려운 대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어떤 대상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대상과 자신을 규정한다. 무언가를 회피하는 것은 “그것은 너무 두렵다."와, 나에게는 너무 두렵다."는 의미이다.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것을 받아 든 사람의 능력에 따라 갈린다. 그러므로 이례적인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적응 과정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낯선 대상을 회피하거나 억압할 경우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례적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경험에 견딜만하다는 꼬리표를 붙이는 동시에 자신이 주체적으로 그 만한 일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셈이다. 이런 자세는 성장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례적인 경험에서 새로운 정보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자애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용기 있게 의미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생의 목표가 질서에 대한 욕구에서 혼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격의 발달로 바뀔 때,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역설적이게도 영원히 안전이 보장된다.
등이 휠 정도로 고된 수용소 생활에서 이런 본질적인 체험을 하게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81
되었다. 인간은 어떻게 악인이 되고 어떻게 선인이 되는가. 성공에 도취되었던 젊은 시절, 나는 나 자신이 한없이 강하다 느꼈고, 그래서 무자비했다. 권력의 도가니에 빠져 있던 나는 살인자였고 또한 폭군이었다. 가장 악한 짓을 하던 순간에 나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확신했고, 체계적인 논리도 갖추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썩어 가는 감옥의 짚 위에누워서야 비로소 내 안에서 선의 첫 번째 떨림을 느낀 것이었다.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국가 간, 계급 간, 정당 간이 아닌 모든 인간의 마음속, 온 인류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분명해졌다. 이 기준은 움직인다. 그것은 세월과 함께 우리 안에서 태동한다. 악이 잠식해버린 마음속에도 선의 작은 보루 하나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아무리 선한 마음속에도 뿌리째 뽑아 버리지 못한 악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종교는인간 내부의 악에 맞서 싸운다. 이 세상에서 악을 온전히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나, 각각의 마음속에서 옥죄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역사상 모든 혁명의 거짓도 이해하게 되었다.혁명은 오로지 그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악의 보균자만을 말살한다(선의 보균자마저도 급히 골라내지 않은 채), 악 자체는 자신들의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더 확대시킨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20세기의 특별한 업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들은 악에 감염된 사람들 중 극소수를 죽이기는 했지만, 악이라는 신념그 자체를 죽였다. (물론 스탈린은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 그는 구구절절말하지 않고 총살해 버리길 바랐을 것이다.) 21세기가 되도록 인류는 아직 자멸하지 않았고, 스스로 목을 조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조류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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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쩌면 승리를 거두지 않겠는가?
그래, 만약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때는 전 인류의 역사가 털끝만큼의 의미도 없는 답보에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적을 몽둥이로 때려잡는 방법은 혈거 시대 인간도 알고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의 죄, 실수, 과오를 거듭 돌아보는 것만큼지혜를 일깨우기에 좋은 방법은 없다. 나는 여러 해에 걸쳐 골똘히 고심한 이후, 누군가 최고위층 관료들의 무정함과 집행인들의 잔혹함을언급할 때마다. 나는 대위의 견장을 찬 나 자신과 불길에 에워싸인 동프로이센으로 출정하던 우리 포대를 떠올리고는 묻는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더 나았다고 볼 수 있겠는가?"516
의미의 지도를 재구축하는 영웅의 적응 양식
| 창조적 영웅의 길
"LIN.RI"
- 불은 자연을 온전히 새롭게 한다gni Natura Renovatur Integra 517
퇴폐주의와 전체주의를 대신할 '제3의' 적응 양식은 영웅주의 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희귀하다. 영웅주의를 따르려면 집단이 구축한확실성을 자발적으로 희생시키고 미지를 마주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혼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은 창조가 일어나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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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길이며, 그 길을 따라가면 생동하는 문화적 요소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구축할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은 영웅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보호하던 역사의 품을 벗어나 역사에 대항하며, 그에 따라 무시무시한 미지를 마주하고 고통을 당한다. 이처럼 미지의 세계에 다시노출된 사람은 치명적인 공포에 휩싸이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끌어안는다. 영감을 얻어 재건하고 발전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영웅의 길에는 의미를 재통합하는 단계 이전에 의미가 해체되고 와해되는 단계가 항상 먼저 나타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천재성과정신 이상을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천재와 정신병자는 미지를 마주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 천재는 그의 적응 행동이 부적절하여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날 때 그 결과를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맞닥뜨린영웅이다. 반면 정신병자는 지금껏 자신을 집어삼키려던 괴물로부터늘 도망치기만 한다. 하지만 외면할수록 그 괴물은 더 크게 자라나마침내 그를 집어삼킨다. 천재는 와해되어 가늠할 수 없는 의미의 홍수 속에 잠겼다가 의미를 재구축하며, 이후 사회를 홍수로 뒤덮어 와해시키고 재구축한다. 하지만 정신병자는 의미의 홍수 속에 빠져 와해되어 죽고 만다.
미지를 자발적으로 맞닥뜨리고 그에 따라 과거에 적응을 이끌던도덕률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바로 영원한 인간의 정신, 즉 세계를 창조한 말씀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이 같은 인간 정신의 존재와 본질에 관해 이야기해 왔다. 다음은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 Reinhold Niebuhr 의 글이다.
684 - 의미의 지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정신'을 육체와 철저히 구분한다. 정신은 통합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원리, 즉 영혼과 삶을 조화시키는 '로고스의 기관'이다. 마치 '로고스'가 세계를 창조하고 형성한 원리이듯이 말이다.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들은 당연히 인간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이후 그리스 철학은 한편으로는 존재와 사유가 일치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성은 완전히 가공하기 어려운 어떤 형태가 없거나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재료에 작용한다고 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물질은 “사물을 형상화하고 개념화하는 과정 이후에 남는 것으로,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낯선 것이다. 이런 비존재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즉 비존재는 오직 그것이 어떤 개념적 결정의 도구가 될 때에만 실재성을 가지게 되는 "518 것이다. 519
인간 정신이 본질적으로 창조주와 유사하다는 관념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더 정교해졌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능이나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일시된 정신'의 본질은 바로 영원히 창조하고 변형하는 능력이다. 니부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 회귀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는 특수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 자아는 그가 세계를 아는 한에 있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85
서 세계를 안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세계를 모두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아가 자기 자신과 세계 너머로부터 이해될 때에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520
추상화 능력은 한없이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이다. 추상화하고, 그 추상화한 관념을 표상하고, 다시 그 표상을 추상하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능력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가가 따른다. 카드로 지은 집은 짓기 쉽지만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더 나아가 이 능력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악한 성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추상적 사고, 구체적으로 도덕과 관련한 추상적 사고는 일종의 놀이이다. 이는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게임과 같다. 놀이는 먼저 기본 가정을 세우고, 뒤이어 그것을 파악하고 수정하는 단계로 진행된다. 놀이는 종류에 상관없이 일단 규칙이 확실해야 하며, 그 규칙을 바꾸려면 먼저 규칙이 드러나야 한다. 놀이는 어떤 가정(규칙, 환경)에 따라 '세계'의 심상을 구축하고 그 상상의 세계 속에서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놀이를 만들고, 놀고, 놀이를 바꾸는 과정은 현실에서 해야 할 행동을 연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놀이가 복잡해질수록 현실에서의 활동과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놀이는 첫 번째 발달 단계에서는 절차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이 수준에서는 규칙이 암묵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일단 놀이의 표상이 만들어지고 나면, 이 놀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고, 마지막에는 놀이의 규칙을 바꿀 수 있다. 피아제는 아동이 놀이 규칙을 만드는
- 의미의 지도
686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규칙의 실행 혹은 적용에 관한 관점에 따라 네 가지 순차적 단계가 나뉘어진다.
첫 단계에서 아동들은 순수하게 운동 차원의 개인적 특성을 보이며, 자신의 욕구와 운동 습관에 따라 구슬을 가지고 논다. 그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례화된 도식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놀이는 여전히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동 차원의 규칙은 있어도 진정한 집단차원의 규칙은 없다.
자기 중심적이라고 묘사되는 두 번째 단계는 아동이 성문화된 규칙의 사례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시점에 시작되는데, 흔히 2세에서 4세 사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아동은 규칙의 사례를 모방하긴 하지만 여전히 놀이 상대를 찾지 않고 혼자 놀거나 혹은 누군가와 같이 놀더라도 상대를 이기려 들지 않으며, 따라서 상이한 놀이 방식을 통일하려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단계의 아동들은 함께 놀이를 할 때조차도 제각각 자기 방식대로 놀이하며 (모두가 동시에 이기는 게 가능하다.) 규칙의 성문화에는 관심이 없다. 타인을 모방하지만, 받아들인 사례를 순전히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이러한 이중적 특성을 우리는 자기 중심성이라고 지칭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7~8세경에 나타나는 초기 협동 단계이다. 이제 놀이 참가자들은 상대를 이기려고 들며, 상호 규제와 규칙의 통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놀이 도중에 규칙에 합의하기도 하지만 규칙의 개념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다시 말해서, 학교에서 같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87
은 학급에 속해서 늘 함께 놀이하는 7~8세의 아동들에게 따로따로 구슬 놀이 규칙에 관해 질문하면 그들은 흔히 상이하고 모순된 설명을 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11~12세 사이에 규칙의 성문화라는 네 번째 단계가 출현한다. 이 단계에서는 놀이의 모든 세밀한 절차가 확정될 뿐만 아니라 관찰 가능한 실제 규칙도 사회 전반에 알려진다. 같은 학급에 속하는 10~12세경의 아동들은 놀이 규칙과 규칙의 변형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유사한 답을 제시한다.
....... 이제 규칙에 대한 의식으로 넘어가 보면 상세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크게 보면 분명히 드러나는 발달 단계가 있다. 발달은 세 단계에 걸쳐서 일어나는데, 두 번째 단계는 자기 중심적 단계 중에 시작되어 협동 단계 중반부(9~10세)에 끝나며, 세 번째 단계는 협동 단계의 후반부와 규칙의 성문화 단계 전체를 포함한다.
첫 번째 단계(자기 중심적 단계의 초반부)에서 규칙은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 왜냐하면 규칙이 순전히 운동 차원의 규칙이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자기 중심적 단계) 무의식적으로 강제성이 없는 흥미로운 사례로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자기 중심적 단계와 협동 단계의 전반부)에서 규칙은 성인에게서 나와서 영원히 지속되는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규칙을 바꾸자는 제안마저 규칙 위반으로 인식된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규칙은 상호 동의에 따른 법으로 간주된다. 충실한 집단 구성원으로서 법을 존중해야 하지만, 일반 여론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법을 바꿀 수 있다.
- 의미의 지도
688
규칙에 대한 의식의 세 가지 발달 단계와 규칙의 실행과 관련된 네가지 발달 단계 간의 상관관계는 통계 결과에 불과하므로 대단히 조야하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이 둘의 관계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집단의 규칙은 처음에는 개인의 외부에서 비롯된 신성한 것이었다. 가 차츰 규칙이 내면화됨에 따라 상호 동의와 자율적 양심의 산물로 바펀다. 규칙의 실행과 적용에 관해서 말하자면, 규칙을 신성시하며 존중할 때는 자연히 규칙의 내용에 대하여 초보적인 지식을 가지고 적용하는 데 반해, 합리적으로 타당한 근거에 입각하여 존중할 때는 각 규칙을 더욱 상세히 효율적으로 적용하게 된다. 521
자기가 속한 문화의 전제를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두번째 발달 단계에서는 아동들은 과거의 표상을 절대적 진리로 숭배하는 '원시인'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고한다. 양쪽 모두 주요 관심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여러 목표를 동시에 지속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어떻게 본능을 억누르고 행동을 체계화할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난 이후에야 해결 수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상위 차원의 사고는 놀이 규칙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과 전통적 질서를 거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추상적 등력이 발달하면 앞서 제기한 도덕률의 메타 문제, 즉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의 문제에 답할 수 있게 된다.522 역설적으로 이 메타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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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덜 추상적인 질문인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나 혹은 “무엇이 선인가?'에 대한 최종 해답을 주기도 한다.
서구의 종교적 전통에서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1) “무엇이 선인가?"라는 도덕률의 핵심 문제와 메타 문제(“무엇이 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구분 짓는 본질적 차이와 (2) 각각의 차원의 구조, (3) 도덕률의 핵심 문제와 해답이 발전함에 따라 메타 문제와 해답이 뒤따라오는 방식 그리고 그에 수반하여 (주기적으로)(자)의식이 강해지고 정교화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자)의식의 문제에서 시작해 보자분 자기와 타인을 포함한 인간 행동의 본질을 서술 기억 체계에 더 정확히 입력할 수 있게 되면서 발생했다. 인간 행동의 본질에 관한 정보는 먼저 이야기 혹은 신화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신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절차 차원의 지혜에 관한 일화 차원의 표상을 의미 차원에서 활용한다. 이야기의 의미를 분석하는 비평을 통해서 우리는 추상화된 도덕 원칙을 끌어낼 수 있다. 행동 속에 암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가 그 후에 일화 차원(이야기나 신화)에서 표상된 도덕률이 처음으로 순수 의미 차원에서 성문화되면 목록의 형태로 나타난다. 법이나 도덕 규칙의 목록은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쉽고 단순하게 명시한다. 이처럼 명시적인 규칙 목록은 명시적 도덕 철학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볼 수 있으며, 어머니의 세계에서 갓 벗어난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 (자)의식의 문제는 일정 부
이 같은 목록이 유대교와 기독교적인 의식,에 떠오른 것은 유대인을 위한 법전을 편찬했던 모세 덕분이다. 모세는 신화 속 영웅의
690 - 의미의 지도
원형적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원시 부족의 초자연적 조상과도 특성을 공유한다. 한 예로 모세는 출생의 위기를 겪고, 낳은 부모와 기른 부모가 달랐다(낳은 쪽은 미천한 노예 출신이고, 기른 쪽은 고귀하며 신성한 왕족이다).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524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레위 가문의 한 남자가 레위 가문의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91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해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공주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열어 보니, 거기에 남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그때에 그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
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올까요?"
바로의 딸이 대답하였다.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샀을 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였다.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절, 2장 1~10절
「출애굽기 1장 15~22
692 - 의미의 지도
장성한 모세는 두 번째 정체성인 이집트 왕자로서의 유산을 버리고 히브리인 집단에 합류하고,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해 낸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견딜 수 없이추락한 현재 상태에서, 그들이 죄를 속죄하는 광야를 지나(여기서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확립한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 곧 약속의 땅으로 이끈다.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경에 등장하는 속죄의 양식은 출애굽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데, 이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이집트 체류 기간이다.성경에서 “쇠를 녹이는 용광로”로 묘사되는 이집트에는 여러 재앙이닥치고, 마침내 히브리인을 전멸시키고자 했던 이집트인들은 거꾸로장자를 모두 잃고 만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로부터 독립하고 이집트 군대가 수몰되는 결과로 끝이 난다. 두 번째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도는 기간으로, 그들은 한 세대가 죽고 새로운 세대가 낙원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를 떠돈다(시편 95편 11절).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초월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집트와 광야, 약속의 땅의 진정한 상징적 의미는 예언자들의 시적언어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세 번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시기로, 구세대를 상징하는 모세는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죽는다. 기독교 유형학에서 ...… 이는 모세가상징하는 율법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나안을 침공하여 정복하는 자는 예수와 이름이 같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이다.525/526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93
모세는 혁명가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모세는 수단뿐 아니라 목표까지 재평가한 인물이었다. 이 같은 혁명적 재적응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 뒤따른다. 낯선 환경에 의해 억압에서 풀려난 여러 감정이 서로 다툼을 벌이고 나서야 잠잠해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과정을 길고도 힘든 광야 생활로 극적으로 그려 낸다. 그 기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은 이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암시한다. 바로 안정된 상태를 재건하기에 앞서, 공백 기간에 겪는 고통과 혼란은 '영의 양식'을 먹은 자, 그리고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여 지혜와 인내와 믿음을 얻은 자만이 견딜 수 있다는 뜻이다.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재판하는 역할을 맡는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강하고 통합된 인격을 인정받고, 여러 가치 사이에서 갈등을 벌이는 사람들의 중재자로 선택된 듯하다. 재판관의 역할을 맡은 모세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만 했다.
그 이튿날, 모세는 백성의 송사를 다루려고 자리에 앉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었다.
모세의 장인은 모세가 백성을 다스리는 이 일을 모두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백성의 일을 어찌하여 이렇게 처리하는가? 어찌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을 모두 자네 곁에 세워 두고, 자네 혼자만 앉아서 일을 처리하는가?"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였다.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저를 찾아옵니다.
- 의미의 지도
694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생기면 저에게로 옵니다. 그러면 저는 이웃간의 문제를 재판하여 주고,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8장 13~16절
이처럼 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수용한 모세는 끊임없이 도덕 판단을 내리면서 비롯되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감내해야 했다. 가치의 위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추상화된 가치들은 마음속에서 다윈이 말한 생존투쟁과도 같은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이러한 압박감을 감내할 능력이 있다면, 그 결과로 자신과 세계를 구원하는 적응적 행위가 이루어진다. 성경 속에서 모세의 경우 그것은 '번역'의 형태로 나타났다. 모세는 절차 및 절차에 대한 이야기 표상으로 남아 있던 도덕 원칙을 추상적 언어로 번역했다. 그것이 실제로 모세 한 사람의 업적이든지 아니면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찰나에 불과한)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사람이 함께 이룬 업적이 신화적 기억 속에 '단일 사건'으로 융합된 것이든 간에, 이는 인류의 사고력이 놀라운 질적 변화를 겪고 진보를 이루어 냈음을 의미한다. 명시적 의미 차원의 도덕 지식의 출현은 신화에서는 계시에 의해 '일어난 일'로 묘사된다. 계시는 '하늘로부터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경우에는 신비로운 상상의 영역인 일화 기억 체계로부터 구체적인 언어 영역인 의미 기억 체계로의 계시를 의미한다.
이처럼 인지 능력이 크게 발전하면 그만큼 압도적인 정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더 정확히 말해 억제 상태에서 풀려나게 된다. 이는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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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일에서나 심리치료 과정에서 '통찰'을 경험할 때 흔히 느껴지는 정서이다. 이는 절차, 일화, 의미 기억 체계가 일치된 심리적 통합을 이루거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여러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여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물의 다양한 효용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약속과도 같다. 이러한 첫 발견, 유레카!'의 순간은 경험 세계를 자발적으로 혁신하는 과정에 따르는 긍정적 측면이다. 출애굽기」는 이러한 측면을 모세가 하나님과 오랜 기간 대면한 후 그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를 통해서 극적으로 그려 낸다.
모세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밤낮 40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 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출애굽기 34장 28~32절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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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얼굴'은 신화 속에서 개인과 태양빛이 동일시된 것을 의미한다. 태양빛은 깨달음을 상징하며, 모세가 잠시나마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변모한 것을 나타낸다. 이 같은 엄청난 도약'의 결과로 모세는 잠시나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된 것이다.
모세는 그때까지 신화 속에 표상되고 행동에 내재되어 있던 관습을 명시적 의미 차원의 법으로 바꾸었다. 이 새로운 차원의 법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법이 바로 「십계명」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죗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97
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52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
「출애굽기 20장 3 ~17절
전통을 성문화하려면 일단 전통이 존재해야 한다. 적응 행동을 표상하려면, 먼저 그 행동이 생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통에 담긴 지식은 진화의 압력 속에서 생성되어 일차적으로는 사회적 행동차원에서 활용되고, 이후에 이차적으로 의식 차원을 거슬러 올라가 상위 차원의 표상으로 번역된다. 이렇듯 진화는 '표상에서 행동'으로 진행되는 만큼 흔히, 더 근본적으로는 '행동에서 표상(일화 및 의미)'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다시 말해서 적응 행동과 그에 대한 신화의 묘사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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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추상적 언어로 표현된 지식으로 진행된다. 529/530/531
전통이 법제화되면 과거에는 기껏해야 심상으로 부호화되었던 지식은 언어로 추상화되고, 그 결과 문화의 도덕률과 도덕적 개인이 처음으로 '인식'된다. 이런 변화는 신화에서는 한 영웅의 내면에서 지식의 정교화 수준이 질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수세기에 걸쳐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관념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이다. 신화 속 영웅의 행위에 하늘의 속성이 부여되는 것은, 이 혁명적인 사건의 중요성 및 이 사건이 일어난 내면의 무대와 근원532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인물들은 위대한 시대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힘이 내부에 축적되어 있는 폭발물이다. 이는 항상 역사적, 생리적으로 오랜 기간 그들에게로 힘이 모이고 축적되었으며 절약되었고 보존되어 왔으며 그리고 오랫동안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이렇게 힘이 폭발하지 않고 축적되기만 하면서 긴장이 지나치게 커지면, 아주 우연한 자극만으로도 '천재', '위대한 행위', '위대한 운명'을 세상에 불러 낼 수 있다. 533
각 사회의 도덕 지식은 절차 차원에서 형성된다. 먼저 개인의 탐험행동으로 인해 새로운 행동 양식이 출현하고, 이 행동 양식은 앞서 언급한 제약 조건에 따라, 즉 호소력이 있는지, 스스로를 지탱할 수
• 이 우상의 황혼)(20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아카넷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699
있는지 등에 따라 생존 경쟁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위계적으로 조직된다. 일화 기억 체계는 절차 차원의 행동과 결과를 심상으로 기록하고, 그에 따라 절차 기억과 유사한 패러다임 구조를 갖게 되며, 후에 의미 차원의 지식으로 기록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지(자연)는 신화 속에서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양가적 정서가를 지니는 위대한 어머니로 표상된다. 기지(문화)는 위대한 아버지, 압제자이자 지혜로운 왕, 권위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보호하는 인격으로 나타난다. 인식자인 인간은 서로 다투는 신화 속 형제들, 전통의 아들인 영웅과 반영웅, 그리스도와 사탄, 역사와 전통의 영원한 창조자이자 파괴자로 표상된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의미 차원의 지식은 일화와 순수한 언어 차원의 관념 사이를 잇는 다리로서 행동에서 '규칙'을 이끌어낸다. 이 규칙을 적용하면 환경이 변하고, 그에 따라 절차 및 일화 차원의 표상도 변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계속해서 순환한다.
문화, 적어도 문화의 긍정적 측면은 나약한 개인을 보호한다. 하지만 절대적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그 대가로 개인의 자유와 개성, 즉 창조성을 요구한다. 자신의 창조성을 희생하기로 한 개인의 선택은 결국 인생에서 불안이나 고통이 아닌 즐거움과 의미를 앗아 가고 인생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개인은 암묵적, 명시적으로 해당 문화권의 대다수가 절대적 진실로 수용하는 원칙과 규범 체계 안에서 자란다.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노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 유산에 대한 보답으로, 개인은 그 유산에 의해 조성되고 형성되어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조성에 유익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영웅주의를 따르는 개인
의미의 지도
700 -
에게 흥미롭고 내적 보상을 주는 활동들은 종종 기존의 문화 체계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인 위대한 아버지는 인간을 무서운 어머니로부터 보호한다. 위대한 아버지는 문명화된 질서이고 교육이며, 구현되고 표상된 지혜이며, 역사에 등장하여 인류의 적응 행동에 족적을 남긴 모든 영웅들을 추상화하고 통합한 화신이다. 또한 인류가 따라야 할 의례적 본보기로서 훌륭한 왕이며 지혜로운 판관, 용기와 실천과 예술과 사상의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특정한 행동 양식을 표상하는 한 가능성의 적이며, 현재의 적이고, 영웅의 적이며,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영혼의 포획자이며 폭군이자 관료주의자이다. 이것은 무서운 아버지로서의 역사이며, 과거의 무게이고,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편협하고 완고한 사상과 편견에 사로잡힌 치명적인 대중이다. 또 인생의 창조적 측면인 위대한 어머니를 억압하는 힘이다. 무서운 아버지는 새로운 것, 그리고 자신의 통합된 체계와 절대적 지배에 위협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억압한다.
따라서 일단 자연이 표상하는 미지의 힘에 대항하여 역사가 수립되고 나면, 창조적 영웅은 '자연'(미지)에 맞설 뿐 아니라 대중의 견해(대중이 이데올로기를 따른다면 당대의 슬로건(슬로건의 어원인 슬로고름은 죽은 자들의 함성이라는 뜻이다))에도 맞서야 한다. 영웅은 기존 가치 및 신념 체계의 적이다. 왜냐하면 영웅은 미지에 적응하기 위하여 가치 체계에 단순히 무언가를 더하여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가치 체계를 완전히 쇄신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불운하게도 영웅은 자기 자신은 물론 문화와 자기를 동일시하며 문화를 지탱해 온 사람들을 무
제5장 대립하는 형재들 - 701
시무시한 미지의 힘에 노출시키게 된다. 다시 말해서 기존 문화에 잘 적응한 사람들 모두를 치명적 불안과 벌거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광기와 물리적 파괴와 소멸의 공포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모습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번민하는 무신론자 이반은 지역 수도원의 수련 수사인 독실한 동생 알료샤에게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도는 스페인 종교재판이 일어나던 시기에 세비야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소리 없이 와서 조용히 돌아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본 사람들은 단번에 그의 존재를 알아보았어. 어떻게 사람들이 알아봤는지 설명할 수 있기만 하면, 이 부분은 내 시의 가장 좋은 부분이 될거야. ....…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린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어 따라가니, 삽시간에 무리가 되었어. 그는 그지없이 자애로우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걷지. 사랑의 태양이 그의 가슴에 이글거렸고, 광명과 깨우침과 힘이 그 눈에서 빛으로 흘러나와 그에 대한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떨리게 해, 그는 두 손을 사람들에게 내
밀어 그들을 축복하고, 그를 만지기만 해도, 아니 심지어 옷깃만 스쳐
도 치유의 힘이 생기는 거야. 어릴 적에 맹인이 된 노인이 갑자기 이렇게 외쳐, "오. 주여, 저를 치유해 주소서. 저도 주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소서!” 마치 노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도 볼 수 있게 되었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가 걷는 땅에 입맞춤을 해, 아이들은 그 길에 꽃을 뿌리고 "호산나! 구원하소서!"라고 외쳐...
702 - 의미의 지도
“그분이야, 정말 주님이 오셨어." 사람들도 계속 반복해. "분명 주님이야, 아니라면 누구겠어!"
그가 세비야의 성당 계단에서 발을 멈춘 건 바로 운구 행렬이 눈물을 흘리며 작고 새하얀 관을 세비야의 성당 예배당 안으로 들고 갈 때야, 관 속에는 명망 있는 남자의 일곱 살 난 외동딸이 꽃 속에 누워 있었어. “그분이 당신 아이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거요!" 사람들이 울고 있는 아이 어머니에게 외쳐행렬을 맞으러 성당 밖으로 나온 신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지. 하지만 이제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몸을 던지고는 “진정 주님이시라면 제 아이를 살려 주세요!"라며 울부짖고 두 손을 그에게 뻗어, 행렬이 멈추고, 사람들이 아이의 관을 그의 발치에 내리지. 그가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 이라 말하니 소녀가 깨어나는 거야. 이 아이는 관에서 일어나 앉아서 작은 눈을 뜨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웃어. 손에는 사람들이 관에 눕힐 때 깔아 둔 하얀 장미를 들고 있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거나 소리를 지르고, 흐느끼기도 해.
때마침 종교 재판소 대심문관인 추기경이 성당 광장을 지나게 돼. 추기경은 아흔에 가까운 노령에, 키는 크고 자세는 꼿꼿해,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움푹 들어갔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불꽃처럼 빛나지. 아, 지금 그는 전날 로마 교회의 적들을 불태울 때 군중 앞에 보여 주었던 웅장한 추기경 예복이 아니라, 평범한 수도승들이 걸치는 허름한 캐속
을 입고 있어. 뒤로는 어쩐지 섬뜩한 조수들과 노예들, 그의 성스러운' 호위 병사들이 따르지, 추기경은 멀리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멈추고,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03
지켜보는 걸 보고 있어. 그는 모든 것을 보지, 관을 그리스도의 발치에 놓는 것도, 소녀가 관에서 일어나는 것도 봐, 그의 안색이 어두워져, 짙고 흰 눈썹이 찌푸려지고, 심상치 않은 눈빛이 번뜩여,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위 병사들에게 그리스도를 잡으라고 명령해,
대심문관의 권력은 너무나 거대해서 사람들은 고분고분하지, 그들은 즉시 벌벌 떨며 병사들에게 길을 내어 줘, 광장에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흐르고, 그 적막 속에 그리스도를 붙잡고 끌고 가는 거야..
그러자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심문관 앞에 엎드리며 절을 하고 대심문관은 조용히 축성을 하고 지나가.
병사들은 죄수를 종교 재판소의 오래된 건물로 끌고 가서 아치형 천장의 어둡고 좁은 감방에 가두지. 날이 저물고 숨이 막힐 듯 칠흑 같은 세비야의 밤이 찾아와, 공기는 월계수와 레몬 향기로 향긋해..
갑자기, 완전한 어둠 속에 감방의 철문이 열리더니, 대심문관이 손에 등불을 들고 나타나, 이 노인이 혼자 감방으로 들어오고, 이내 문은 닫히지. 그는 멈춰 서서 1, 2분 동안 그리스도를 쳐다봐. 마침내 테이블에 등불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하지. "그래? 네가 정말 그리스도인가?"하지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말을 잇지.
"대답할 필요 없다. 아무 말 마라. 무슨 말을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게다가 지금껏 한 말에다 무얼 덧붙일 권리도 없지. 왜 온 것이냐.. 우리를 방해하고 힘들게 하려고 왔느냐? 그래, 우릴 괴롭히러 왔다는 건 너 자신이 잘 알겠지. 하나,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말해 주랴? 난네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자인지 닮은 자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내일 너를 심판하고 화형에 처할 거야. 가장 흉악한 이단자로서 말이
704 - 의미의 지도
지. 그러면 오늘 네 발에 입 맞추던 바로 그 사람들이, 내일은 내 손짓한 번이면 네가 불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땔감을 던져 넣을 거다. 알고 있냐? 아, 그래. 알고 있겠지."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죄수를 응시하면
서 덧붙였어534
악행을 저지르는 와중에도 심문관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행위
를 정당화하려 한다.
"너의 위대한 예언자가 환상을 보고 비유로 말하길, 첫 부활에 참석한 사람을 그가 전부 보았는데, 그 수는 각 지파마다 1만 2천 명씩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그들이 신이지 인간이겠는가. 그들은 네 십자가를 지고, 불모의 광야에서 메뚜기와 풀뿌리를 먹으며 여러 해 굶주림을 견뎌 냈다지. 물론 너는 이 자유의 아들들과, 아낌없는 그들의 사랑과 너를 위해 바친 장엄한 고통을 자랑스럽게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억하라. 그들 중 겨우 몇 천의 이
야기이고, 심지어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어떠하냐? 왜 나머지 인간들, 나약한 인간들은 강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을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게 무서운 선물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왜 나약한 영혼의 잘못이냔 말이다. 진정으로 너는 선택된 소수만을 위해 왔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그리고 진정 신비라면, 우리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유나 사랑이 아니라, 양심을 버리고라도 맹목적으로 숭배해야 하는 불가사의라고 설교해야 맞겠지. 그리고 그것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05
이 바로 우리가 해 온 일이다. 우리는 네가 행한 사업을 바로잡았고, 기적과 신비와, 권능을 바탕으로 다시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양떼처럼 끌어 주는 것을,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가져다준 자유라는 무서운 선물을 벗을 수 있는 것을 크게 기뻐했지, 말해 보게. 우리의 설교와 행동은 옳았지 않은가? 그들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짐을 덜어주며 그 나약한 본성이 지은 죄까지도 받아들여 준 우리가 정녕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가? 도대체 무슨 간섭을 하러 나타난 것이
냐!"535)
이 늙은 사제는 교회가 그간 수행한 역사적 역할이 무엇이며 왜 그런 역할을 수행했는지 설명하고 왜 곧 그를 다시 처형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짊어진 우리는 일어나너에게 이리 말할 것이다. 할 수 있다면, 감히 그럴 수 있다면, 우리를 심판하라!' 알아 두라. 내 너를 두려워하지 않음을, 나 역시 풀뿌리와 메뚜기로 연명하며 광야에서 살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네가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를 축복했고, 나 역시 선택받은 자에 포함되기를 열망하여 그들 가운데 자리를 잡으려고 애써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미친 대의를 섬기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이를 물리치고 너의 사업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합류했다. 나는 거만한 자를 떠나 유순한 자들의 행복을 위해 유순한 자들 곁으로 왔다는 말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은 실현되고 이는 우리의 왕국이 될 것이다. 다
706 - 의미의 지도
시 말하건대, 내일 너는 순종적인 사람들을 보게 되리라. 그들은 내 손짓으로 너를 태울 화형대의 불 아래 서둘러 땔감을 쌓아 올릴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여기에 와서 우리의 일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리의 불길에 당해야 할 자 있다면, 그것은 바로 너고, 그래서 나는 내일 너를 화형에 처할 것이다. 딕시(내 할 말은 다했다)!"536
이야기가 결말에 이르기 직전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이 반전은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과, 이데올로기적이며 쉽고 빤한 결론을 초월하는 그의 능력을 드러낸다. 이반은 이야기를 이어 간다.
늙은 대심문관은 입을 다물고 죄수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려. 그의 침묵에 견디기가 힘들지. 노인은 그가 자신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 듯,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걸 봤단 말이야. 그는 어떤 말이든, 하다못해 괴롭고 두려운 소리라도 듣길 바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대신에, 갑자기 노인에게 다가가 핏기 없는 그의 입술에 다
정하게 입을 맞춰, 그리고 이게 유일한 대답이야. 노인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 있어. 입가도 미미하게 떨리는 것 같아. 노인은 문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고 그에게 말하지. "지금 가시오. 그리고 돌아오지 마시오. ..
…… 영원히. 절대로 다시는 돌아와서는 아니 되오!” 그리고 죄수를 도시의 어두운 거리로 내보내 줘, 죄수는 그렇게 떠나가 537
월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공동체는 개인의 충동이 없으면 정체된다. 개인의 충동은 공동체의 공감이 없으면 사라진다.
5388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07
신화는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목표가 변해 온 과정이 극적으로 드러나며, 역사가 오랜 세월 인간의 행동에 미친 영향이 일화 및 의미 차원의 정보로 담겨 있다. 신화는 역사 속에서 확립된 행동 양식과 그것이 수립된 방식에 관한 일화 표상이다. 신화는 인생의 목적이 일화 기억 체계에 저장된 것이다. 신화적 진실은 과거의 경험에서 끌어올린 정보이며, 과거에 행동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이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인간의 동기와 정서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행동을 기록하여 역사의 중심을 설정한다. 이야기는 행동의 심상을 의미 차원에서 묘사하며, 이 묘사는 심상 및 일화 차원의 사건으로 역으로 번역되어 모방 행동을 일으킨다. 신화 속 이야기는 '바람직한 이상'을 제시하는 도덕률을 극의 형식으로 보여 준다. 그러면서 과거의 의미, 즉 과거의 삶이 현재와 미래에 해야 할 행동에 관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다루며, 이는 행동을 체계화하는 토대가 된다.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그린 신화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적응 양식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 원형적 본보기는 개인이 처한 모든 상황에서 행동을 생성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신화는 절차적 도식을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이때 절차적 도식은 문화적으로 수립된 복잡한 위계적 행동 체계를 구축하는 토대로서, 창조적 탐험을 수행하기 위한 개인의 본능적이고 신경심리학적인 잠재력이 행동으로 구현된 모습을 관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잠재력이 역사 속에 실현된 결과로 특정 환경에 적합한 사회적 맥락이 절차와 일화 차원에서 구축되면서, 개인은 미지의 위협에
708 - 의미의 지도
서 보호받고 타고난 능력을 계발할 수 있게 됐고, 실존적 두려움은 억제되고 희망이 피어났다.
선조들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알지도 못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위를 둘러싸며 신비한 힘으로 우리를 어둠과 혼돈으로부터 지켜 준다. 그 보호막이 깨질 때, 선조들의 영혼이 표상하던 원칙이 비판이나 다른 영웅의 행동, 다른 이데올로기, 개인적 경험 등으로 무너질 때, 지식은 맥락을 잃고 기지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로 뒤바뀐다. 그렇다고 해서 무서운 어머니가 인간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천 년 전 무서운 어머니의 존재 이유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다. 라마르크 학파에서 말하듯 기억이 생물학적으로 전달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인간이 보편적 경향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이 조건은 개인을 보호하는 문화적 장벽이 무너질 때마다 생겨난다.
역사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물리적, 정신적 공격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한다. 역사에 휘말린 인간에게 의미의 틀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는 모든 문화의 근간이며, 해당 시대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을 이끄는 '선험적 전제로서 갖가지 신념의 토대를 이루며 신화로 그려진다. 이 '최상위' 신화는 우리가 사회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받고, 또 미지로부터 위협받고 구원받는 삶 속에서 비극을 마주할 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신성한 차원에서 (숨지 않고) 산다는 것은 곧 해당 문화에서 아직 도달하거나 개념화하지 못한 가장 높은 의식 단계에 도달하거나 어쩌면 초월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런 신성한 인생을 상징하는 인물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09
바로 구세주이다. 구세주는 신화의 정수를 현실에서 구현한 사람으로, 서양 문화에서는 누가 뭐래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의 생애는 그가 올바른 행동 규범을 온전히 따르면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기에 흔히 법적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합법적 측면이 아니라 예언자적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가 지닌 참 의미는 그가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조직화된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할 인물이라는 점이다. 예수를 거부한 사회는 모든 사회를 대표한다.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로마인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우리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전 인류이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요한복음 18장 14절)는 가야바의 말에 동의하지 않은 사회
는 없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대다수 동양의 종교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사회에 대항하는 혁명적, 예언자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역사에 변증법적 의미를 제시하여 역사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생에 존재하는 악의 뿌리를 무지로 볼 수 없
고,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깨달음을 제시할 수도 없다. 잔혹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가 너무나 흉측하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한 의지만이 그 문제에 대한 가장 가까운 진단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부처처럼 그저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물론 백성들을 깨우
치려 가르침을 베풀기도 했으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순교와 죽음으로
710 · 의미의 지도
하강을 경험했다. 지금 논의의 목적에서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 함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단순히 역사로부터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싸우며 역사를 헤쳐 나가야 한다. 둘째로 기독교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를 비롯하여 모든 사회는 완전한 개인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539
신화는 탐험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정신이 실제 행동으로 구현될 때 그것을 관찰하고 표상함으로써 정신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그려 왔다. 이는 모방으로부터 시작해서 언어적 추상화로 끝나는 과정이다. 모든 행동과 그 표상)이 궁극적으로 따라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도덕률을 수립하고 쇄신하는 과정이며, 그런 과정이 활발히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사회와 개인의 내적 상태를 수립하는 것이다.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회나 개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질서와 혼돈의 중재자로서 존중한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도덕적인 행동은 의미 차원에서는 하나의 가정적 진술sstatement'이 된다. 도덕적 인간은 자신과 타인이 창조적 적응의 원천, 다시 말해서 '세계'의 원천인 것처럼' 인정하고 존중하며 경의를 표한다. 인간을 구세주, 다시 말해서 구원자의 원형이자 문화의 담지자이자 신성한 영웅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는 적응행동의 출처를 인정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통에 대한 엄격한 순응을 기초로 하는 도덕률을 위협한다.
영웅적 행위는 모방을 부른다. 영웅은 당연히 모방해야 할 본보기가 된다. 문화의 담지자로서 원형적 영웅의 행동은 정교한 절차적 규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11
5-4 대립하는 형제들
범을 따른다. 이 규범은 진화의 최종 결과물이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영웅이 노력 끝에 창조적 행동을 수립하고,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고 추상적으로 표상하여 소통하다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관된 행동 양식에 통합되어 그 본질과 표현이 문화적 특성을 이루는것이다. 이 문화적 특성은 건실한 개인의 '인격'에서 중심을 이루며행동으로 구현되어 일화 및 의미 기억 속에 표상되고, 이상적으로 전통과 적응,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 이 특성을 정확히표상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바로 인류에 관한 이야기의 '목적'인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의식이 고조되고 분화되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적응 행동의 토대를 이루는 전제가 점점 더 정확한 언어로 표상됨에 따라, 사회는 점차 영웅적 행위의 결과물에서 영웅적 행위 그 자체를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한다. 목표가 결과물이 아닌과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서양 문화권에서는『신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표상되어, 서구 도덕률의 전제를 혁명적으로 재구축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쓰인 「구약에 암묵적상태로 담겨 있다'고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구약의 이야기 속에 감춰져 있던 영웅이었고부활한 그리스도였다. 복음서는 복음서가 쓰이기 이전의 구세주에 대한 사상에 맞추어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복음서는 전기의 형식을 따르
712 - 의미의 지도
지 않고 구약을 풀이하는 예수의 모습을 비연속적으로 그리며, 그 와중에 과거의 사건과 율법과 심상이 메시아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예수가 내놓은 자신의 몸에서 영원히 되살아난다. 540
이 글의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표상한 행동, 심상, 사고 양식이 기억에 아로새겨질 만큼 매력적이어서 모든 신화와 이야기 속에 ‘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표상하는 양식이 이렇듯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전통의 토대 위에서 출현한 영웅을 구현하며, 영웅은 개인과 사회가 성공적으로 경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을 이야기로 묘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요한복음 1장 1절) 있었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장 14절) 등장한 그리스도는 혼돈에서 질서를 구별해 내는 능력과 더불어 영적, 추상적, 서술적, 의미적 전통을 표상한다.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은 도덕률 자체를 법적 규칙에서 영적 규칙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과정으로 바꿔 놓았다. '영'은 변치 않는 법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 법에 대항하기도 하는 '과정'이다.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약은 신령한 믿음이 "영적으로만 분별된다."고 말한다고린도전서 2장 14절). 이는 바울이 "사람을 죽이는 문자와 “사람을 살리는"영을 대조하는 부분에도 등장한다. 541
이 같은 사상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인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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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미래 상대영웅교회현재 상태 그리스도의미지와의 자발적 대면 집단 정체성 상태 이례적 정보혼돈 정체빛의 부계 세계미지와의 자발적 대면 이례적 정보전의식적 낙원 상태 001어둠의 모계 세계 - 성적 허공(물질과 깊음)(창조적)야(하나님의 영)결합우주 창조 이전의 알
그림 43. 집단 정체성과 혼돈으로부터 출현한 예수
714 • 의미의 지도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마태복음 22장 32절)이었다. 그리스도는 도덕률을 성문화된 전통(명시적인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따르는 것 이상으로 만들었다. 전통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이 늘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0절
하지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태복음 5장17절
이는 곧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전통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전통을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이 성경 구절에는 전통을 쇄신하는 과정이 전통에 암묵적으로 담겨 있고 전통에 의해 촉진된다는 의미도 있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히브리 문화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역할은 「출애굽기」의 끝부분에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과 그 이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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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서 먼저 나타난다(이에 관해서는 앞서 논의했다). 그리스도는 사실상 두 번째 모세로 나타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땅을 영적(정신적) 왕국으로 제시한다. 542 예수는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리고 모세와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그런 제안을 할 만한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을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마태복음 17장 1 ~6절
모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가장 유명한 설교(프라이는 이를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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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에 대한 해설로 본다.)를 산꼭대기에서 한다. 프라이에 따르면 모세의 율법은 '~하지 말라'는 금지법에 기초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설교는 적극적인 선을 묘사하면서 '~하라'는 권유하는 방식을 취한다. 543 이러한 변화는 도덕의식이 발달한 결과이다. 처음 죄에 물든 영혼은 도덕적으로 확실히 그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통제해야 할지 파악하기가 훨씬 쉽다. 하지만 의식적 훈련을 통해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 영혼이 어느 정도 정화되면 그때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무엇이 선인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의 도덕률과 성인의 도덕률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차이가 존재한다. 엄격한 집단 정체성은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로 남아서는 안 되는 청소년들을 적절히 사회화하며 유아기에서 성인기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훈련받은 대로 규칙을 따라 행동하는 능력은 융통성 있는 성인이 되기 위한 필수 전제이지만, 적응력을 높이는 새로운 규칙을 생성할 줄 아는 진정한 성인의 도덕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유대인의 도덕률을 청소년기의 미숙한 도덕률이며 기독교의 도덕률을 성인기의 성숙한 도덕률이라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에도 '억압적인 질서에 대항하는 예언이 많이 등장한다. 544 그 차이는 서로 다른 교리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리를 믿든지 간에 그 교리를 독단적이고 엄격하게 믿는 사람과 창조적이고 책임감 있게 믿는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과거의 도덕적 지혜가 돌에 새겨지면, 즉 규칙의 목록이 생성되면, 지금까지 절차나 일화 차원에서 존재했던 문화를 처음으로 명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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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의식'할 수 있다. 규칙의 목록은 단순할수록 기억하기 쉽고 판단의 기준으로 공유하기도 쉽다. 의사소통과 빠른 일반화 가능성이라는 추상화의 이점 덕분에 규칙의 목록은 질서를 수립하고 지속하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이 목록에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구조적 한계가 있다. 즉 간추려진 목록만으로는 복잡한 행동 차원의 도덕률을 제대로 표상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절차 차원의 도덕률은 위계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맥락 의존적이고 변형이 가능하다). 이 목록만으로는 여러 의무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때, 목록에 있는 하나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행동이 다른 규칙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행동과 갈등을 일으킬 때 과연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다. 또한 고정된 규칙은 개인이 환경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유연하게 대응하는 적응력을 제한하기 때문에, 환경이 급변하여 유연한 대처가 필요한 시기에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때에 “보시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오." 혹은 "아니, 여기 계시오.” 하고 말하는 사람을 주의하라. 인자는 너희 안에 있다. 인자를 따라가라.
그를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다.
그리고 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 외에 그 어떤 규율도 만들지 말고, 입법자들과 같이 법을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그것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545/546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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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진술한 목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이 목록은 일단 충족되고 나면 이후 비교적 추상적이고 유연한 원칙에 의거한 도덕률의 형식, 다시 말해서 바람직한 모습을 서술한 형식으로 대체된다.
이처럼 규칙의 목록은 그릇된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곧이곧대로 따를 때는 위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예수는 규칙의 목록을 넘어서기 위해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규칙의 목록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구조적 문제를 밝히기 위해 고르디우스의 매듭(도덕적 딜레마)을 제시한 셈이다. 그리스도는 당대 전통적 질서를 대표하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 들에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며 진지하게 대결을 펼쳤다.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547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너희는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어야 하는 제단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548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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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차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누가복음 6장 1 ~11절
다음 구절 역시 위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앞에 수종병 환자가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그 병자를 손으로 잡아서 고쳐 주시고 돌려보내신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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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 말씀에 대답할 수 없었다.
「누가복음 14장 1~6절
또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였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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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하니, 그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먼 사람이던 그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 물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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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그 아이가 다 컸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말한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말하였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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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요한복음 9장 1 ~29 절
또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마가복음 7장 1~7절
724 • 의미의 지도
피아제는 이 구절의 해설로 여겨도 좋을 만한 글에서 '규제의 도덕'을 '협동의 도덕 549과 구별하고는 정서적 인간이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 체계' 550 라고 설명했다. 551
아동은 규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규칙을 따르는 것이 곧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동기로 했느냐보다는 행동이 확립된 규칙을 정확히 따르느냐에 따라 그 행동을 평가한다. 552
피아제는 '규제의 도덕'이 인지 발달의 초기 단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어린 아동에게 규칙은 전통이기 때문에 신성한 현실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규칙은 상호 합의에 따라 달라진다." 553 이와 관련하여 조지프 리클럭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 아동은 또한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을 부과한다. 이들은 처벌을 위한 처벌에 무게를 싣는 반면, 좀 더 나이가든 아동은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으로 처벌을 활용한다. 피아제는 권위에 의거한 규칙보다 협동에 의거한 규칙을 수립할 때 인간관계의 형평성이 더 만족스럽게 유지된다고 봤다. 강압적인 권위 없이도 규칙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규칙에 동의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554 이런 측면에서 정서가 도덕 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규제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활용해 다스리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에서는 협동의 도덕이 일어난다.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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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의 도덕과 협동의 도덕은 서로 다른 전제를 근거로 한다. 엄격한 전통주의자는 무엇이 선인가?'에 대한 답이 이미 영구적이며 구체적인 규칙 목록으로 제시되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목록만으로는 경험 세계에 온전히 적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노자의 글이 타당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지혜와 덕으로 움직이는 자는 할 일을 남겨 두지 않음이라. 법에 의해 움직이는 자만이 오로지, 하지 않은 채 남겨 둔 일이 많음이라. 556
전통을 추종하는 사람은 과거의 조상과 당대 사회 및 종교 지도자에게 초인적 가치를 부여하고 의지한다. 반면 협동의 도덕을 받아들인 사람은 집단 구성원, 더 나아가 사회 집단들 사이의 평등과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상호 존중' 사상을 높이 평가한다.
특정 사회 집단의 행동 양식 그리고 그 결과로 집단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부여되는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 체계는 개인의 욕구 표현 기회와 대인 간 갈등 규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은 집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계통발생학적, 개체발생학적으로 균형을 잡기 위한 '규칙'이 일화 및 의미 차원에서 모형화되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진다. 가장 단순한 사회적 동물도 서열을 정하고 규칙을 따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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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동물은 자기 행동을 추상적으로 표상하지 못한다. 머릿속에 자신에 대한 심상적 모형을 만들 수도 없고 집단을 지배하는 '규칙'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문명사회에서 사회화된 아이들은 문화의 도덕률을 추상적으로 표상하거나 도덕률의 근거를 언어로 설명하는 능력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다시 말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일화나 의미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기억하기 훨씬 전부터 도덕률에 따라 행동할 줄 안다. 성인도 마찬가지이다. 도덕률은 그것을 표상하고 그 근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이 발달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따른 출현 속성으로서, 개인의 행동으로 구현되는데, 대상과 상황에 부여되는 가치에 내재되어 있고, (무의식적) 절차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관찰하고 특유의 '규칙' 이나 양식을 끄집어 낼 수 있는가?"가능하다면 과연 그 규칙'은 무엇인가?"
원시 부족의 문화는 서로 힘과 매력과 위험성이 다른 부족민 간의 상호작용의 특성을 결정하고 거기에 일반적 기대와 예측 가능성을 부여한다. 안정된 서열이 존재하는 집단에는 복잡한 절차 차원의 도덕률(과 암묵적 가치 체계)이 존재한다. 서열은 사회적 동물이 끊임없이 사회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출현한 속성으로, 사회적 동물들은 복잡한 도덕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무리에서 한 개체라도 일상적으로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면 무리 전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무리 일부가 사라지거나 혹은 힘이 빠지면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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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따라서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서 서열을 결정하기 위한 신체적 싸움은 의례적 속성을 띠며, 심각한 부상이나 죽음을 초래하기 전에 끝이 난다.
한 예로 사회적 동물에게는 서열 다툼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복종의 신호가 있으며, 승자는 보통 상대의 의사를 존중한다.사회 집단 안에서 가장 강한 구성원은 몇몇 상황에서 집단을 지배하지만, 강자의 지배에는 늘 한계가 있다. 집단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지배자도 집단과 집단 구성원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제약 아래서 권력을 표출해야 한다. 일정 부분 사회적 보살핌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제약은 복잡한 추상적 도덕률이 출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추상적 도덕률은 본능적이고도 사회화된 절차 지식에서나온다. 절차 지식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적' 이며 따라서 표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 안에서 '약자도 소중히 대하고 '네 이웃을 (심지어 적까지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약의명령이 나왔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첫 설교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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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 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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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로 내려가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4장 14~32절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때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
1730 · 의미의 지도
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복음 15장 21 ~28절
그리스도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이방인뿐 아니라 당시 도덕률의 관점에서는 하잘것없는 죄인으로 취급되던 창녀, 세리, 병자, 정신병자, 적수 등 모든 이를 포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률의 종말이나 모든 것이 똑같아져서 모두 다 가치를 상실한 (예를 들어 양심의 가책도 없이 타인을 고문하는 사람과 진정한 성인이 가치를 공유하는) 무질서한 '공동체'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다만 과거의 이력이나 출신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것으로 현재의 가치나 미래의 가능성을 못 박지 않는 나라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속한 공동체의 전통주의자들은 이처럼 지극히 혁명적인 사상을 접하고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리스도의 본보기는 그들의 행동을 책망했고, 그리스도의 철학은 전통주의자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지위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전통주의자들은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31
그리스도를 범죄자나 이단으로 몰기 위해 말실수를 하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덫을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이 그 덫에 걸릴 때가 많았다.
그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마태복음 22장 15~22절
1732 - 의미의 지도
또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들어가서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가 잡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희 율법 교사들에게도 화가 있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33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증언하며 찬동하는 것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말하기를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겠는데, 그들은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였다.
창세 이래로 흘린 모든 예언자들의 피의 대가를 이 세대에게 요구할 것이다.
아벨의 피에서 비롯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희 율법 교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께서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뜩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물음으로 예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렸다.
「누가복음 11장 37~54절
· 의미의 지도
734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덫을 피해 가자 격노하여 더욱 정교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
하지만 그리스도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고 전통적 지식에 통달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자 마태복음 22장 42~45절) 비판자들은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무도 예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마태복음 22장 46절
그리스도의 대답은 전통에 의지한 도덕률에서 개인의 양심에 의지한 도덕률로, 법의 지배에서 정신의 지배로, 금지에서 권유로의 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35
행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곧 진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교훈에 적합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이 교훈은 단지 타인을 유쾌하고 예의 바르며 상냥하게 대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에게 자기에 버금가는 가치, 다시 말해서 겉모습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에 맞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로 경쟁하는 주관적 동기 사이에서 역동적이고 활발하게 균형을 잡는 동시에 사회 환경과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창조적으로 쇄신한다는 뜻이다. 또한 개인적 혹은 사회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권력이나 독단적 전통의 요구를 따르기보다 메타 도덕의 원칙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전통을 수립하는 과정은 기존의 전통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51~53절
이 구절은 생각 없이 권위를 따르는 삶의 종말을 의미한다. 왜냐하
· 의미의 지도
736
면 고대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시기, 즉 문화가 안정되고 부성이 표방하는 가치와 문화규범이 세대를 거쳐 여전히 유효한 시기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들이 사춘기의 입문 시험에 통과한 후 아들에게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고 각인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시기에는 심리학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별다른 문제가 나타나지 않고, 설혹 문제가 있다는 아주 희미한 낌새만 나타난다. 오늘날 '비범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대 간 갈등이 흔히 일어난다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문화가 안정된 시기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지루할 정도의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유사성은 청년을 어른으로, 아버지를 연장자로 만드는 의례와 제도를 포함한 가부장적 규범 체계가 논쟁의 여지없이 문화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미리 정해진 절차를 거쳐 자연스럽게 청년은 성인기로, 아버지는 노년기로 이행한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예외가 있을 수 있는데, 바로 창조적인 개인. 즉 영웅이다. 바를라흐가 말한 것처럼, 영웅은 "밤에 잠들어 있는 미래의 심상을 일깨워 세계를 새롭고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낡은 법을 깨트리는 자이다. 영웅은 낡은 통치 체계와 문화적 가치, 기존의 양심에 맞서는 적대자이기에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에서 '내면의 목소리', 즉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초개인적 아버지 혹은 부성적 원형의 명령은 낡은 법을 대변하는 개인적 아버지와 불가피하게 충돌한다. 성경의 이야기 중에서 야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37
훼가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은 이런 충돌을 잘 보여 준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고향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장 1절)
미드라시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버지의 신을파괴하라는 명령으로 확대 해석한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러한 갈등의연장선상에 있으며, 이 갈등은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해서 나타난다. 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이 낡은 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인지.아니면 개인적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늘 낡은 질서를 대표하며, 그에 따라 그의 문화 규범은 낡은 상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558
그렇다면 법의 지배가 아니라 정신의 지배를 받는 원칙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모든 인간이 타고난 영웅적 본성을 존중한다는 원칙이다. 무의식' 수준에 머물던 고대인은 구체적 개별 적응 행동을 모방했다. 하지만 이 행동들은 하나의 행동 체계로 통합되어 모방을 이끌어 내고 일화 및 의미 표상이 되어 신화 속에 담겼다. 실증주의 이전시대에는 적응 행동을 수립하는 행위를 신성시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원형적이며 초월적인 행동 양식(창조적 탐험)을 따르며 모방을 이끌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꾸고 모방을 이끌어 내는 행위는 모두 같은 양식, 곧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을 구현한신적 영웅의 행동 양식을 따른다. 원시 사회에서는 영웅의 행동 양식에 따라 얻은 결과물과 그의 구체적인 행동이 역사의 본질을 이룬다.하지만 영웅의 행동 양식을 모방하고 추상화하고 변형하는 과정에서
738 • 의미의 지도
그 본질이 점차 더 명확히 드러나면서, 추상화되기는 했지만 구체적 행동으로 표상되던 도덕률이 마침내 영웅적 탐험 과정 그 자체에 대한 표상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창조적 개인은 세계를 구원하는 과정 자체를 모방하고 의식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
규칙은 우리를 경험 세계에서 구원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지만 규칙만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규칙은 혼돈에 한계를 지우고 훈련받은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규칙은 개인이 잠재력을 창조적이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데 쓸 수 있게 돕고, 생명의 물이 안정적으로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 아래로 흘러가게 한다. 하지만 규칙을 절대시하면 개인은 영원히 모든 중요한 결정을 아버지에게 미루는 청소년으로 남아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개인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발견할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규칙 없는 삶은 혼란스럽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견디기가 어렵다. 하지만 순전히 규칙을 따르기만 하는 불모의 삶 역시 견디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혼돈과 불모는 똑같이 살기등등한 원한과 증오를 낳는다.
그리스도는 원형적 목표로서의 하늘나라를 영적 왕국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심리 상태로 여긴 것이다. 이 관점은 구약에 묘사된 약속의 땅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먼저 그리스도가 제안한 하늘나라는 육체적 노동이나 자원의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태도와 관점의 자발적 변화를 통해서 수립된다. 둘째로 하늘나라는 낙원이라는 목표의 본질을 혁명적, 역설적으로 재구성해야 얻을 수 있다. 영웅적 존재 방식의 원형적 본보기로서 그리스도의 인생과 말씀
제5장 대립하는 형재들 -
739
은 인생의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명확히 강조하고 있다. 교향곡은 마지막 음을 향해 흘러가지만 그 마지막 음이 교향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목적도 어떤 변치 않는 완벽한 존재 방식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애써 보여 준 것처럼 인간은 그런 완벽한 상태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흥미롭고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현재의 사건에 의식적이고 명료하게 집중하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 의미의 지도
740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마태복음 6장 28~34절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는 말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는 대신 베짱이처럼 여름에 노래만 부르다가 겨울에 굶주리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일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오류를 범했을 때 오류에 대응하고, 자신의 행동이 견디기 어려운 결과를 불러올 때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행동을 수정하라는 뜻이다. 자신이 현재 부족하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교만에 빠져 완고하고 경직된 죽은 영혼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이 늘 오류를 범할 수 있음과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온전히 인정하라는 뜻이다. 자신감과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무서운 미지를 피해서 물러서다.가 점점 더 좁고 어두워지는 구멍 속에 갇혀 살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목표를 이루는 과정을 목표 그 자체로 바꿔 놓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기독교인의 의무는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인해 용감하고 진실하고 고유한 개인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41
그림 44. 죽음과 구원의 세계수 559
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마태복음 16장 24~26절
그리스도는 진리와 모든 인간에 깃든 신성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길 때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지리라고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도 거짓이나 기만, 회피, 억압,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
의미의 지도
-
742
기 위해 실제로 필요한 것을 말한다(우리의 생각에는 오류가 있어 정확한안내자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죽음과 구원의 세계수를 그린 그림에 나타나 있다. 이 그림에서는 세계수의 두 번째열매로 ‘제병"이 나타난다. 세계수의 첫 번째 열매는 그것을 먹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두 번째 열매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한다. 여성성의부정적 측면을 상징하는 이브는 해골로 그려진 선악과를 내민다. 여성성의 긍정적 측면은 교회로 표상되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병을 나누어 준다. 성찬 의례에서 '그리스도의 신성한 몸을 먹는 의식은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영웅을 받아들이고 구세주의 본질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상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구세주의 본질을 구현한 삶을 동양에서는 도 위의 삶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도'는 신성한 남성적 원리와 신성한 여성적 원리 사이의, 때로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안전한 질서와 때로인간을 파괴하는 혼돈 사이의 면도날처럼 좁은 길, 의미 있는 길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전통의 충실한 수호자이자 용맹한 미지의탐험가가 되어 인생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행복과 안정을 누린다. 또 안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사회를 수립하고 지속시키고, 심리적으로 통합되고 영적으로 평온한 길 위에 굳게 서게 된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 성찬식에 사용하는 누룩 없이 만든 방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43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 24 ~25절
연금술의 절차와 현자의 돌
칼 융은 생애 후반에 연금술 문헌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 사실은 융이 종교심리학에 관심을 보인다는 이유로 그를 기인으로 몰아붙이던 사람들의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근본적 측면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회학자로 정신분석학에 호의적이었던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 조차 "연금술에 관한 (융의) 두툼한 저서들이 그의 정신분석적 통찰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점을 찾을 수 없다. 560고 말할 정도였다.
학계에서 명망 높은 몇몇 학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학술적 맥락에서 융에 관해 논하는 것도, 융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삼가라고 내게 충고했다. 분명 그분들은 학자로서의 내 경력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충고를 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폴 리쾨르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지어 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느 날 누군가 리쾨르의 연구 분야가 융의 연구와 긴밀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고 말하자 그는 “나는 융의 책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융의 책이 금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거든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물론 이 비꼬는 듯한 대답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 의미의 지도
744
가톨릭의 금서 목록이다.
하지만 융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그의 사상을 비판하는 사람을 나는 여지껏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융의 사상은 흔히 프로이트의사상과 혼동되었다. 프로이드 자신은 결코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프로이드는 융의 사상이 자신의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을 만큼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에 학문적, 개인적으로융과 결별했다.61 융의 사상은 애초에 프로이드 학파의 사상이 아니었다. 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인했다(실제로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훨씬 더 설득력 있고 완전하게 재해석했다). 그는 종교를 단순히 불안에 대한 신경증적 방어 기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적응 수단으로보았다.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융은 학자로서 발전하는 단계에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프로이드가 아니라 괴테나니체의 후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562 융은 니체가 제기한 도덕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작업에 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게다가 융은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종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진지한 과학자들에게는 금지되었던 영역을 깊이 탐구했고, 그럴 만한 지성과 교육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융을 신비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정확히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융은 실제로 학자로서 초기에는 특히 실험과학자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 개발에 참여했던수많은 단어 연상 검사는 약간의 기술적 수정을 거쳐 (원 출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지금도 신경과학 분야와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융의 사상을 상자에 넣고 봉하여 치워 버리는 것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45
편파적인 까닭은, 실험 절차라는 것이 잘해 봐야 과학적 연구의 양극단 중 한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설계된 실험을 적절히 수령하면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검증할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 현대 과학은 종종 이 사실을 간과한다. 융은 바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측면에서 탁월했다. 누군가는 융의사상은 검증할 수 없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이미실험으로 검증되었다. 앞서 설명했던 제롬 브루너의 카드 분류 실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물론 이 실험 결과가 융의 사상에 비추어 해석된 것은아니었다). 더 나아가 융이 제안했던 성격의 양극단인 내향성과 외향성은 여러 실험 연구에서 거듭 입증되었다. 563 게다가 무의식'은 확실히 콤플렉스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은 콤플렉스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 말이다. 564 앞으로 실험 기술이 더욱 정교해지고융의 사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그의 사상을 실험으로 더 많이 검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융은 의사였기에 정신 건강을 증진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융은가치를 이해하지 않고는, 또 가치가 생성되는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정신 건강을 증진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그런 이해가 바탕이 되지않으면 심리치료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융이환상과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치의 본질을 연구하면서부터이다. 가치의 세계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 계약에 의해 결정된 정서적, 동기적 의미를 내면화하여 생겨난 환상의 세계이다. 이를이해했던 융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들의 환상을 의미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이를 다양한 원시 문화와 문명화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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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의 사상과 비교 분석했다. 그는 동서양 역사 속에 기술된 방대한 문헌과 (융 본인의 추정에 따르면) 2만 5,000건이 넘는 꿈에 나타난 심상, 연금술의 상징을 성실하게 연구했다. 가치를 주제로 한 융의 비교문화적, 종합적 접근은 실험 연구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실증 연구로 인정할 만하며, 그보다 더 적합한 방법론이 없는 상황에서는 분명 합리적인 연구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실제로 저명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최근 이러한 비교분석 절차를 '통섭'이라 칭하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을 통합하기 위해 적극 도입할 것을 권했다. 565)
융의 사상은, 그중에서도 특히 '연금술'에 대한 사상은 부당하게 무시됐다. 이는 융의 제자들이 학계의 주류에 들지 못했기 (어쩌면 제자들 중에 여성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융의 사상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적 개념에 심각하게 도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융은 섬뜩하고 신비로운 종교적 진술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도외시되었다.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적응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종교적 진술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가정했던 것이다.
합리적인 신생 과학인 심리학에서 융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까닭은 심리학이 무엇보다 종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융의 사상이 개념적, 정서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융의 사상은 일단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해를 하고 난 뒤에는 마음을 뒤흔드는 면이 있다. 융은 무엇보다 상상과 이야기와 절차 기억 체계라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과정에서 사용한 '언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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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밝혔다. 이 과정은 근본적으로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생각했던 과정이었다. 집단 무의식의 언어를 이해하는 건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현재 도덕률의 전제가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융의 사상을 일축한 진짜 이유이다. 융은 도덕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르틴 루터만큼이나 혁명적이다. 도덕 혁명은 모든 심리적, 사회적 변화 과정 중에서 가장 두렵고 불편하다. 융의 사상이 거부당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융은 연금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보편적 적응 양식과 더불어 그것이 환상과 정서로 표현되는 방식을 발견했다. 융의 발견은 많은 시간이 흘러 토마스 쿤에 의해 과학 분야에 한정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졌고, 이 이론은 융의 사상보다 훨씬 널리 인정받고 수용되었다. 연금술에 관한 융의 복잡한 사상을 일관되게 요약한 제자 마리루이즈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는 다음과 같이 썼다.
화학, 특히 물리학이 발전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화학이나 물리학처럼) 확실한 자연과학 분야에서조차...… 사고 체계는 반드시 어떤 가정을 전제로 삼아야 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전 물리학에서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의식이나 반의식 상태로 통용되던 가정들 중 하나는 공간이 3차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이 가정은 단 한 번도 논란을 산 적이 없다. 공간이 3차원이라는 가정은 언제나 받아들여졌고, 물리적 현상의 투시도나 도표, 실험은 언제나 이 가정에 토대를 두었다. 사람들은 어떤 가정이 폐기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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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야 여태껏 어떻게 그런 가정을 믿었는지 궁금해한다. 어떻게 공간이 3차원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모두들 거기에 사로잡혀서 의심을 품지도 않고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을까? 어떤 가정이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면 그 토대는 무엇일까?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중 하나로 꼽히는 요하네스 케플러는 심지어 자연의 공간이 3차원인 까닭은 삼위일체인 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간이 3차원이라고 기꺼이 믿는 것은 기독교 삼위일체 사상의 영향일 것이다.
더 나아가 근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과학적 사고는 지금까지도 의문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는 인과율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으며, 따라서 과학적인 연구는 모든 현상에는 합리적 원인이 있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고 믿는다. 도대체 왜 인과의 법칙이 현대인의 마음을 이토록 지배하는가? 자연과학의 아버지 중 하나로 꼽히며 인과율의 절대성을 열렬히 주창한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신의 불변성에서 신념의 토대를 찾았다. 신이 불변한다는 신념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다. 신은 변하지 않으므로, 신 안에는 내적 모순도 없고 새로운 사상이나 개념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인과율이라는 개념의 토대인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과율의 개념은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의문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처럼 보였다. 과학은 단순히 원인을 밝히는 학문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무언가가 떨어졌다면, 우리는 바람이 불어서 떨어뜨렸다는 식의 원인을 밝혀내야 하며, 어떤 이유도 발견할 수 없다면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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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독자가 절반은 넘으리라고 확신한다! 이런식의 전형적인 편견은 너무도 공고해서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 내지 못하고 거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제 고인이 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현대 물리학의 근원에 원형적 사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만든 인과율이라는 사상은 빛과 생물학적 현상 등의 연구를 크게 발전시켰지만, 지식을 촉진하던 바로 그 사상은 곧 감옥이 된다. 자연과학의 위대한 발견은 대개 현실을 설명하는 새로운 원형적 모형이 출현한 결과이다. 이 새로운 모형은 이전보다는 훨씬 더 온전히 현실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자연과학은 크게 발전한다.
과학은 이런 식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누군가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 앞에서 이 현상이 기존의 모형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가설을 찾는 대신, 감정에 치우쳐 자기 가설을 고수하기만 한다.면 기존 모형은 어느 것이나 족쇄가 되고 만다. 공간이 3차원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연구를 더 깊이 진행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살펴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파울리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훌륭하게 제시한 예시가 기억난다. 17세기와 18세기에 에테르 이론이 과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에테르는 빛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위대한 공기 같은 영이었다. 어느 날 한 물리학자가 학회에서 에테르 이론의 부적절성을 입증하자 수염이 허연 노인이 일어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사라지네!" 이 노인은 무의식적으로 신의 개념을 에테르에 투영했던 것이다. 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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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에게 신이었고 에테르가 없다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노인이 속 보이게 자기 생각을 겉으로 고스란히 내뱉어서 그렇지 모든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성령처럼 철석같이 믿는 현실 모형이 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이며, 신념의 문제는 논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의 틀에 맞지 않는 사실을 제시하면 흥분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566
마리루이즈 폰 프란츠의 글을 조금 더 살펴보자.
그러므로 원형적 사상은 아이디어를 촉진하는 동시에 과거의 이론을 폐기하지 못하도록 막는 정서적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인생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중에서 극히 세부적인 측면일 뿐이다. 우리는 뭔가를 추정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정은 진실을 가로막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처음 어떤 여성을 만났다면 그녀에 대해 뭔가를 추정하기 전에는 교류를 시작할 수 없다. 먼저 가설을 만들어야만 하는데, 이는 물론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당신은 여성이 나이가 지긋하니 아마도 어머니이고 평범할 것이라는 식의 가설을 세운다. 이 가설은 당신과 여성을 잇는 다리이다. 이 여성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이전의 가설은 폐기되고 과거의 가설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성과의 관계를 순조롭게 이어 갈 수 없다.
누군가를 새로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일단 가설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만남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후에 가설을 바로잡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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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을 만날 때뿐 아니라 사물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추정이라는 기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무의식적으로 추정하는 과정 없이는 그 무엇도 인식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인도 철학에서는 모든 현실은 추정일 뿐이라고 말하며,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실제로 그렇다. 567
추정이라는 개념, 즉 사고 체계에는 '무의식적 전제가 있다는 생각은 토마스 쿤이 주장하고 널리 인정받은 '패러다임적 사고'와 유사한 점이 있다. 융 역시 패러다임적 사고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만약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있는 (패러다임적) 표상 체계에 매우 혁명적이며 이례적인 정보가 마침내 타당하다는 인정을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 일어나는 현상은 하나의 양식을 따른다. 이 양식은 생물학적 혹은 유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토대가 있고, 환상으로 표출된 것으로서 신화와 종교의 소재가 된다. 신화와 종교의 명제들은 결국 인간의 혁명적 적응을 이끌고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답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성급히 폐기되었다.
아서 왕의 기사들이 원탁에 앉은 이유는 그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각 성배를 찾으러 길을 떠났다. 성배는 구원의 상징이며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피를 담는 그릇이다. 제각기 처음 길을 나설 때 기사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숲으로 들어갔다.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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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반부를 쓰고 있던 무렵 처제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처제에게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말이 유창하고 총명했다. 당시 환상의 세계에 푹 빠져 있던 조카는 플라스틱 투구에 검을 들고는 기사 흉내 내기를 좋아했다.
아이는 낮 동안에는 어느 모로 보아도 행복했지만 밤에는 잘 자지 못하고 악몽을 꾸곤 했다. 자주 한밤중에 엄마를 부르며 소리쳤는데, 때문에 꽤 불안한 듯 보였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조카가 일어났을 때 전날 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조카는 가족들 앞에서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난쟁이처럼 키는 무릎 높이쯤 되고 입에 부리가 달린 생명체가 여럿 달려들더니 자기를 물었다고 했다. 그 생명체는 털과 기름으로 뒤덮여 있고, 정수리 머리털이 십자가 모양으로 깎여 있다고 했다. 또 꿈속에는 불을 뿜는 용도 등장했다. 용이 내뿜은 불은 난쟁이 같은 생명체들로 변했는데 용이 불을 내뿜을 때마다 끝없이 늘어났다. 조카는 처제 내외와 우리 내외에게 매우 심각한 목소리로 자기가 꾼 꿈을 설명했고, 우리 모두는 그 내용이 너무 생생하고 공포스러워서 깜짝 놀랐다.
조카가 이 꿈을 꾼 건 삶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치원이라는 사회적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꿈속의 용은 물론 두려움의 근원인 미지, 즉 우로보로스였으며, 난쟁이들은 개개의 두려운 대상들, 즉 보편적인 미지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조카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53
조카는 굉장히 신이 난 목소리로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아빠랑이 용을 쫓아갈 거예요. 제가 용 머리 위로 뛰어 올라 용의 눈을 검으로 찌르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불이 나오는 목구멍으로 내려갈 거예요. 그리고 불을 내뿜는 곳을 잘라서 방패를 만들 거예요.”
참으로 놀라운 대답이었다. 아이는 고대의 영웅 신화를 완벽하게 재창조해 냈다. 불을 내뿜는 부위로 방패를 만든다는 생각은 매우 기발했다. 그러면 아이는 용의 힘을 사용해서 용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었다.
수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아이를 찾아오던 악몽은 그날로 끝이 났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일 년 후 처제에게 조카가 요즘도 악몽을 꾸느냐고 물으니 이제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어린 소년은 상상의 이끌림 속에서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가장 끔찍한 악몽을 마주했다. 개인이나 사회가 번성하려면 우리도 이 같이 행동해야 한다. 요즘은 기술이 너무나도 발전하다 보니 개개인의 오류와 약점이 더욱더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인류가 능력을 계속해서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지혜도 그에 걸맞게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간절히 찾고자 하는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찾아볼 가능성이 가장 낮은 곳"시궁창 속에서이다 In sterquillinis invenitur "568
“시궁창 속에서 찾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연금술'에서 가장 중
754 • 의미의 지도
요한 격언일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눈여겨보지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이는 자명한 진리이다. 근본적인 오류일수록, 고치기 어려울수록, 변화에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따른다. 가장 유익한 정보가 담긴 경험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도망을 치다 보면 양가적인 미지는 마주하기에 너무 두려운 존재로 바뀐다. 이례적인 정보를 수용하면 공포와 가능성, 혁명과 변화가 찾아온다.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부인하면 적응 과정이 억압되고 인생은 숨 막히는 곳으로 변한다. 인생의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길 혹은 저 길을 선택하고, 인생은 우리가 내린 모든 선택들이 합쳐져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오류를 부정하면, 잠시 안정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 즉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선한 포도원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겨 일구게 하고 그 소출의 일부를 거두려 했다. 주인이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종을 잡아서 초주검이 되도록 때렸다.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고하였다. 주인은 농부들이 내 종을 몰라보았을지 모른다며 또 다른 종을 보냈다. 농부들은 이 종도 때렸다. 그러자 주인은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하지만 농부들은 그가 포도원의 상속자인 줄 알고 그를 잡아다 죽였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5장 대립하는 형재들 - 75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을 내게 보여라. 그 돌이 바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569
부정했던 사실을 마주하고 인정하지 않던 사실을 수용하면 용이 지키는 보물을 찾게 될 것이다.
| 고대에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물질세계'
이 모든 신화들은 의식이 크게 확장된 인간의 정신 세계를 극의 형식으로 보여 주며, 인간을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자 구원자로 그린다. 첫 번째 묘사는 기독교적이며 두 번째는 연금술의 성격을 띤다. 전자의 경우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원이 필요한 대상으로 보고, 구원의 일을..... 스스로 존재하는 신에게 맡긴다. 후자의 경우 인간은 스스로 구원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받아 구원이 필요한 대상을 물질에 갇힌 세계영혼anima mundi 으로 규정한다. 570
연금술은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라피스 필로소포룸 Philosophorum, 즉 현자의 돌을 만들어 내려는 작업이다. 현자의 돌비금속을 금으로 뒤바꾸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손에 넣자에게 건강과 영원한 생명과 영혼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연금술 | 서양에서 약 2천 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오다가 뉴턴 시대에 이르 끝이 났고, 동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걸쳐 정교하게 발전했다.
연금술적 사고의 본질, 연금술과 현대 심리학의 연관성을 이히
1756 • 의미의 지도
려면 먼저 연금술사의 범주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연금술사들이 연구했던 '물질'은 현대의 물질과 명칭은 같지만 공통점은 그리 많지 않다. 세계를 범주화하는 방법은 다양하기에 그 방법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연금술사들이 '물질'로 취급했던 많은 것이 현대에는 객관적 세계의 일부로 취급되지 않으며, 그들이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을 현대인은 여러 개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 같은 관점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 세계를 구분할 때 사용되는 범주 체계는 현재 실행 중인 활동이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달라진다. 연금술사의 목표는 오늘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목표와 전혀 성격이 달랐다. 그들의 목표는 현대인의 목표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자연을 온전케 하는 것'), 심리학적 표현('타락한 물질을 '구원' 하는 것)으로 물들어 있었다. 연금술이 '이상적 상태에 대한 이해로부터 비롯된 심리적 절차인 만큼 그 범주는 가치 평가적이었다. 목표 지향 행동 중에 일어난 현상은 근본적으로 목표와의 관련성에 따라 범주화된다. 목표와 관련해 유용한 것은 '선'의 범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악'의 범주에 들어간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을 통해 정서를 조절한다) 가치 평가적 의미가 전혀 없는 범주 체계를 만들기란 굉장히 어렵다. 엄격한 경험적 방법론이 출현한 이후에야 인간은 가치 평가가 개입하지 않는 범주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금술에서 사용한 범주 체계를 비롯해서 경험주의 이전 시대의 범주 체계는, '물질' 이나 '황금과 같이 현대인에게 익숙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가치 평가가 수반됐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57
둘째, 제대로 탐구하지 못한 대상일수록 그것을 담거나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범주가 더 넓어진다. 탐구가 자세히 이루어질수록 대상은 더 상세히 구분된다. 이런 식으로 겉보기에 한데 뭉뚱그려져 있던 것들이 과거에는 미처 분간하지 못하던 구성 요소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 세계를 구성하던 4대 요소인 불, 물, 흙, 공기는 이제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기본 물질로 간주되지 않을 뿐더러, 같은 분석차원에 있는 범주로도 취급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범주 체계가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상들의 비교적 단순한 물질세계'를 훨씬 더 복잡하고 유용하며 다양한 세계로 탈바꿈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고대 세계의 구성 요소를 더 이상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다(이 요소가 하나의 도구이며, 불완전한 도구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탓이다).
경험주의 이전의 범주 체계가 매우 가치 평가적인 특성을 지니는데다 당시에는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도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과거의 범주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포괄적이다. 우리는 각각의 범주 안에서 '구별 가능한 현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수세기에 걸쳐 효율적으로 세계를 탐구해 온 결과 우리는 고대와 중세의 조상들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많이 변했기 때문에, 많은 경우 우리가 여전히 과거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저 우연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따라서 더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서 먼저 연금술사들이 '물질'로 여겼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현대인이 생각하는 물질과 비교해 보자.
758 - 의미의 지도
연금술에서 말하는 물질matter은 경험을 만들어 내는 '재료'였고, 더 나아가 경험의 주체를 만드는 재료였다. 이 '원시적 요소'는 현대에서 말하는 '정보나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도'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며, “그게 중요한 거야(that matters)"571나 뭐가 문제야(what is the matter?)”라는 어구에서 쓰인 '의미' (차이를 만들고, 관심을 끌며, 무시할 수 없고, 유익한 정보를 주는 것)에 더 가깝다.
우리는 '미지'의 상태에서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탐구한 결과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그 정보를 사용해서 우리 자신(행동 양식과 표상 도식)과 경험 '세계'를 형성한다. 이에 대해 피아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식은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며, 대상으로부터 시작되지도 않는다. 지식은 나와 대상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시작된다. ……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면 한편에서는 주체가, 다른 한편에서는 대상이 상호적으로 동시에 구축된다. 572
연금술의 원시적 요소들은 세계에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어서 불현듯 나타나곤 한다. 모든 대상은 새로운 상황에 놓이거나 혹은 새로운 연금술 절차를 거친 결과로 원래 범주를 '초월한 새로운 대상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상은 맨 처음 그 대상을 맞닥뜨릴 때 발생하는 정서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에 범주화했던 대상이 예상과 다르게 반응할 때 관찰자는 어떤 감정을 경험한다. 감정이라는 '변형의 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59
생성된 감정(두려움과 희망)은 변화 대상의 '새로운' 특성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한 탐색 행동을 유발한다. 탐색 결과 밝혀진 새로운 특성은 이전의 범주 체계에 통합되어 '같은 범주에 속한 속성'으로 간주된다. 혹은 새롭게 바뀐 대상이 '이전의 상태와 너무 달라서 '범주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전자의 경우는 일상적 변화이고 후자는 혁명적 변화이다).
새로운 사물은 탐색되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된 후에 사물이 현재 갖고 있는 동기적 의미 (기회, 위협, 만족, 처벌 혹은 그 무엇도 아닌)에 따라 범주화된다. 동물처럼 경험 세계의 현실 모형을 만들어낼 수준의 의사소통 능력이 없는 주체는 물론 추상화 능력으로 인해 범주의 근본적 특성과 목적이 흐릿해진 인간의 범주 체계 역시 이렇게 형성된다. 사물은 가장 근본적으로 사물의 동기적 의미, 즉 그것이 정서적으로 중요한 목표를 획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사물을 범주화한다는 말은 그것이 존재할 때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한다는 것으로, 이때 특정한 맥락 안에서 해당 사물이 지닌 동기적 의미가 제한된다(대개 목표 달성과 관련이 없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무한히 복잡한 특성을 지닌 대상은 언제든 자기 표상을 넘어설 가능성을 지닌다. 이런 자기 초월 능력은 '대상'의 특성(현상학적 관점에서는 경험의 특성)이지만, 인간은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대상이 지닌 초월적 능력', 즉 하나의 맥락에서 탐색되어 익숙해진 대상이 다른 맥락에서 탐색하지 못한 낯선 대상으로 변하는 능력을 물질에 깃든 '영혼'으로 간주했다. 융은 고대 연금
760 - 의미의 지도
술의 권위자 바실리우스 발렌티누스를 인용하여 이를 설명했다.
물질로서의 대지는 죽은 조직이 아니라 그 생명이자 혼인 영이 사는 곳이다. 광물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은 대지의 영으로부터 기운을 얻는다. 영은 생명이며, 별들에게 양분을 얻어 자신의 자궁에 품고 있는 모든 생물에 공급한다. 마치 어머니가 태아를 품듯이, 대지는 하늘로부터 받은 영으로 대지의 품에서 광물을 부화시킨다. 이 보이지 않는 영은 거울에 비친 상처럼 형체가 없으나, 연금술 과정에 필수적인 모든 물질의 뿌리이자, 동시에 그 결과로 나타난 모든 물질의 뿌리이다. 573
'대지 안에 살고 있는 영'은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메르쿠리우스(연금술의 관점에서 물질 속에 깃든 신의 심상1174)였다. 이 영은 연금술 과정을 이끄는 동시에 연금술사의 행위로 풀려났다. 메르쿠리우스는 연금술사가 연구하는 '물질'을 흥미롭고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관심은 지식이 변하고 성장함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영'이다. 메르쿠리우스는 변형의 화신인 우로보로스이며,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즉 세계가 주체와 대상, 정신과 물질, 기지와 미지로 나뉘기 이전에 존재했던 가장 원초적인 신이다. 우로보로스는 자기 꼬리를 집어삼키는 혼돈의 용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 현상 속에 시간을 가로질러 내포되어 있는 만물의 총체의 심상이다. 메르쿠리우스라는 영의 심상은 모든 경험의 구체적인 측면에 갇힌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한다.575 중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가능성'을 확인하고 범주화하는 문제였다.
장 대립하는 형제들 - 761
중세 시대 내내 메르쿠리우스는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궁금해하는 사색의 대상이었다. 그는 때로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기꺼이 돕는 영이자. 전우로서나 친우로서의 동료였으며, 또 때로는 세르부스 혹은 케르부스 푸지티부스servus or cervus fugitivus (도망친 노예, 수사슴), 즉 눈에 잘 띄지 않고 사람들을 현혹하며 골탕 먹이는 요괴였다. 이 영은 연금술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등 악마와 공통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용.사자, 독수리, 까마귀 등으로 여겨졌다. 메르쿠리우스는 연금술의 신들 중 원물질로서는 계급이 가장 낮고, 현자의 돌로서는 가장 높다. 메르쿠리스는 연금술사의 안내자(영혼의 안내자 헤르메스) 이자 유혹자이고, 행운이자 파멸이다. 576
연금술사는 현대인이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미지와 동일시했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 '물질'이 미지의 대상이었음을 고려하면 (사실 물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물질은 미지였기에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매력은 다름 아닌 아직 탐험되지 않은 대상에 깃든 정서가이다. 이렇듯 미지에는 '관심을 끄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미지는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영'으로 의인화되었다. 물질은 오늘날의 형태와 조건 아래서도 얼마든지 미지의 대상으로 되돌아가 현대인의 정신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질은 새로운 맥락에 놓이거나 창조적 탐험 과정에서 뜻밖의 특성을 드러낼 때 미지로 되돌아간다. 이처럼 이례적인 모습에 미지가 다시 나타나면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더 큰 흥미를 유발하거나 반대로 회피, 억압, 제거하
762 · 의미의 지도
려는 시도를 유발한다. 이미 탐색을 마치고 이론상 최종적으로 상자 속에 분류되어 담긴 (범주화된) 뒤에도 모든 대상은, '만물의 원천'인미지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에 길들여진 쥐 한 마리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쥐는 우리를 이미 다 살펴보아서 그곳을 편안하게 느낀다. 이때 작은 쇳덩이 하나를 우리에 떨어뜨리면 쥐는 일단 행동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피기 시작한다. 쥐는 운동 능력을 활용해서 쇳덩이와 상호작용한다. 냄새를 맡고 쳐다보고 긁고 갉아 보고, 쇳덩이라는 새로운 대상의 동기적 의미를 평가한다. 경험을 소통할 능력이 없는 데다 기초적인 탐색밖에 하지 못하는 동물적 한계로 인해 쇳덩이는 곧 아무 상관이 없는 대상으로 판명된다. 쇳덩이는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위험하지도 않았고 먹을 수도 없었고 집을 지을 재료로 활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무관한 대상으로 취급되며 쥐는 더 이상 쇳덩이를 살펴보지 않고 무시한다. 탐험에 근거한 범주화가 낯선 대상의 정서가를 제거한 것이다. 신화에서 이는 '위대한 아버지'가 '위대한 어머니'를 대체하고, '관련 없음'을 포함한) 확실한 정서가가 양가적 정서가인 위협과 기회를 대체한 것과 같다.
쇳덩이의 감각적 특성은 과학적 탐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 있는 대상의 특성이지만 쥐에게는 그 특성이 정서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적응 행동에 관심을 두는 기초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이 대상의 가치를 평가하고 행동하는 한 여전히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63
대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속성을 사실상 무한히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은 사실상 무한한 시공간적 관점에서 대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말이지만 '대상'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속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쇳덩이는 한때 지금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었고, 미래에 또 다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쇳덩이는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의 독립적인 물체로 간주되며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미분화된 총체의 일부분이었고, 네 가지 근원적 우주 차원의 힘이 상호작용하면서 수소가 융합하여 별이 되고 물질이 중력과 핵반응의 결과로 변화되고, 지구상에서 돌이 되었다가 마침내 여전히 미완의 존재이며 쇳덩이만큼이나 오랜 발전의 역사를 거쳐 온 인간에 의해 변형되어 쇳덩이가 된 것이다. 다양한 시공간의 차원에서 대상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대상은 현재 드러나 있는 모습보다 훨씬 더 복잡한 대상으로 뒤바뀐다. 이처럼 증가된 대상의 '복잡성'은 오랜 기간 활발하게 탐구를 지속하는 인간 특유의 능력으로 인해 더욱 증가한다.
인간에게 쇳덩이란 무엇인가? 형태를 바꾸면 창과 같은 무기가 될 수 있으므로 음식과 죽음과 안전을 의미한다. 매달면 진자가 되어 지구의 자전을 밝히는 열쇠가 된다. 떨어뜨리면 중력을 드러내고, 충분한 인내심과 창의력을 발휘해서 구성 입자들로 환원시키면 분자와 원자 구조를 드러내는 사례가 된다. 전체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인간에게 쇳덩이는 무엇이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경험주의가 태동하기
· 의미의 지도
1764
이전에 살았던 연금술사들은 원물질(경험의 기본 구성 요소)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물질' 의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현상, 유한한 대상이 지니는 무한한 의미, 대상이 지닌 끝없는 유용성, 무궁무진하게 미지를 드러내는 미지가 그 자체로 변화하는 능력에 매료되었다.
대상은 탐색의 결과로 동기적 의미가 제한된다. 이는 탐색이 하나의 구체적인 가정을 근거로 한 구체적인 목표 아래에서 이루어지며, 대상의 유용성이 그 목표와의 관련성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암묵적, 명시적으로 마음속에서 형성된 질문은 부분적으로 대상이 내놓을' 답을 결정한다. 따라서 대상은 언제든지 이 한계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용, 메르쿠리우스라는 변형의 영, 상대를 가차 없이 자신에게 매료시키는 영은 이 같은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사물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던 차에 꿈속에서 대서양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물체 하나를 보았다. 그 물체는 사각 대형을 이루고 나아가는 네 개의 거대한 허리케인 사이의 중심에서 위성의 추적을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고, 과학자들은 세계 곳곳의 기상 관측소에서 최신식 기상 장비를 동원하여 신중하고도 매서운 눈으로 그 물체를 관찰하고 있었다.
꿈에서 장면이 전환되었다. 지름 8인치 가량의 구체인 그 물체는 이제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유리 진열 상자 안에 담겨 전시되어 있었다. 그 상자는 작은 방 안에 있었는데, 그 방에는 출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회적 질서를 상징하는 미 대통령과 과학적 지식의 대표자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65
이자 합리성의 화신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그 방 안에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그 방의 특성을 설명했다. 벽은 2미터 두께의 불침수성물질(이산화티타늄?)로 되어 있다는데, 그 말이 꽤 인상적으로 들렸다. 벽체는 이 물체를 영원히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나는 그 방에 있지 않았지만 영화의 관객처럼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진열 상자 안에 있는 물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형태를 바꾸었는데, 성충이 번데기를 뚫고 나오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한순간 그것은 해포석 담배 파이프와 닮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다시 구 모양으로 형태를 바꾸고는 진열 상자와 벽에 완전한 구형태의 매끈한 구멍을 남긴 채 날아갔다. 물체는 일단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는 자신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장애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와 방을 떠났다.
그 물체는 물질 속에 구현된 신의 심상이자 우로보로스적 용의 심상이었고 허리케인 네 개를 동반할 만큼 강력했다. 577 그 방은 신비로운 현상을 제한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사회 지도자와 영향력 있는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범주 체계였다. 그 물체가 변하여 취한 담배 파이프의 형상은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속의 담배 파이프와 관련이 있었다. 그 그림은 지도는 영토가 아니며, 표상은 현상과 다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물체가 자기 의지'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대상이 현상학적 세계를 영원히 초월할 수 있으며, 과학적, 신화적 표상을 무한히 초월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일 년쯤 후에) 꿈속에서 정육면체 모양의 방 중심에 매달린 한 사람을 봤다. 그는 바닥과 천장과 사방의 벽으로부터
766 · 의미의 지도
팔 하나 정도 길이만큼 떨어진 채 매달려 있었고, 방은 정육면체의 표면이 안쪽으로 굽어서 마치 교차하는 여섯 개의 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정육면체의 각 표면은 남자가 어떻게 움직이든 상관없이 남자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했다. 남자가 앞으로 걸어가면 정육면체도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가 뒤로 걸어가면 정육면체도 똑같은 속도로 물 흐르듯 뒤로 물러났다. 각 표면은 지름이 10센티미터 정도의 원형 패턴으로 뒤덮여서 같은 크기의 사각형 표면에 새겨져 있었다. 각 원의 중심에는 파충류의 꼬리 일부분이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방 안의 어느 방향으로든 손을 뻗어 꼬리를 잡아서 방의 표면에서 잡아당길 수 있었다.
이 꿈은 자발적으로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인간의 능력을 나타낸다. 꼬리의 형태로만 나타난 용은 현상학적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우로보로스이다. 578 남자가 정육면체 안에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는 자발적 행위의 결과로 존재의 어느 측면이 모습을 드러내게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탐험은 식별 가능한 현상을 낳거나 끌어낸다. 그리고 탐험 결과는 일화 및 의미 기억 체계에 기록된다. 하지만 탐험 과정은 일화 체계가 만든 지도, 특히 미래에 관한 지도의 안내를 받는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환상 속에서 떠오른다. 운동 및 추상 탐험 체계가 현재 출현한 현상이 바람직한 미래의 지도에 맞아들어 가도록 노력을 기울인다. 행동의 결과와 목표가 일치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정서와 호기심 속에서 '세계의 원물질인 미지가 재등장한다.
장 대립하는 형제들 - 767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새롭게 배운다. 현재 정서 상태가 최적의 상태로 여겨지면 탐험이 충분히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탐험을 멈춘다. 행동으로 드러난 지식이 세계에 충분히 적응한 까닭에 세계는 (다시금) '낙원'이 된다. 하지만 낙원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면(현재 안정과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당연히 탐험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여전히 남아 있는 신비'는 사물이 지닌 본질적 매력속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저절로 관심을 끌고, 해당 사물에 내재하는 '정보'를 끌어내 주체나 세계로 변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연금술에서 본 세계의 기본 재료'는 '확실한 경험(주체와 대상)의 재료 이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고, 물질세계가 타락하듯 타락하는', 불완전하고 실현되지 못한, 추락하고 고통받는 존재이다.
이와 관련해서 경험주의 이전 시대의 '금'이라는 범주를 분석하면 이렇듯 분화되지 않은 복잡한 고대의 사상이 현대에 어떤 의미와 관련성, 중요성을 지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금은 현실에서 인식되는 바와 같이 기본 재료와 정반대되는 이상적 물질이다. 경험주의 이전뿐 아니라 현대에도 금은 경제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금이라는 금속의 가치는 단지 경제적 유용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금은 일화 표상 체계에서 늘 신성과 연관되어 왔다. 과학적 세계관이 발전하기 이전에 금과 신의 관계는 분명하게 이해할 만했다. 금은 여타 '가치 없는' 금속이나 물질과 달리 색이 변하거나 탁해지거나 부식되지 않았다. 따라서 금은 변하지 않고 썩지 않는 '불멸'의 존재였다. 금은 귀한 것이었고, 생명의 근원인 해처럼 빛났다. 따라
- 의미의 지도
768
서 금이라는 '범주는 아폴론적이고, 태양 같고, 우리가 아버지와 영웅의 상징으로 익숙하게 보아 온 신성한 모든 것을 포함했다. 융은 연금술사 미하엘 마이어 Micael Maier가 추정한 금의 특성을 설명한다.
태양은 수백만 번 공전하면서 대지 속에 금을 만든다. 태양은 자신의 모습을 대지에 서서히 각인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황금이다. 태양은 신의 상이다. 그리고 황금이 대지에 있는 태양의 상이듯, 심장은 인간의 몸에 있는 태양의 상이다. 그리하여 황금에서 신을 이해할 수 있다. 579
태양 빛은 힘, 초월성, 명확성, 의식, 영웅주의, 영속성 그리고 어둠과 해체와 부패 세력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초기 부계 신들과 인류의 지도자들은 생명을 주는 태양의 속성과 인간의 영웅적 이상을 결합시켰고, 그 유사성을 담은 동전은 태양을 모방하여 둥근 황금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황금은 모든 광석이 나아갈 이상적 목표였고, 물질적 진보의 목표였다. 예를 들어 납은 쉽게 산화하고 다른 여러 물질과 쉽게 '짝짓기' (결합) 한다는 면에서 문란하지만 대지의 품 안에서 '익어 가면서' 금처럼 완벽하고 침범할 수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황금과 같은 상태는 물질 속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 메르쿠리우스의 목표이다. 이와 관련하여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어떤 것도 잉태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모든 광석은 때가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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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 황금이 된다. 서방의 한 연금술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연이 그 의도를 실행함에 외부의 방해만 없다면, 자연은 언제나 자신이 생산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이 방향을 잘못 잡아서 혹은 어떤 저항에 얽매여 생성하는 실패와 변종을 바라보듯 불안정한 금속의 탄생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금속의 자연적 변형에 대한 믿음은 중국에서도 유서가 깊다. 안남지방, 인도와 말레이제도에서도 그러하다. 톤킨 지방의 농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검은 청동은 황금의 어머니라.” 황금은 청동에서 자연적으로 변형된다. 그러나 청동이 대지의 품에 오래 머무를 경우에만 이 변형이 구체화될 수 있다. 580
연금술사는 스스로를 자연이 오랜 세월 맺으려 애써 온 결실을 이끄는 자연의 산파이며, 변형 과정을 도와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바로 '황금'이었다. 엘리아데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따라서 '고귀한 황금은 대지가 품은 가장 원숙한 과실이고, 다른 금속은 대충 만들어지기에 '평범'하다. '영글지 않은' 것이다. 자연은 광물계의 완성, 즉 온전한 '성숙'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황금으로의 자연적 변형은 금속에 새겨진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완벽을 지향한다. 그러나 황금이 고도의 정신적 상징(인도의 문헌에서는 "황금은 불멸이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나타난다. 그 사상의 일부는 바로 연금술사가 자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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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도 같은 구세주라는 것이다. 연금술사는 자연이 마지막 목적을 완수하고 '이상'을 이루도록 돕는다. 여기서 자연의 이상이란 그 자손(광물일 수도, 동물이나 인간일 수도 있다)의 완전한 성숙, 즉 온전한 불멸과 자유이다. 581
연금술사는 적어도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세계에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나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조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당대를 지배하던 도덕률에 따르면 '살펴볼 가치가 없는 타락하고 비천한 측면의 세계, 즉 물질세계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혹시 인생이 더 나아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물질세계를 탐구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유용한 도구를 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미지를 탐험하듯이 말이다. 연금술사들은 무의식적으로 더 멀리까지 탐험하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가정했다. 그들은 '여전히 타락한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현재 상태가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미지를 탐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물질을 변형' 하려면 메르쿠리우스가 물질로부터 풀려나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관심이 이끄는 탐험이 인생을 구원에 이르도록 확장하는 열쇠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탐험 과정에 참여할 때 연금술사는 자신을 탐험 영웅과 동일시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구원자'가 된다(표상까지 늘 그렇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절차 차원에서는 그러하다). 이런 동일시는 연금술사가 자기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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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 물질의 상태에 참여한다고, 즉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속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복잡해진다. 이는 기본적으로 연금술사들이 자신을 부분적으로나마 '물질'(뿐 아니라 '황금'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한 변형을 도울 수 있는 존재)과 같은 범주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는 의미이다. 경험주의 이전의 종합적이고 융합적인 범주의 관점에서는 '행위의 대상'과 '행위의 주체'가 구분되지 않았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예로 서로 다른 두 종의 식물을 접붙이기 위해 필요한 '공감 주술'을 설명했다.
이븐 와샤는 서로 다른 식물 종 사이의 환상적인 접목에 관해 이야기한다(물론 동방에서 그런 개념에 미혹된 이는 그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레몬 나무의 가지를 월계수나 올리브 나무에 접목하면 올리브처럼 아주 작은 레몬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접목이 태양과 달의 필연적인 결합이 이루어질 때 치르는 의식 속에서 행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남자가 매우 아름다운 처녀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수치스러운 성교를 할 때, 접목할 가지는 그 처녀가 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교가 이루어지는 동안, 처녀가 나무에 가지를 접목한다.” 이 의미는 분명하다. 식물계의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결합이 반드시 성사되게 하려면, 인간 사이의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성적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582
이런 사상은 매우 흔히 나타난다. 농업으로부터 야금술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경험주의 이전에 수행된 모든 절차는 바람직한 결과를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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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기 위해 필요한 '정신 상태를 부르고', '절차의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만든 의례를 동반했다. 이는 사상에 앞서 행동 양식이 먼저 출현하기 때문이다. 파종을 할 때는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의례가 동반됐고, 광부나 대장장이, 도공 들 사이에서는 희생 제의가 성행했다. 자연은 무엇을 해야 할지 본보기를 봐야 했다. 인간은 무엇보다 본을 보임으로써 자연을 이끌었다. 올바른 절차는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만 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상은 물질의 '구원' 혹은 궁극적 완성을 변형의 가장 근원적이고 높은 목표로 삼은 연금술 절차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질적 요소들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비금속을 금으로 바꿔 주는 현자의 돌을 만들려면 먼저 연금술사 자신의 인격이 통합되어야 했다. 자연을 온전하게 만들려면 인간이 먼저 온전해져야 한다. 연금술사가 온전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연금술 절차와 연금술사라는 존재 사이의 관계는 연금술사가 자신을 물질세계와 동일시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다시 말해서 연금술사는 '물질'과 같은 범주에 속했다). 타락하고 부패한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끝없이 변할 수 있는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변할 수 있는 물질세계의 본질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상'의 존재 변화에 관련된 것들은 모두 논리적 필요에 따라 그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켜야 했다. 기본 물질을 금으로 바꾸는 행위는 엄연히 세계를 구원하고 세계를 '금과 같은 상태'로 바꾸는 행위였다. 현자의 돌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공감 주술 이론이 '연금술의 영역까지 확대되자, 수 세기에 걸쳐 발전한 연금술 분야에서 점차 이 온전함의 본질에 대한 (주로 심상적인) 가정이 난무하게
제장 대립하는 형제들 - 773
되었다.
현대인은 도대체 연금술에 관한 이런 사실들이 자신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음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로서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정신 장애를 실증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매진한다. 하지만 이런 목표는 가림막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상을 추구한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의 본질을 암묵적 상태'로 남겨 두려 하는 까닭은 이상을 명확히 이해할 때 제기되는 엄청난 난제들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을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로 규정하고 거기에 만족하며 질병이나 장애 (혹은 질병과 장애가 없는 상태)의 개념이 중세의 도덕 철학 및 경험적 지식과 연속선상에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 불안이 없는 상태가 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암묵적 이론 때문에 우리는 불안에 휩싸인 상태를 '장애'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나 조현병, 성격 장애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 개념의 바탕에는 갖가지 '부족한 현재 상태의 비교 대상으로서 '암묵적'(무의식적) 이상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이상을 어떻게 명시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 그 현실적인 방법 (다시 말해서 여러 이상들의 순위를 놓고 갈등하지 않을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질병을 치료하려면 '이상과 다른 상태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가 사실상 이상적 인간을 배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방법이 명시적으로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우리가 받아들일 이상은 분명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공들여 구축한 이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같은 일이 서양의 연금술에서는 일어났다. 연금술 철학이 기독교 시대를 거치며 발전하
774 , 의미의 지도
는 동안 '현자의 돌'이 점차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것이다. 이는 연금술사들에게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연금술사들처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자연을 온전하게 만들려면 올바른 태도를 갖추고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적절한 의례와 절차를 거쳐야 하며, 사물이 순수해지기를 바라는 만큼 자기 자신도 순수해져야 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일하는 사람은 자연 앞에서 본보기가 된다. 야심차게도 타락한 '물질서계'를 구원하려 했던 연금술의 경우 연금술사 자신이 위대해져야 했다. 그러므로 연금술 문헌은 일정 부분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기나긴'성찰'로 간주할 수 있다.
|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의 일화 표상
과학은 집단이 인식을 공유하는 감각 세계와 그 세계의 변화에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핵심 공리를 전제로 한다. 연금술적 환상속에서 처음으로 발현된 이 신념은 현 시대를 이루는 큰 틀이자 주요 전제여서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무척 놀라운 성취였다는 점은 간과되기 쉽다. 실증적 현실이 현상의 동기적 의미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개념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수천 년에 걸쳐 문화가 발전해야 했다(또 이 사상은 초기에 동양과 유럽의 발전된 사회에서만 나타났다). 연금술사들은 처음으로 물질에 가치를 부여하고 모험을 감행했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명쾌한 실증적 방법론이 없는 상태에서 '물질'을 연구했다. 융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75
5-5 대립하는 형제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정신'의 개념은 중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교육을 받은 현대인조차도 '정신의 실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esse in re'과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esse in intellectu solo' 사이의무엇을 상상하기란 우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결 방법은 '형이상학'에 있었다. 그러므로 연금술사는 이 유사과학적인 사실 역시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563
과학적 방법론과 경험을 일반화하기 위한 공식화된 비교 방법을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경험의 순수한 감각적 측면과 주관적, 정서적, 신화적 측면이 구별되지 않고 뒤섞여 있었음을 뜻한다. 과학적방법론의 주요 목적은 실증적 사실과 정서적 가설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론이 부재하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두 영역이 뒤섞인다.
(연금술사들은) .…… 물질에 관한 미지의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체적인 계획 없이 그저 발생하는 현상을관찰하고 해석했다. 한 덩어리의 낯선 물질이 있다면 연금술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저런 가정을 했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무의식적 투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거기에는 확실한 의도나 전통이 없었다. 따라서 연금술에서는 가장 순진하고 임의적이며 완전히 그른 가설이 생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가 지긋한 연금술사의 처지를 상상해 보자. 어떤 마을에 사는
776 , 의미의 지도
한 남자가 외따로 떨어진 헛간을 하나 짓고 무언가를 끓이다가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면 아주 당연하게 모두가 그를 주술사로 여길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자신이 기묘한 금속 조각을 찾았다며 그것을 사겠냐고 묻는다. 연금술사는 그 금속의 가치를 알지 못하지만 어림짐| 작으로 값을 치른다. 그러고는 그 금속을 솥에 넣고 황이나 그 엇비슷한 것과 혼합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한다. 만약 그 금속이 납이었다면, 연금술사는 그 증기로 인해 심각하게 납중독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물질은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거의
죽일 수도 있으므로, 납 안에는 악마가 있다고 말한다! 후에 그가 연금
술의 비기를 적을 때 "납을 조심하라. 납 안에는 사람들을 죽이고 미치광이로 만드는 악마가 있다."는 내용의 주석을 덧붙일 것이다. 이 결론은 중세의 발전 수준을 고려할 때 꽤 명백하고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 결과 특정 물질과 결합되면 중독성이 나타나는 납은 파괴적 요소를 투사하기에 걸맞은 대상이 된다. 산성 물질도 위험하긴 하지만 부
식을 일으키고 사물을 분해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기 때문에 화학 작
용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무언가를 녹이거나 액체로 만들고
싶을 때 산성 용액 속에 용해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산은 해체를 부르
는 위험한 물질이지만 몇 가지 물질을 다룰 수 있게 해 준다고 가정할
근거가 된다. 혹은 변형을 위한 매질로 가정하고는 지금껏 아무것도
지 못했던 금속을 꺼내 이 용액을 활용하여 변형시킬 수 있는지 확인할 ' 것이다. 그러므로 연금술사들은 그에 관해 내가 지금 설명한 것처럼 순진한 형식으로 글을 썼으며, 거기에는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
연과학이 아니라 갖가지 투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17
그러므로 연금술에는 명확한 의식하에 확실한 계획을 따르지 않고 이모저모 살피기만 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무의식의 내용물이 놀랍도록 많다. 584
연금술은 거의 2천 년에 걸쳐 성행하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자취를 감추었다. 연금술은 (적어도 중세에는 당시로서는 절대적이던 기독교를 보완하는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영혼의 궁극적 실체와 가치를 강조했고, 독단적인 종교로 굳어져 갔다.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다고 가정했고, 물질세계에 오명을 씌웠다.
중세에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이며 물리적인 세계, 즉 '물질세계'를 비도덕적이고 타락한 미지의 악마가 다스리는 곳으로 여겼다. 뱀과 이브가 인류의 후손을 '세속적이고 타락한 (물질) 세계'로 이끌어 갈음모를 꾸몄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이 범주를 통합하는 신화적 근거가 되었다. 물질세계의 매력은 영적 풍요로움이 아닌 관능적, 물질적 욕망을 쫓게 만든다는 점에서 교회를 위협했다. 게다.가 물질세계가 타락했다는 사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신념을 뒤흔들었다. 기독교 교리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인류를 최종적으로 구원했다고 보증했지만, 인간이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다는 점을 미루어봤을 때 그 교리는 믿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자들은 사람들이 '어머니가 다스리는 물질적 지하 세계'를 접하는 것을 무척 위험하게 생각했고, 거기에는 (적어도 전통을 보존하는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질'에 대한 연금술의 관심은 기독교의 '영적'이고 확립된 가치
1778 - 의미의 지도
평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발전했다. 교회가 감각적 물질세계를 억압하는 동시에 당대의 지식을 절대화했다는 것은 곧 이례적인 감각적, 정서적 경험과 거기에 담긴 가치를 부정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부인된 가치가 오랜 세월 거부당한 미지'의 것이 갖는 매력, 즉 '금지된 열매'에 깃들기 마련인 매력을 지니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결과 물질에 매료된 연금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동안, 연금술사는 미지의 대상을 해석하기 위해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추측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세 기독교인(혹은 기독교 이전 시대)의 환상과 다름없는 또 다른 환상처럼 보인다.
...…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연금술의 결과물도 환상의 산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심리학의 방법론을 통해 해독할 수 있다. 연금술적, 접근법은......… 아주 명백하게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태도이며 그 심리학적 본질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심리 작용과 화학 작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같은 척도로는 비교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중세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에는 화학적 물질의 본질과 물질들 사이의 결합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불가해하지만 하나와 하나를 합치면 똑같이 신비로운 새 물질을 만들어 내는 수수께끼의 물질로 보일 뿐이었다. 이 엄청난 무지 속에서 연금술사의 환상은 자유롭게 나래를 폈고,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도 쉬이 결합할 수 있었다. 중세 연금술사들의 환상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고, 상상 과정에서
제5장 대립하는 형재들 -
779
는 실제의 현상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 585
연금술사는 오래된 추측과 사상을 토대로 중세나 고대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물질에 '투영된 연금술사들의 사고를 분석하는 일은 곧 정신이 탐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환상의 내용물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연금술사의 사고를 분석하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연금술 관련 문헌을 다 모으면 그 속에는 1700년에 걸친 (도덕적) 변화의 본질에 관한 환상이 담겨 있다. 연금술사들은 이 같은 변화가 완벽한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물질(사람을 포함하는 범주)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했다. 그 길에서 구원받지 못한 태고의 물질인 원물질의 해체, 변형, 재구성이 이루어졌다.
연금술사가 연금술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이름인 '스퍼지 아트(고대 그리스어의 spao(다]와 ageiro(합치다)를 결합)' 혹은 용해하고 응고시킨다'와 같이 자주 사용되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연금술사는 자기 기술의 핵심을 한편으로는 분리와 분석의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과 결합에서 찾았다. 먼저 반대되는 경향이나 힘이 충돌하는 초기 상태가 있고, 적대적인 요소와 특성이 분리되면 다시 통합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카오스(혼돈)라 이름 붙인 초기의 상태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원물질'로서 찾아져야 했다. 이렇듯 일의 시작이 명백하지 않으니, 그 끝은 더 분명하지 않았다. 종결상태의 유형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이 있으며, 그 추측은 모두 그 이
• 의미의 지도
780
름의 의미에 담겨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영속성(생명의 연장과 불멸, 썩지 않는 상태), 양성구유, 정신성과 물질성, 인간적인 특성과 인간과의 유사성(호문쿨루스) 그리고 신성 등이다. 586
연금술사는 연금술 작업을 시작할 때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미지를 마주하기로 결심해야 했다. 그들의 이상은, 비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완전한 지식과 불멸의 생명과 흠잡을 데 없는 심신의 건강을 부여하는능력이 있는, 통합된 물질인 현자의 돌이었다. 중세인은 그런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변형적 특성을 지닌 여러 물질을 알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을 추구하게 된 동기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직업을 순전히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듯이, 순전히 잠재적인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연금술에 손을 댄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이 역시 물질적 수단을 선택했을 뿐 일종의 구원받고 싶은 욕구임에는 틀림이 없고, 성숙 과정에서 혹은 예기치않은 심정의 변화나 상황의 변화로 조금 더 순수한 영적 추구로 변모될 가능성이있다). 또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들처럼 진지하게 연구에 임한 부류도 있었다. 현자의 돌이라는 환상에 깃든 신비와 힘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 사상은 물질의 비밀을 밝히는 엄정한 연구, 까다롭고 힘들며 값비싼 연금술 연구에 동기를 부여했다. 물질 속에 지혜와 건강과 부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상은현대 과학에서도 모든 작업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이처럼 과장된 데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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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기독교 교리와 갈등을 빚는 사상이 만들어지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쉽사리 믿기 어렵다. 더군다나 그 어떤 연금술사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도 연금술이 17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융은 다음과 같이 썼다.
누군가 실제로 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는 반복되는 주장에도 증류기 속에서 한 번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만병통치약이나 엘릭시르가 실제로 인간의 수명을 기대 이상으로 연장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 화로에서 호문쿨루스가 뛰쳐나온 적도 없다는 사실. 이처럼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고려할 때 우리는 연금술사들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연금술에 심취하고 열정을 쏟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연금술이 수 세기에 걸친 노력 끝에 맺은 열매가 화학이라는 학문과 그 분야에서 나온 놀라운 발견들이라는 점에서, 연구에 대한 열정에 이끌렸던 연금술사들이 실제로 희망적인 길 위에 있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연금술에 대한 열정은 당시 전례가 없는 가능성의 예감으로 설명해야 한다. 연금술에 쏟아부은 노력이 유용한 결과나 깨달음을 주는 결과를 전혀 낳지 못했음에도, 연이은 실패에도, 연금술사들의 노력은 만족감 혹은 지혜가 늘어났다는 인식과 같이 그들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금술사들이 거의 하나같이 헛된 연구에 넌더리를 내며 돌아서지 않은 까닭을 설명할 길이 없다. 587
782 - 의미의 지도
기독교의 환상이 서구 문명화의 동기를 제공했던 것처럼 연금술의 환상은 실증 연구의 동기를 제공했다(그리고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이와 마찬가지로 신화도 신비하고 부조리하고 불가사의하지만 적응 과정의 선봉에 있다. 엘리아데는 과학의 기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신비학의 전통과 자연과학을 대담하게 종합하여 유럽의 종교와 문화를 쇄신하려 했던 이 일반적인 연금술적) 운동에서 뉴턴이 했던 역할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뉴턴은 자신의 연금술 실험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중 일부가 성공했다고 공표했다. 1940년까지 무시되던그의 무수한 연금술 관련 원고는 최근 베티 조 티터 돕스Betty Jo TeeterDobbs 교수의 『뉴턴 연금술의 기초 The Foundations of Newton's Alchemy,(1975) 라는 책에서 세심하게 분석되었다. 돕스 교수에 따르면 뉴턴은자기 실험실에서 방대한 연금술 문헌에 기록된 작업들을 면밀히 연구하고 실험했는데, "이정도로 방대한 연구가 이뤄진 것은 전무후무했다. 뉴턴은 연금술을 이용해 소우주의 구조를 발견하여 자신의 우주론 체계에 대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행성을 궤도에 머물게 하는 힘이 중력이라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1669 년부터 1696년까지 끈기 있게 실험을 계속 해 나갔지만, 미립자를 제어하는 힘을 규명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1679 ~1680 년 궤도 운동의 동력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인력이라는 화학적 개념을 우주에 적용했다.
맥과이어와 라탄시가 서술했듯이 뉴턴은 처음에 이렇게 확신했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83
“신은 선택된 소수의 인간에게 자연철학과 진정한 종교의 비밀을 전해 주었다. 이 지식은 그 후에 사라졌다가 불완전하게나마 회복되었지만 저속한 사람들에게로는 숨겨졌고 우화와 신화의 표현 속에 녹아들었다. 그 지식이 이제는 경험을 통해 더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588 이런 이유로 뉴턴은 연금술 문헌의 가장 깊이 있는 부분에 진정한 비밀이 담겨 있기를 바라며 조사했다. 근대 역학의 시조가 변성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원초적이고 비밀스러운 계시라는 전통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의 광학Optics, (1704)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물질이 빛으로, 빛이 물질로 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법칙에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변성에 매혹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돕스에 따르면, "뉴턴의 연금술에 대한 생각은 매우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어서 그 사상의 일반적인 타당성을 부정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1675년 이후 뉴턴의 모든 경력은 연금술과 기계론을 통합하기 위한 하나의 긴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판된 이후, 반대론자들은 뉴턴이 말하는 '힘'이 실제로는 '초자연적인 속성'이라고 단언했다. 톱스도 인정하다시피 어떤 의미에서 이런 비평은 옳았다. "뉴턴이 말하는 힘은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초자연적인 문헌에서 발견되는 신비한 공감이나 반감 같은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뉴턴은 그 힘에 물질과 운동 같은 존재론적인 상태를 부여했다. 그리함으로써, 또한 그 힘을 정량화함으로써 그는 기계론을 가상의 충돌 기제 수준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리처드 웨스트폴은 뉴턴이 말하는 힘의 개념을 분석한 후,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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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적인 전통과 기계론이 결합해서 근대 과학이 탄생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589
'근대 과학'은 눈부시게 도약하는 동안 신비주의의 유산을 무시하거나 거부해 왔다. 다르게 말하면 뉴턴 역학의 승리가 결국 뉴턴 자신의 과학적 이상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실제로 뉴턴과 그의 동시대인들은 과학 혁명에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파라셀수스, 존 다. 코메니우스, J. V. 안드레아, 플러드, 뉴턴 등 신 연금술 학자들은 서로 생각은 달라도, 같은 기대와 목표(그 첫 번째는 자연의 구원자가 되는 것)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는데, 특히 지식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서 인간을 완성해야겠다는 야심찬 포부는 누구 못지않았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방법은 연금술과 의학, 천문학, 역학 등의 자연과학을 비고백적인 기독교로 통합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통합은 초기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신플라톤주의를 통합해서 얻었던 눈부신 성과에 버금가는 새로운 기독교 창조였다. 18세기의 사람들이 상상하고, 부분적이나마 정교하게 만들어 낸 '지식'의 이러한 유형은 총체적 지식'을 얻기 위해 수행되었던 유럽 기독교의 마지막 시도였다. 590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 시도는 아니다.
물질의 형태에서 신의 속성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사상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기존에 확립된 부계적 '영적 세계가 아니라 '물질' 속에 구현되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의 본질은 물질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세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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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게 물질은 미지의 것이었고, 따라서 모든 억압되고 부정된 미지의 것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물질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곧 미지의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기독교 교리(공식적인 중세 유럽인의 기대와 바람의 일반 모형)에 오류가 있고 불완전할 수있다는 점을 암시한다는 데서 이단적이었고, 따라서 심리적, 사회적으로 위험한 사상이었다. 게다가 교회는 물질을 (인정할 수 없는 미지의전형적 사례로서) 타락하고 불완전하며 악마적인 것으로 못 박았기 때문에 물질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상은 더욱더 심각한 이설로 취급되었다.
연금술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을 찾아 나선 자이자 고통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였다. 그들은 자기 이상인 현자의 돌과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적어도 현대적 관점에서 '물질세계'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해서 공식화했다. 하지만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명확히 구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이상 추구는 화학적이면서도 그만큼 심리적인 성격이 강했다 (연금술사가 현대 과학의 기본적인 측정 도구조차 없는 상태에서 연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심리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고볼 수 있다). 연금술사는 자신이 찾는 해답이 교회 밖에, 미지 속에 놓여 있다고 상정했다. 금지된 미지의 영역을 탐험한다는 것은 곧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생성한다는 것이며(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통합한다는 것은 곧 완벽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연금술사는 '물질'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요소를 '금' 이라는 범주에 속한 요소로 바꾸고자 했다. 물질은 '물리적 존재로서 인간을 포함하는 타락하고 부패한 미지의 세계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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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금은 아폴론적이고 영적이고 태양과 같고 썩지 않는 상태이다.연금술사는 이런 변화를 불러일으킬 변형 물질, 즉 현자의 돌을 추구했지만 동시에 그 자신도 변형 물질로 여겼다. 연금술사가 연금술의변형 작업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참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연금술사는 용감하게도 중세 교회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천명한 구원의 작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듯 행동했다. 그래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을 금으로 바꾸기를 바랐다. 문제는 견디기 어려운 현재라는 A지점에서 이상적 미래라는 B지점으로 가기 위한 '일상적 행위로는기본 물질을 금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상낙원과 같은 '최고의 이상'은 혁명이 없이는 닿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연금술의'이야기'는 금세 더 복잡해졌고, '신들의 연합'에서 개괄했던 것 같은입문 혹은 영적 변형 과정과 유사하게 바뀌었다. 연금술사들은 곧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완만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커다란 도약에앞서 급격한 하강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단 연금술사가 교회가 아니라 최소한 교회와 더불어) 미지에서 구원을 찾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이전 범주 체계라는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아간 셈이 된다. 교리 체계 밖에서 사물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어떤 대상에 대해 모르는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대상'이 범주 체계 안, 특정 패러다임의 제약 안에 놓여 있다면, 대상의 선험적인 동기적 의미는 제한된다(관련이 없다고 간주될 때는 완전히, 특정 용도가 부여될 때는 부분적으로 사라진다).범주 체계가 사회 환경이나 자연환경이 변해서 혹은 기존의 패러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87
금
라피스의 활동연금술 작업
연금술사의 인격
기본 물질
그림 45. 연금술 작업의 일상적 이야기
원물질금의 상태질서의 왕융합(상승과 (재)통합)흑화(하강과 해제혼돈의 여왕(이례적 정보혼돈의 용
그림 46. 연금술 작업의 혁명적 이야기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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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패러다임을 위협하는 정보)을 하면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 이전에 동기적 의미가 제한되었던 현상이 원래의 위치를 되찾는다. 그 현상은 다시 낯설어지고, 범주화되기 이전의 정서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연금술에서 이 과정은 '왕'(과거를 지배하던 질서 체계)의 죽음과 왕비' (위대한 어머니로서, 위협과 기회의 원천이자 과거의 질서를 쇄신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의 재등장으로 그려진다. '왕비 안에 왕을 담금질하는 것'은 왕과 왕비의 성적 결합'으로서 '세계'가 창조 이전의 혼돈, 즉 원물질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때 앞서의 질서 상태에서는 조화롭게 공존하던 '물질'들 간에 다시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 상반되는 대립쌍들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 창조적 혹은 '성적' 결합으로 상징되는 왕과 왕비의 '재결합'은 새로운 것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이룬다. 이 '새로운 것'은 왕과 왕비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곧 앞으로 왕이 될 '신적 아들'로 개념화할 수 있다. 신적 아들은 새로운 왕이나 현자의 돌 등 여러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현자의 돌은 하찮은 형상으로 나타난다. 거기서 영원한 물이 샘솟는다. 591
원물질
원물질 혹은 '둥근 혼돈'이나 연금술적 우로보로스는 물질인 동시에 물질에 깃든 영향력으로서의 미지이다. 경험주의 이전 시대에는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주 발생 이전의 난자'이며,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89
혼돈의 용이고, 정신과 지식과 물질과 세계의 영원한 원천이다. 탐험할 때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는 원천인 동시에 모든 확실한 경험 주체를 구성하는 '정보'의 원천이다. 따라서 연금술사는 원물질에 반은 화학적이고 반은 신화적인' 정의를 부여했다. 원물질은 어떤 연금술사에게는 수은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광석, 철, 금, 납, 소금, 황, 식초, 물, 공기, 불, 흙, 피, 생명의 물, 돌, 독, 영혼, 구름, 이슬, 하늘, 그림자, 바다, 어머니, 달, 용 등이었다. 융은 다음과 같이 썼다.
파라셀수스에 따르면, 원물질의 자율성과 영속성은 어머니 신에 해당하는 신격과 동등한 원리임을 시사한다. …… 예를 들어 다음의 성경 구절을 원물질에 응용한다고 보자.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미가서 5장 2절)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한복음 8장 58절) 이는 '돌'이 시작도 끝도 없이 태초 이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돌이 그 원료와 함께 수천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며 '기적'으로 여겨진다는 것과, 그 이름들이 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저자 자신도 돌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겠지만.....… “만물이 나오는 근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동의 신이다. "592
연금술사들은 원물질을 아직 ‘구원받지 못한',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물질이 타락했다는 사상은 도덕적 사상이며, 물질의 '불완전성'은 따라서 도덕적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물질의 불완전성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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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연금술사의 생각은 불가피하게 도덕적 불완전성의 문제와물질적 타락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연금술사는 실증적 방법론이 없는 상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사고했기 때문에, 타락한 원물질이 원죄를 비롯하여 일상의 여러 죄로 물든 세속적 인간과 더불어모든 타락하고 불완전한 창조물의 특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선조들이 세계를 얼마만큼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는지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고대 세계의 면면은 타락 속에서 완벽한 상태를 향해 분투하는 도덕적 노력과 맞물려 있었다. 모든 광석은 순금속이 되고자 했고, 순금속은 금이 되고자 했다. 따라서 대장장이와광부와 연금술사는 모두 땅이 낳고자 하는 '완벽한 물질을 낳도록돕는 산파의 역할을 했다. 엘리아데는 과거 야금공의 독특한 관점에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광물질은 어머니 대지에 부여된 신성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대지의 배에서 배아의 방식을 거쳐 광석이 '성장한다'는 개념과 대면한다. 따라서 야금학은 산과학의 특징을 띠게 된다. 광부와 야금공은 땅속 배아의 생성에 개입한다. 그들은 광석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자연이 하는 일에 협력하여 더 빨리 출산하도록 돕는다. 요컨대 인간은 다양한 기술로 점차 시간을 대체한다. 인간의 노동이 시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자연의 일에 협력하고, 자연이 점차 더 빠르게 생산하도록 도우며,물질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연금술 사상의 근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금술사의 정신세계와 광부, 야금공, 대장장이의 정
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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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사이에 온전한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 대장장이의 입문 의식과 비기는 후에 중국의 도교와 연금술로 계승되는 전통의 필수 요소였다.) 하지만 제련공, 대장장이, 연금술사의 공통점은 이 세 작업 모두가 물질과의 관계에서 주술적, 종교적으로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경험은 그들의 전유물이며, 그 비기는 입문 의례를 통해 전수된다. 제련공, 대장장이, 연금술사 모두 살아 있고 신성하다고 여기는 물질을 작업 대상으로 삼으며, 그들은 노동을 통해 물질의 완전한 변성, 즉 물질의 완성과 변형을 추구한다. 593
연금술사는 인간이 죄 많고 악한 세속적 속성에 의해 타락하고 부패하기 쉬운 상태로 남겨진 것처럼 물질도 불완전하고 구원받지 못한 원물질 상태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원물질을 금이나 현자의 돌로 변형하는 것은 도덕적 수단을 통해서 도덕적 변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금술사는 부패한 물질을 구원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타락한 물질을 구원한다는 연금술사들의 환상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기독교 교리 체계에 따라) 물리적 경험 세계를 공식적으로 저주받은 장소로 폄하했고, 그에 따라 경험에 표상된 잃어버린 가치가 구원받기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나선 연금술사들은 인간의 타락과 한계와 과거 그리고 그 변형과 구원의 본질을 더욱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이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들면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맞닥뜨리고 미지와 조우할 때 원형적 '길'이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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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드러난다는 환상이 떠올랐다. 연금술사들은 확실히 '정신'과 '객관적 현실'을 혼동했지만, 이러한 혼동에도 의미가 있다. 연금술사들은 물질을 구원하기 위한 변형 방법을 연구하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구원했다. 그 이유는 탐험 과정 속에서 인격 구축에 필요한 정보가 드러났고, 전통이 허용하는 영역 밖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 탐험을 하는 건 곧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연금술적 변형의 첫 단계는 해체이다. 단단한 형태를 지닌 원물질은 화학적 용해나 부패 과정을 거쳐 해체된다. 질서 있고 '안정되고 '완고한 부계적 형식을 탈피하는 것이다. 모든 도덕적 변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해체 단계는 과거에 존재하던 삶의 형식이 비극적으로 붕괴됨을 뜻한다. 원물질의 해체는 연금술사가 과거에 사회적으로 확립된 심리 상태로부터 벗어나 미지를 추구하기로 결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화학적 부패는 철학자들의 연구에 비유된다. 철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지식을 얻는 것처럼 자연 만물은 부패하는 과정에서 용해되기 때문이다. 용액은 철학적 지식에 비유된다. 594
상징적으로 원물질에 해당하는 연금술사의 과거 심리 상태의 특성과 그것이 해체된 결과는 중세의 세계관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을 연구한다는 것은 중세인에게 극도로 이단적인 행위였다. 미지가 여전히 존재하므로 이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부들이 세운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 권위를 위협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93
했다. 기독교 교리의 권위에 의심을 품는다는 것은 곧 연금술사가 심리적으로 문화적 규범이 보호하는 영역을 벗어난다는 의미였고, 사회적으로는 교회의 처분에 맡겨진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물질 및 물질의 변형에 대한 연구는 심리적, 사회적으로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단적 행위에 대한 형벌은 매우 끔찍했고(고문과 파문), 개인이 심리적으로 겪어야 할 잠재적 위험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연금술사의 길을 가려면 먼저 제 발로 자기가 따르던 사회의 보호막 밖으로 걸어 나가 물질세계를 탐구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타락한 물질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악마 숭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연금술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했을지는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물론 혁명적 사상으로 인해 위협을 받게 되면 현대인의 마음에도 이러한 불안이 재등장한다). 미지에서 이상을 찾는 연금술사의 길을 가려면 당시를 지배하던 개인적, 사회적 세계관을 버리고 해체해야만 했다. 물질 연구를 이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부패와 악을 연구하면서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연구에 착수한 연금술사들은 이미 자기가 구원받아야 할 불완전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당시 교회가 그어 놓은 한계밖으로 절대 발을 내디딜 수 없었을 것이다. 부패한 원물질처럼 자기도 구원받고 완성되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은 연금술사와 그가 다루는 물질 사이의 동일시를 무의식적으로 더 강화했다.
| 질서의 왕
공식적인 실증적 방법론이 없는 상태에서 연금술사는 물질의 변
- 의미의 지도
794
5-6 대립하는 형제들
형을 자신의 상상 속 가정에 의지해서 연구해야만 했다. 따라서 연금술의 산물은 신화에 나타나는 길의 구조, 즉 심상적 환상의 원형적 구조를 따를 수밖에 없다. 연금술사는 홀로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연금술 절차에 몰두하면서 이처럼 환상이 지배하는 고독한 길을따라갔다. 연금술사에게는 자신의 무지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있기에, '물질'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미지와 조우하는 형식을 따른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곧 문화적 규범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는 도덕적 변화를 이루기 위한 토대를 이루며 상징적인 형태를 띤다(이 도전은 무지한 개인이 문화적 규범과 자신을 어느 정도로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된다). 연금술사는 물질의 부패 과정을 이해하고 물질을 온전하게 만들 방법을 찾는다. 기독교 교리는 세계가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연금술사는 그 자신을 포함한 물질이 여전히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불완전한 상태로남아 있다고 느낀다. 이처럼 자신과 세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교회와 심리적으로 표상된 기독교 교리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 불완전성은 절대적 권위로 나타나 압제적역할을 수행하는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려면 이런 측면을 제거해야 한다. 이처럼 원물질에서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흔히 가부장적, 억압적 측면으로 주로 상상 속에서 위대한 아버지나 왕 혹은 그와 유사한 상징으로 나타난다. 융은 이렇게 말했다.
의식은 대개 그 자체의 변화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의식은 더 독재적일수록 그리고 자기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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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옳다고 확신할수록, 더욱 진리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자연 현상인 태양신sol의 왕권은 일반적으로 지배적인 사상을 상징하여 그 운명을 함께하는 인간의 왕에게 전해진다. 현상계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만물 유전流轉의 법칙이 지배한다. 모든 진실한 것은 변하고, 오직 변하는 것만이 진실한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 연금술 절차에 변형 과정이 투사되어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정신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심리적 지배자가 노쇠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지배자가 이전처럼 온전히 정신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면에서, 정신이 더 이상 지배자에게 완전히 통제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정신의 의미와 내용물이 더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혹 이해된 것이라 해도 가슴에 와 닿지 못한다. 이처럼 '불완전한 느낌'은 정신의 다른 영역과 그 내용물을 끌어당겨 간격을 메우는 보상적 반응을 일으킨다. 대체로 이 반응은 흔히 의식의 태도와 방향이 불충분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생기는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의식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없으며 외부적인 방해로 인해 일을 그르친다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꿈을 관찰하면 의식의 가정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가 곧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 신경증적 증상이 발현되면, 의식의 태도, 즉 의식을 지배하던 관념이 부정되고, 무의식 속에서는 의식의 태도에 의해 강하게 억압되었던 원형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심리치료사는 환자의 자아를 그 반대자와 대립시켜 자아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에 돌입하도록 돕는 수밖에 없다. 연금술에서 말하는 왕의 신화에서
의미의 지도
796 ,
이 대립은 '태양신' 왕이 지배하는 남성적이고 정신적인 아버지 세계와 '영원한 물' 이나 카오스로 상징되는 여성적이며 어둡고 원시적인 어머니 세계가 충돌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595
'왕의 해체'가 상징하는 과정은 화학적으로는 용해 과정, 즉 고체나 혼합물(원물질)을 용제에 담그거나 물질이 썩어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같다. 왕은 연금술 절차에서 고체에 해당하는데, 역사적으로 확립된 행동 양식과 표상 체계의 신성한 중심을 표상한다. 연금술사는 본격적으로 물질 및 미지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동일시해 왔던 이 행동 양식 및 표상 체계를 버리거나 혹은 거기에 도전해야만 한다. 문화적으로 확립된 가부장적 체계를 파괴하는 행위는 대개 이야기 속에서 노쇠하고 병약한 왕의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그려진다. 열매가 열리지 않는 땅에서는 이런 절차가 필요하다. 한때 의례로 행해졌던 왕의 희생은 곧 특정한 적응 행동 양식과 표상 도식에 의지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며, 변칙으로 인해 적응이 위협받을 때 다시금 새로운 사상이나 체계를 도입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596 문화의 중심으로서 왕은 연금술이 융성하던 시대에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독수리, 태양, 사자, 하늘, 불, 높은 곳, 영혼은 모두 왕이라는 가부장적 체계의 여러 측면을 상징했으며, 해체되기 이전의 원물질의 초기 상태를 표상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상징적 표상들은 이것들이 처음 만들어졌던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당연히 다시 등장했다. 미지와의 조우도 그중 하나이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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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의 여왕
왕으로 상징되는 원물질을 녹이는 용제 혹은 원물질이 되돌아가는 흙은 연금술에서 모계 체계로 표상된다. 원물질은 물, 소금물, 눈물 혹은 피에 용해되는데, 이는 늙은 왕이 모계 체계 속에서, (과거 제한되었던) 관능과 정서와 상상 속에서 용해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모계 체계는 구체적으로 정형화된 지식을 위협하고 초월하며, 동시에 이 지식을 낳는 모체이다. 이것은 신화에서 여왕 혹은 위대하고도 무시무시한 어머니로 표상되며, 바다, 두꺼비, 물고기, 용, 암사자, 땅, 심연, 십자가, 죽음, 물질로 상징된다.
그것은 달이고, 만물의 어머니이며, 그릇이다. 대립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1천 개의 이름으로 불리며, 노파이자 창녀이다. 연금술의 어머니로서 그 자신이 지혜요. 또한 지혜를 주는 자이며, 불로장생의 영약을 품고 있다. 구세주의 어머니요, 또한 대우주의 아들의 어머니이다. 그것은 대지이며, 또한 대지에 숨은 뱀이요. 암흑이고, 이슬이며, 분열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신비의 물이다. 597
원물질 중 하나인 왕은 또 다른 원물질인 소금물(바다) 속에서 용해된다. 여기서 소금물 또는 바다는 욕구의 좌절로 인한 비극적 정서와 눈물을 나타내면서 만물의 모체와 정서를 표상한다. 화학적 용해를 촉진하는 열기는 이성적 사고 영역 밖에 있는 심리적 세계의 측면인 열정과 감정 혹은 관능을 상징한다. 모계 체계 안에 녹아내리는 왕은 영웅이 어머니와 창조적(성적)으로 재결합하는 희생적 근친
- 의미의 지도
798
상간의 모티프를 재연한다. 이 창조적 결합은 처음에는 심리적 혼돈,우울, 불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그 이후에야 재창조로 나타난다.왕은 신의 아들로서, 처음에는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내려왔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효용을 점점 상실해 간다. 원시 사회에서 왕을시해하던 의례는 백성과 영토를 재생하는 왕의 마술적 힘과 능력이왕의 노쇠와 함께 줄어든다는 신념에 근거했다. 심리적, 사회적 억압은 불가피하게 개인과 사회의 정체, 우울, 해체를 부채질한다. 그렇지만 현 시대를 지배하는 영혼에 도전하는 것은 곧 참고할 만한 지식이 사라지고, 조건부 기지의 영역에 무시무시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주는 미지가 되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왕은 반드시 자기 어머니의 몸 안에서 스스로를 원물질로 변형시켜서 연금술사가 '혼돈'이라고 부르는 어두운 초기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혼돈의 덩어리 속에서는 모든 요소가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모든 연결고리가 녹아서 사라진다. 이러한 해체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다. 이 신비로운 과정에 뛰어든 자는 변형을 위해서 상징적 죽음을 견뎌 내야 한다. 598
융이 아니마로 의인화하여 표상한 모계 영역은 미지이며 새로운지식의 원천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지혜'를 상징하며, 지식을 새롭게 하는 계시의 모체이다. 어머니의 계시는 기존 지식을 위협하고,그 결과 예측 가능성과 확실성이 사라지고 과거 '억제되었던 정서가'풀려난다. 이와 관련해서 융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799
아니마는 왕이 그녀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할 때 창조적으로 변화했다. 심리학적으로 왕은 태양신'을 상징하며, 우리는 앞서 '태양신'을의식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왕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원리나 집단적 신념 혹은 전통과 같은 의식의 지배자를 표상한다. 이 체계와 지배 사상은 '노쇠하고 그에 따라 '신들의 완전한 변화'를 강력히초래한다. ...…(이런 일이) 확실한 집단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드물다. 대개 이런 변화는 특정 조건 아래에서 '때가 도래하면 사회에영향을 미칠 개인 안에서 일어난다. 이 개인에게 '때가 도래했다는 것은 단지 내부 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 지배 사상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599
노쇠는 절대적으로 떠받들어지던 구체적 지식이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운명이다. 미지는 언제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최종적 선언이란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지식을 지금알려진 것으로 제한하려 들면 결국 사회와 개인의 정신이 모두 정체된다. 안타깝지만 이런 정체를 극복하려면 우선 정서적, 동기적, 사상적 혼돈을 겪어야 한다. 모계 체계 안에서 가부장 체계를 용해하는과정은 아무리 자발적으로 이상을 좇는 행위라고 해도 정신적 혼돈을 불러온다. 이때의 혼돈은 연금술에서 왕의 병상, 여왕의 임신 혹은 그와 유사한 비유로 상징된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결정에뒤따르는 이 혼돈 상태에서 정신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환상 속에서 구체화되고 의인화되어 중재 원리 없이 서로 대립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태는 인간의 정신, '인류를 다스리는 신들이 상
800 - 의미의 지도
위 질서의 '지배' 아래 귀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벌이는 다신교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작업에서 이 단계를 흑화(암흑)라고 불렀는데, 이 단계에서는 우울, 불안, 심리적 혼돈, 불확실성, 충동성이 나타난다.
암묵적, 명시적으로 패러다임의 구조를 지닌 일련의 신념에 따라 억제되었던 사건과 과정의 동기적 의미가 다시금 불확실하게 초기화되면 경험 세계는 암흑에 휩싸인다. 과거의 신념이 해체되고, 연금술사의 정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은 환상 속에서 의인화된다. 그러면 구심점 역할을 하던 원리가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면서 폐기되고 사라진 탓에 개인적, 가부장적, 모계적 요소들이 서로 경쟁을 펼친다. 융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싸움은 분리, 분할, 부패, 죽음 그리고 용해이며 이 모두는 원래의 혼돈한 갈등 상태를 나타낸다. 600 .....… 도른은 이처럼 사납고 호전적인 상태를 하늘에서 추락한 악마가 인간의 마음에 깊이 심으려던'뿔 넷 달린 용으로 비유했다. 도른은 이를 도덕 차원에서 일어난 전쟁에 빗대어 우리가 심인성 정신질환과 신경증의 뿌리라고 알고 있는 현대 심리학의 정신 분열 개념과 유사하게 이해했다. 아쿠아리움 사피엔툼 Aquarium Sapientum」에 따르면 '십자의 용광로' 속에서, 불 속에서, "인간은 지상의 황금과 같이 완전히 검은 까마귀의 머리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완전히 망가져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데, 이것은 단시 40주야 혹은 수년이 아니라 종종 그의 생애 전 기간에 걸쳐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병안과 기쁨보다는 두통을, 쾌락보다는 슬픔을 훨씬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01
더 많이 겪는다. …… 이러한 영적 죽음을 통해서 그의 혼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혹화는 성경의 불운한 인물 욥이 겪은 곤경에 비교될 정도의 변형과 심리적 고통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허락하에 욥이 부당하게 겪은 불행은 하나님의 종이 겪는 고통이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견한다. 601
기존의 문화적 규범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짐짓 그런 척위장하면 미지로부터 보호를 받고 참고할 만한 지식을 얻을 수는 있지만 압제에 놓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 같은 동일시의 끝에는 변칙과 미지를 부인하는 거짓이 놓여 있다. 집단 정체성이 자발적 혹은 상황 변화로 인해 불가피하게 벗겨지면, 기존 범주 체계가 온전히 유지되는 동안 억제되었던' 정서가 다시 풀려나 제 모습을 드러낸다. '왕의 해체'는 곧 이전에 이해했던 모든 것이 미지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수많은 신을 하나의 최고신으로 만든 역사를 되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치의 위계가 무너져 서로 갈등하는 충동과 욕구와 '하위 인격들 간에 전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회귀'는 개인을 커다란 불확실성과 좌절, 우울,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 편력,
연금술사는 온전한 상태란 모든 경쟁하는 대립쌍'을 통합하는 통
• 긴 여행
802 • 의미의 지도
일된 상태라고 믿었다. 따라서 연금술 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융합에 이르려면, 먼저 ‘우로보로스적인 용의 배 속에서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다양한 정신의 측면'을 발견하고 인식해야 한다.
1 그렇다면 신비에 관한 연금술사들의 생각을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꿈을 해석할 때 활용하는 작업 가설을 떠올려야 한다. 작업가설은 꿈과 자발적 환상에 나타나는 심상은 상징이며, 이들은 아직 알지 못하거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식의 내용물이나 의식의 태도를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 기본 원칙을 연금술의 신비에 적용해 보면, 신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통일성과 유일성(돌도 하나이고 약도 하나이고 그릇도 하나이고 절차도 하나이고 성향도 하나이다)이 분열된 의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체로 하나인 사람은 약으로 하나가 될 필요가 없다. 이는 자신의 분열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의식'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비교적 철학적 성향이 강했던 연금술사들은 당시를 지배하던 세계관인 기독교 신앙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그 진리를 확신하고 있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기술된 고대 연금술 문헌을 확인해 보면 연금술사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 문헌들에는 이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기독교는 분명히 '구원'의 체계이고, 신이 세운 '구원의 계획'에 토대를 두며, 신은 단일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왜 기독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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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합과 조화의 기회를 줘도 연금술사들은 내면의 부조화를 느끼거나 혹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느끼는지 질문을 던져 봐야한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602
이 같은 포괄적 인식은 '지구의 네 귀퉁이를 향한 여정', 즉 '편력'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편력은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측면에 익숙해지고 자기 이해를 널리 확장시키는 것이다. 여러 경쟁하는 동기를 하나의 가치 체계로 통합하려면 먼저 갖가지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다루기 어려운 욕망들을 모두 인식하고 그것들 사이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이를 가장 정확히 표현하자면 '구원'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자의식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낙원으로부터 추방을 묘사한 신화적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 제한적 자의식의 발생은 인간을 추락시킨 원인이었다. 온전함의 본질을 깨닫고 물질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변형 과정을 끝없이 탐구했던 연금술사들은 자의식을 더 확장하면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서로 대립하는 모든 욕망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처한 비극적 상황과 '죄를 범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개개인이 지은 모든 죄와 부족함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그런 상황과 한계를 진실로 받아들이려 애쓴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제멋대로 어리석게 살면서 가는 곳마다 혼돈을 일으켰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엄청난 일을 직시하기가 끔찍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거짓된 페르소나라는 정체성을 벗고 자신의 부족한 인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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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7. 죽은 왕을 집어삼키는 원물질로서의 이리 603
렵다. 이와 같은 명확한 자기 이해를 얻으려면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결코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연금술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개인'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으로 '야수'와 '노략질하는 이리 혹은 사자 같은 짐승' 604 이 사용되었다. 개인이 의식에 이 야수가 출현하고 그것이 자기의 참모습임을 인정하는 것은 변화를 위한 필수 전제이다. 그림 47에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지하 세계의 야수'가 죽은 왕을 집어삼키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마치 솔제니친이 자신을 가둔 수용소의 존재에 자신의 책임도 있음을 발견한 것과 같다. 그것은 흡사 우리안에도 나치와 이어지는 면모가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느끼는 충격과 같을 것이다. 히틀러 치하에서 잔혹한 짓을 행한 사람들은 모두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05
'보통 사람'이었다. 여러분이나 나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 말이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가 나치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헛된 안정감을 줄 뿐이다. 마치 감옥이 수감자를 바깥세상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고문하고 그것을 즐기던 나치의 만행은 보통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의 범위에 충분히 들어간다. 개인은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악의 힘을 인정할 때만,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 사실을 진정으로 인식할 때만 우리는 자기 인격을 제대로 개선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무의식적으로 퍼뜨리려는 존재로 전락하지 않고, 존재의 비극을 견뎌 내고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융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동물이 자기(심리적 총체를 상징한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마이어의 글에 담긴 이 암시는 연금술을 전혀 알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이는 자기의 전체 구조가 늘 존재하지만 무의식 속에 깊이 묻혀 있으며, 목숨을 걸고 자기 이해와 의식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구조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 이해는 흔히 지옥에 가서야 마시는 거칠고 쓴 약이다. 이 같은 시련에 대한 보상으로는 신의 왕좌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총체적인 자기 이해는 일방적인 지적 유희가 아니라 육지와 바다. 공기와 불, 이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네 개의 대륙을 지나는 여행과 같기 때문이다. 그에 상응하는 총체적 인식은 존재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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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혹은 360가지가 될 수도 있다!) 측면을 수용한다. 이 중 어느 것도 '묵살 되지 않아야 한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명상가에게 '오감을 통한 상상'을 권하고 감각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점은 명상 대상을 최대한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명상의 도덕적인 효과나 기타 다른 효과와는 완전히 별개로, 그 주된 효과는 의식의 훈련, 집중력, 주의력, 명료한 생각이다. 그에 상응하는 형태를 지닌 요가 또한 비슷한 효과를 낸다. 그러나 명상가들이 자신을 정해진 형태로 투영하는 인식의 이런 전통적인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마이어가 언급한 자기 이해는 경험 속에서 발견한 실제 자기를 있는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결점을 조심스럽게 제거한 뒤에 기분좋게 떠올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모든 일과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다 간직하고 있는 경험적 자아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지우길 바라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자아를 망상으로 보았고, 서양에서는 자아를 그리스도의 형상에 제물로 바쳤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비주의에서 편력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고, 의식을 최대한 확장하는 것이다. 편력의 원리는 사람이 스스로 짓지 않은 죄로부터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카포크라테스의 사상과 맞닿는다. 경험에서 드러난 자아의 일면'을 외면하지 않고 만물'에 반영된 자아를 최대한 경험하는 것이 바로 편력의 목표이다. 605
개개인이 사회에서 쓰는 가면은 개인과 문화(흔히 해당 문화의 최고요소)가 동일하다는 거짓에 근거한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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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규범에서 벗어난 자신의 일면, 즉 어리석음을 거짓으로 감추고 회피한다. 이처럼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않은 일탈적인 삶 속에는 규범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해당 문화의 여론에 의해 억압되고 잠시 마음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개인이 스스로 무의식 속에 밀어 넣은 자기의 최고 및 최악의 성향이 담겨 있다. 위계적으로 통합된 도덕 체계가 없으면, 식탐이 욕정을 가로막고 허기가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 듯, 여러 가치와 관점이 서로 경쟁하고 각자 자기 목표를 쫓으며 분열한다. 도덕 체계가 해체되고 절대적 타당성을 잃으면, 상위도덕 구조에 의해 하나로 묶여 있던 가치들이 적어도 의식의 관점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상태로 회귀한다. 이렇듯 그 자체로 '신적인 힘'을 행사하는 가치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벌인 전쟁으로 인해 개인은혼돈과 절망에 빠져 방향성을 상실한다. 이 같이 절망적이고 견디기어려운 상태는 도덕적 변화를 막는 첫 번째 걸림돌이 된다. 이 절망적인 상태는 상상만으로도 도덕 발달을 멈출 만큼 불편한 감정을 유발한다. 하지만 연금술사는 자발적으로 이상을 찾아 미지를 좇기로결심한 순간 무의식적으로 영웅의 정체성을 수용한다. 영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영웅의 심상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면서 그는 여러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연금술을 계속 연구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 영원한 심상이 살아 존재해야만, 인간의 정신은 존엄성을 지키며 자기 영혼만으로 도덕적으로 바로 설 수 있고, 또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는 일이 가치 있게 여겨질 수 있다. 그때에야 인간은 갈등이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과, 이런 부조화와 시련이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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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공격함으로써 이 자산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만일 운명이 그에게 죄책감으로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다면, 이 빚 또한 자기 책임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기 정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가치를 상실한 사람은 굶주린 강도, 늑대, 사자, 탐욕스러운 짐승이 되는데, 연금술사들은 이것이 시커먼 혼돈의 물(즉 무의식적 투사)이 왕을 삼킬 때 터져 나오는 탐욕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606
미지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과 혼동된다. 그것은 무의식속에 남겨진 자아의 일면과, 경험하고 이해했으나 적응하지는 못한 경험 세계의 일면이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미지와 정서가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념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회피하거나 억압한 모든 생각과 충동, 경험했으나 인정하지 않은 모든 환상들은 모두 다 만물의 어머니인 혼돈의 영역에 존재하면서 우리 신념 체계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를 뒤흔든다. 따라서 '미지'와의 조우는 지금까지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부정해 왔던 자신의 일면을 조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합을 이루면 그때까지 폐기해 왔던 행동 가능성을 의식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고, 그런 가능성을 정확히 표상하는 자기 모형을 구축할 수 있다.
현존하는 도덕 체계의 관점에서 금기시되는 경험에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나 미래에 일어날 문제에 대한 창의적인 해답의 씨앗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캐내지 않은' 구원의 가능성이 담겨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을 떠난 현자'나 '떠돌이 마법사'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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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용감한 모험가'에 대한 이야기에는 이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경험과 행위 전체를 인식해야만 지혜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인생에 관한 완전한 몰두'는 중세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을 찾기 위해 나선 신비주의적 편력'이나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겪었던 모든 감각적, 성적, 철학적 영역으로 떠나는 여정과 같다. '성스러운 도시를 찾아 떠나는 순례는 이러한 사상을 반쯤은 의례적으로, 반쯤은 극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순례자는 문화의 '안전한 장벽' 밖으로 자발적으로 나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미지의 거룩한 땅'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정은 순례자의 인격을 확장하고 통합하고 성숙시키는 과정을 촉진한다. 이런 방식으로 진정한 '순례'는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최종 목표(예를 들어 성배)를 획득하지 못한다 해도 그 목적을 달성한다.
지혜를 얻으려면 일단 경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혜는 분명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이나 회피를 부르는 경험의 측면(그러므로 맞닥뜨리거나 처리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들)에는 사람의 정신을 뒤흔드는 속성이 있다. 의례적 순례보다 심리적 순례는 더욱더 그렇다.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순례는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자연적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경험 요소와 개인의 인격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이 내적 세계는 외부 세계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영토와 미지의 영토로 나뉘어 있다. 통과 의례로서 모험의 심리적 목적과 이런 모험이 현실이나 극에서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인격이 미지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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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할 때 발달하기 때문이다. 가장 두려운 장소로의 여정'은 물리적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세계에서도 감행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맥락에서 '정신적'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동안 부인하고 증오하고 맹렬히 억압해 온 주관적 경험 세계의 일면을 편력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적수의 땅, 어둠의 심장으로 떠나는 여정과 다름없다.
기존 신념 체계의 절대적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자연히 그 안에 포함된 악덕과 원한의 정의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즉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첫째, 대립하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둘째, 형이상학자들이 보증했던 저 대중적인 가치 평가와 가치 대립은 한낱 표면적인 평가가 아닌가. 그저 일시적인 관점은 아닌가.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화가들이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개구리의 관점은 아닌가. 물론 참되고 진실하며 이타적인 것이 가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더 고차원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가치는 어쩌면 기만과 이기심과 욕망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선하고 숭상할 만한 사물의 가치가 겉보기에 대립되는 악한 것들과 은밀히 연관되고 묶여 있으며 뒤얽혀 있고, 어쩌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607
원물질의 변형 가능성을 인정한 사람은 과거에 문화의 압력과 자기 선택으로 억압했던 개인적 경험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 경험에는 자신이 품었던 증오심, 욕정, 탐욕, 의심을 비롯하여 스스로의 잔혹하고 비겁하며 혼돈한 측면, 환상과 자유로운 생각과 재능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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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8. 그리스도와 현자의 돌의 '근원'인 혼돈의 용608
된다. 우리가 회피하거나 부인하는 것들은 현재의 해석으로는 우리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바로 그것이며, 열등하고 실패하고 부패하고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이 말은 곧 우리가 업신여기고 두려워하는 것, 증오하고 경멸하는 대상, 비겁함과 무자비함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 모두가, 즉 간절히 부인하고 싶은 모든 경험이 인생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융은 다음과 같이 썼다.
연금술사들은 대개 대립쌍들의 '총체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추구했고, 이 결합을 모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대립쌍을 하나로 결합시킬 물질을 만들 수단과 방법을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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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했다. 609
연금술에서는 '혼과 불꽃이 결합해야 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불꽃은 '어둠 속의 빛'이며, 제대로 통합되지 못한 혹은 서로 갈등하는 개인의 성격 요소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10 이 통합의 씨앗은 연금술 어느 과정에서라도 상징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연금술이 성공을 거두면 이후에 인격을 다스리게 된다. 이 중심(융이 말하는 '자기self611')은 둥글게 순환하는 나선형의 혁명적 길 위에서 여러 이질적 요소(별들의 충동)를 하나로 통합한다. 이렇게 등장한 중심에 대해 연금술사들은 메르쿠리우스 혹은 자기 몸과 피를 새끼에게 먹이면서 그리스도와 우로보로스를 동시에 상징하는 신화 속 '펠리컨’으로 간주했다. 이 중심은 또한 '집 짓는 자들이 버린' 현자의 돌로 간주되어 그 자체로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고, 안전을 보장하는 반석으로 여겨졌다. 이 돌은 움직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는 중심으로서 가부장적 원리와 모계적 원리(왕과 왕비)를 '통합하며, 혼돈이 낳고 질서가 기른 자식으로 간주되었다.
융합
편력으로 상징되고 극화된 온전한 인식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모든 요소를 통합하는 연금술의 마지막 절차인 융합의 무대가 된다. 융은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에서 '아리슬레우스의 환상'을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이야기의 형태로 나타난 이 환상 속에는 연금술의 모든 요소가 담겨 있다. 이를 분석하면 '융합'의 본질을 이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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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도움이 된다.
8세기 혹은 9세기 비잔틴 제국의 연금술사였던 아리슬레우스는 바다의 왕 렉스 마리누스와 함께했던 기이한 모험을 이야기한다. 그의 왕국에서는 어떤 것도 번식하지 않고, 누구도 자손을 보지 못한다. 게다가 거기에는 철학자가 없다. 오로지 같은 것들끼리만 짝지워져 있어서 생식도 일어나지 않는다. 왕은 철학자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뇌에 품어왔던 두 자녀, 타브리티우스와 베야를 짝지어 주어야 한다. 612
다음은 융의 해석이다.
타브리티우스는 남성적이고 정신적인 빛의 원리이자, 물리적인 자연의 포옹에 빠지는 로고스(그노시스의 누스와 같음) 이다. 613
여기서는 앞서 제시한 생각을 더 자세히 밝히고 있다.
누스는 신 안트로 포스와 동일한 듯 보인다. 그는 데미우르고스와 나란히 나타난 행성계의 적대자이다. 그는 천체의 원을 가르고 땅과 물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즉 자신을 원소에 투영하려 한다.) 그의 그림자는 땅에 떨어지지만, 그의 형상은 물에 투영된다. 이것은 원소의 사랑을 불붙게 하고, 그 자신은 기꺼이 계속 거기 머무르고 싶을 정도로 신적인 아름다움이 투영된 형상에 매료된다. 그러나 그가 땅을 딛기가 무섭게 자연은 그를 열정적인 포옹으로 가둔다.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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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물질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융의 해석을 이해해야 한다. 원물질은 남성적 원리인 정신과 여성적 원리인 물질을 담고 있다. 원물질은 사물의 근원이자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이고, 주체의 특징을 반영한 사물의 표상이다. 원물질은 단지 물질의 '근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원물질은 완전한 미지 그 자체이며, 정신은 탐험 과정에서 풀려나기까지 이 미지의 품 안에서 '잠잔다.
왕이.... 생기를 잃거나 왕의 영토가 불모지가 되었다면, 왕의 숨겨진 상태는 곧 일종의 잠복, 잠재된 상태를 의미한다. 바다의 어둠과 심연은(미지를 상징 보이지 않게 투사되어 있는 어떤 내용물의 무의식 상태를 상징한다. 그 내용물이 전체 인격에 속하고, 투사를 통해 겉으로 보기에만 그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 때는 의식과 투사된 내용물 사이에 항상 끌어당김이 일어난다. 보통 이러한 끌림은 매혹의 형태를 띤다. 그리하여 연금술에서는 이를 고립된 무의식의 심연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왕의 외침으로 비유했다. 의식은 이러한 요청에 응해야 한다. ....… 왕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지혜뿐 아니라 구원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미지'의 세계인 어두운 무의식으로의 하강이 반드시 필요하다. ....… 위험한 야간 항해의 목적이자 목표는 삶의 회복이자 부활이며 죽음의 극복이다. 615
아리슬레우스와 그의 가상의 동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물속에 잠긴 왕의 나라로 모험을 떠난다. 이 모험은 타브리티우스가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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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며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의 죽음은 오시리스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정신이 '물질', 무의식 혹은 미지로 완전히 하강했음을 상징한다(거기서 정신은 '드러나지 않고 '암묵적인' 상태로 '구조를 요청 하면서 자신을 구해 주는 자에게 부를 약속한다).
왕의 아들의 죽음은 당연히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다. 무의식으로 내려감으로써 의식은 소멸되는 듯 보이므로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 용에게 집어 삼켜지는 원시 영웅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다분히 의도적이고 타당한 이유도 없는 도발은 엄한 처벌이 따를 신성 모독 혹은 금기의 위반이다. 이에 따라 왕은 아리슬레우스와 그의 동료들을 왕의 아들의 시신과 함께 삼중의 유리로 만든 집에 감금한다. 영웅들은 바다 밑바닥 지하 세계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그곳에서 모든 종류의 공포에 노출되었고 80일 동안 극심한 열기를 견뎠다. 아리슬레우스의 요청에 따라 베야도 그들과 함께 갇힌다. '아리슬레우스의 환상Visio의 이본에서는 가둔 곳을 베야의 자궁으로 해석한다.)
분명히 그들은 무의식(미지)에 제압되어 무력하게 갇혀 있다. 이제까지 어두운 무의식과 죽음의 그늘 속에 묵혀 두었던 정신의 영역에서 새롭고 풍요로운 삶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 그들은 자진해서 죽음을 택한 것이다. 616
이와 같은 하강을 묘사하는 이야기의 '목적'은 “위험한 장소(바닷속 심연, 동굴, 숲, 섬, 성 등)에서만 얻기 어려운 보물(보석, 처녀, 생명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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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승리)'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17 융은 이야기의 해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자신을 너무 깊게 들여다볼 때 겪는 두려움과 저항은 실제로는 하데스로 향하는 여정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가 느낀 것이 저항뿐이라면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미지의 어두운 영역인 정신의 기저는, 파고들수록 더 위력적이고 매혹적으로 그를 유혹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심리적 위험은 인격이 기능적 구성 요소, 즉 개별적인 의식의 기능과 콤플렉스, 유전 단위 등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때로는 기능적 해체를 넘어서 정신 분열 증세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바로 아리슬레우스의 환상의 이본에서 가브리쿠스가 처한 운명이었다. 그는 베야의 몸속에서 원자들로 분해되었다. ...… 의식이 관여하지 않는 한 대립자들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대립자들이 활성화되면 왕의 아들, 정신, 로고스와 누스는 물리적 자연에 잡아먹힌다. ...… 영웅 신화에서 이 상태는 고래나 용의 배 속에 삼켜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곳의 열기는 대개 너무 강렬해서 (불안,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전쟁을 벌인 결과 영웅은 머리카락을 잃고 아기처럼 민머리로 다시 태어난다. . . 철학자는 '구원자'로서 지옥을 여행한다. 618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앞선 이야기에서, 섹스 마리누스에게 감금된 아리슬레우스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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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 베야는 죽은 타브리티우스와 함께 삼중의 유리로 만든 집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불타는 화덕에 던진 세 남자처럼 극심한 열기에 고통받는다. 다니엘서 3장 25절에 쓰인 것처럼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신의 아들과 같은' 네 번째 환상을 본다.
'셋과 하나로 이루어진 돌'이라고 명시된 문헌이 많으므로 이 환상은 연금술과 무관하지 않다. 이 돌은 네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 불은 물질 속에 숨겨진 정신을 표상한다. 없으면서도 있고, 늘 이글거리는 화덕이 주는 고통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네 번째 원소는 신의 현존을 상징하며, 연금술 작업을 돕고 완성한다.
아리슬레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꿈에서 스승 피타고라스를 보고 도움을 청한다. 피타고라스는 그들에게 '양분의 창조자'인 자신의 제자 하르포레투스를 보낸다. 이로써 작업은 완수되고 타브리티우스는 부활한다. 하르포레투스가 그들에게 기적의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는 오로지 루스카가 발견한 「베롤리넨시스 사본을 통해서 명백해졌다. 거기에는 『아리슬레우스의 환상』 인쇄본에 빠져 있는 도입부가 있다. “피타고라스가 말한다. 그대들은 이 귀한 나무를 심는 법과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주리지 않는다는 것을 후대를 위해 지금껏 기록해 왔고 또 기록한다. 619
하나의 분석 차원에서 본 연금술 작업의 목표는 만약 가능하다면 '미지'와 '기지'를 온전히 통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연금술 작업은 미지와 기지를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이 같은 연금술 작업에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
- 의미의 지도
818
된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첫 번째 목표는 위험과 열정과 관능이 도사리는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미지의 물질세계'를 질서를 부여하는 정신의 원리와 결합시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죽은 왕의 해체와 기적의 음식(미지의 유익한 측면이자 영웅)을 먹은 후 일어난 부활은 이 첫 번째 목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두 번째 목표는 통합된 정신 구조를 다시 체화하는 것, 다시 말해서 더욱 온전해진 정신을 의식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미지'를 통합하면서 얻은 통합이 단지 철학이나 추상적인 관념의 수준에 머무른다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의미이다. 통합이 잘 이루어진 정신은 반드시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행동하는 단계가 반드시 최종 단계인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연금술사 도른Dorm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명상의 철학이 정신을 통일하여 육체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통합을 이뤘다고 해서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지혜의 정신적 제자가 될 뿐이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두 번째 통합을 이루면 현자가 되고, 현자는 태초의 총체(잠재된 상태로 있는 세계의 총체와의 축복받은 세 번째 통합을 바라고 기대한다. 전능하신 주께서 모든 이가 그리 되도록 허락하시기를, 그리고 모두의 안에서 하나가 되시기를 620
도른은 융합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정신을 통일하여 육체를 극복하는 마음의 통합으로, 이것은 여러 동기(충동, 감정)를 탐험 영웅이 지배하는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두 번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19
째 단계는 이 통합된 마음이 몸과 (재)연합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영웅의 여정에 등장하는 두 번째 단계와 유사하다. 용과 전투를 치르고 보물을 얻으면, 영웅의 개인적인 여정은 끝이 난다. 영웅이 마침내 획득하기 어려운 보물'을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반드시 공동체로 복귀해야 한다. 이는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열반에 들기 전까지 열반의 상태에서 물러나 있으리라는 부처의 결심,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만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부처의 신념과 같은 것이다. 이 통일된 마음과 육체의 재결합은 적절한 태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따라서 영웅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기도 하다).
세 번째 단계는 이해하기가 꽤 어렵다. 왕이 된 재봉사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면 이 단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재봉사는 왕이 죽으면서 하늘에 구멍이 생기자 그 구멍을 꿰맸다.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 과정은 아무리 '외부의 행동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심리적인 과정이다. 통합된 영혼과 육체가 세계와 결합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경험이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인식 혹은 경험의 모든 측면을 자기와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경험의 '주체'와 '대상'을 나누는 결정적인 벽이 있다고 가정하지만, 그것이 '주관적 경험'이든 객관적 경험'이든 상관없이 경험의 모든 측면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그런 경험의 어떤 측면이든, (이를테면 '물질적 측면이든 '심리적 측면이든 혹은 '자기'이든 '타인'이든) 구원을 해낸다면 '하나님 나라' (심리적, 사회적 상태를 동시에 지칭)를 세우기 위한 행위로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따
820 · 의미의 지도
라서 영혼을 위한 일'과 '외부 환경을 위한 일'이 구별되지 않고, 나자신을 구원하는 일과 세계를 구원하는 일이 구별되지 않는다. 또는외부 세계를 온전히 만들려는 시도는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결국 이상을 진심으로 추구하려면 스스로를갈고닦아야 한다. 이는 자발적 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자기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모든 것이 경험이 된다. 자기나 세계 중 하나를구원하려는 시도는 곧 다른 편의 구원을 부른다.
이 세 단계의 융합은 대개 남성과 여성으로 간주되는 '대립쌍들의신성한 연합'으로 상징된다.
1. 기지(가부정적·영적 범주에 속하는 기존 지식) + 미지(모계 · 정서적 · 모성적 · 물리적 범주에 속하는 변칙) = 통일된 정신2. 통일된 정신(이 맥락에서 가부장적 영적 범주에 속함) + 육체(모계 물리적 범주에 속함) = 통일된 정신 - 육체3. 통일된 정신 - 육체(이 맥락에서 가부장적 영적 범주에 속함) + 세계(모성적 · 물리적 범주에 속합) = 통일된 정신·육체 세계
이 세 단계의 통합은 모두 근친상간 모티프(형제·자매, 아들 어머니,왕·왕비의 쌍)의 변주이다. 첫 단계인 '정신적 통합은 필요하고 가치있는 성취이지만 불완전하다. 두 번째 단계인 개인적으로 통합된 상태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계이다.
오. 마음이며, 그러므로 자신의 헛된 욕망을 잠재움으로써, 동정심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21
으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 모든 일에 그대의 몸이 그대와 기꺼이 함께하리라.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노력하리라. 그대의 몸은 그대와 함께 힘의 샘을 마실 것이고, 둘이 하나를 이룬다면 그대는 그들의 연합에서 평화를 찾으리라. 오, 몸이여. 이 샘에 가까이 오라. 그대의 마음과 함께 물리도록 마시고 나면 더는 갈증이 나지 않으리라. 오. 둘을 하나로 만들고, 적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이 샘의 경이로운 효능이란! 사랑의 샘은 정신과 영혼으로 '마음'을 만들지만, 이 샘은 마음과 몸으로 '한 사람'을 만드는구나. 622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융합의 세 번째 단계이다. 철학적 지식과 질서 정연한 정신의 구조를 획득하고 그것을 몸으로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이 체화된 전체 구조는 세계로 확장되고, 세계는 '경험의 한 측면'으로서 자기와 동등하게 취급(동일시)되어야 한다.
연금술의 절차는 '물질'을 현자의 돌로 바꾸어 구원하려는 시도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물질이 창세기」 속 인간처럼 본래 타락한 상태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연금술사들은 물질의 부패와 한계를 뒤바꿀 방법을 연구하면서 신화적 절차를 떠올렸다. 이 절차는 모든 발전된 종교의 토대를 이루는 '길'의 양식을 따랐다. 공식적인 기독교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입장을 수용했으며, 그 희생에 대한 '믿음'은 구원을 보장했다. 연금술은 미지로 남아있는 것을 추구하며 기독교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 영웅적인 과정에서 연금술사 자신이 변화되었다.
822 · 의미의 지도
기독교의 믿음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 죄에서 해방된다.고 보는 데 반해 연금술사는 '원래의 부패하지 않은 본성을 그대로 회복'하는 것은 여전히 연금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불완전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의 군주'가 전처럼 자유로이 악행을 저지르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이 연금술사의 의견에 공감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영적 교회에 충성을 서약한 연금술사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성령의 '순결한 그릇'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관념을 구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623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현하겠다는 목표는 굉장히 놀라운 목표이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을 신념 이상의 것으로, 훨씬 더 무시무시하고 훨씬 더 희망적인 것으로 만든다. 변형을 위한 연금술의 절차는 영웅과 영웅의 구원 신화, 즉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른다. 연금술의 핵심 사상은 압제를 거부하고 믿음을 가지고 이상을 추구하며 무시무시한 미지를 자발적으로 좋으면, 가장 심오한 종교적 신화 속에서만 발견되는 엄청난 변화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우주의 아들, 곧 신적 힘과 세계를 의미하는 신적 우주Theocosmos(안타깝게도 유수한 대학에서 세속적 정신으로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교수와 의학의 창시자 들 다수가 그 존재를 오늘날까지도 부인한다.)는 이 돌의 예시이며, 신이면서 인간인 신인神人. Theanthropos이다(성경은 교회의 집 짓는 자를 넉시 이 돌을 버렸다고 말한다), 그 돌로부터, 그리고 대우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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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자연이라는 책으로부터, 현자와 그의 자녀들을 위한 지속적이고 영원한 원칙이 출현한다. 사실 이 원칙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꼭 닮아 있으며,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한 대우주(기적적인 수태와 탄생, 형언할 수 없는 능력과 미덕과 영향력)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성경에 담긴 자기 아들의 역사와 더불어, 자연이라는 책 속에 구체적인 심상과 자연스러운 표상을 창조하셨다. 624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가부장적 체계인 일신교가 미지와의 접촉을 통해서 발전했듯이 연금술사는 미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변화를 경험한다. 이는 여러 신화 속 영웅들이 자기 삶을 개선하기 위해 미지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일 때 보이는 본능의 작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금술사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든 측면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로 결심할 때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연금술 문헌에 등장하는 연금술사의 수난은 진실이지만, 라피스가 화학적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연금술사가 겪는 수난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지의 것을 자기 희생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진지하게 조사함으로써 무의식의 보상적인 내용물에 개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경험이다. 그는 투영된 내용물이 교리의 심상과 닮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사실 본능적으로 활용했을 공산이 크지만), 또 화학적인 절차를 설명하려면 자신에게 익숙한 종교적 개념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824 • 의미의 지도
생각하려는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연금술 문헌들은 이와 반대로 연금술 작업의 실제 경험은 교리에 동화되거나 교리와 함께 작업 자체를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625
기독교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영이 물질로 하강하여 결합한 결과로 탄생한다. 기독교의 일방적인 관점을 보완하는 연금술에서는 물질이 정신으로 상승해서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스도와 꼭 닮아있는 라피스(현자의 돌)가 만들어지고 추상적인 물질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다. 라피스는 가장 모순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비천하고, 값싸고, 미숙하며, 쉽게 변하는 동시에 완벽하고 귀중하며단단하고 오래 지속된다. 모두에게 보이지만 신비롭고 귀중하며, 어둡고 숨겨져 있지만 명백히 드러나며, 하나의 이름과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라피스는 또한 새로워진 왕, 늙은 현자인 동시에 어린아이이다. 늙은 현자는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 즉 지혜의소유자이다. 아이는 인간 안에 있는 창조적 정신과 가능성, 성령을나타낸다. 라피스는 무지한 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순수함이다. 그는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나 역사에 앞선 존재이다.
아이는 버림받고 벌거벗겨졌지만 신성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보잘것없고 불확실한 시작이며 영광스러운 결말이다. 인간 안에 있는 이'영원한 아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내적 모순이고 결함이며 신성한 특권이다. 한 인격의 궁극적 가치 혹은 무가치를 결정짓는형용할 수 없는 존재이다. 626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25
연금술사들이 추구하는 최후의 가치는 바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 구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통합된 주관적 존재로서 미지의 물질세계에 내재한 가능성을 다루면서 자기 존재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신화의 영웅처럼 통합된 정신을 형성하고, 이 정신을 자신과 다름없는 세계에 구현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곧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다시 말해 자의식이 부분적으로 출현한 결과로 나타난 '타락한 세계'를 위한 '해독제' 이다. 라피스는 '변형의 매개체'로서 세계를 구원하는 신화의 영웅과 같은 존재이며, 비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라피스는 영웅이 만들어 낸 그 어떤 구체적 결과물보다 영웅 자체가 귀하듯 황금보다 더 귀하다.
연금술은 개인이 구원자가 되는 살아 있는 신화이다. 기독교 교단은 밖에 있는 진실을 숭배하는 것이 곧 구원받는 길이라고 주장한 탓에 스스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연금술사는 이러한 기독교 교리의 오류를 발견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구원자를 숭배하기보다 구원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구원의 신화는 신화를 관념적 차원에서 믿는 게 아니라 신화를 수용하고 실행할 때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스도가 신인 동시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신화를 제대로 믿으려면 자기 인격의 한계 안에서 영웅의 신화를 실제 삶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자발적으로 존재의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하나의 가슴속에 '대립하는 것들을 통합하며, 기지와 미지라는 영구적이고 창조적인 힘들 사이를 적극적, 의식적으로
· 의미의 지도
826
중재하는 중재자로 살아야 한다.
삶을 바꾸는 작은 결정들
깊은 슬픔이 담긴 저 베일에 싸인 눈빛, 실패할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심결에 배어 나오는 내면을 향한 그의 눈빛, 어디서라야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눈빛은 탄식이다. “내가나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눈빛이 탄식한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지. 나는 나야.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이 아닐 수 있겠어?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이 신물이 나!"
그런 땅 위에서, 그런 늪지대에서 온갖 잡초와 독초가 작게 숨어서, 거짓되고 지나치게 달콤하게 자라난다. 여기로 앙심과 적의를 품은 벌레들이 떼 지어 모여들고, 비밀스럽게 은폐된 것들로 구린내가 난다. 이곳에는 가장 악의적인 음모, 성공한 승자들을 향한 고통받는 자들의 음모가 거듭해서 거미줄을 친다. 이곳에서 승자는 증오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증오가 증오라는 것을 가리기 위해 어떤 거짓된 말들이 오가겠는가! 이 얼마나 거창한 말과 가식적인 행동이며, 얼마나 '대단한 비방의 기술인가 말이다! 이런 실패자들의 입에서 얼마나 고귀한 웅변이 나오겠는가! 지나치게 달콤하고 교활하며 변변치 않게 알랑거리는 저 눈을 보라! 저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가? 적어도 정의, 사랑, 지혜, 우월성을 자신이 드러내겠다는 야심, 이것이 바로 이 '가장 비천한 자들의 야심인 것이다. 그런 야심이 그들을 얼마나 능숙하게 만드는지!이 위조범의 기술은 또 얼마나 놀라운지 그들은 덕의 각인뿐 아니라 덕의 울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27
림까지, 그 그윽한 울림까지도 위조한다. 이 나약하고 절망적인 병자들은 덕을 독점한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만이 선하고 의로운 인간이다.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은 우리뿐이다. 그들은 마치 건강, 성공, 힘, 긍지와 강인함이 언젠가 혹독하게 대가를 치러야 할 부도덕한 것이라도 되는 양, 우리에게 경고하듯 비난하며 우리 사이를 지나다닌다. 내심 그들은 얼마나 기꺼이 승자가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자 하며 얼마나 간절히 사형집행인이 되기를 갈망하는가.627
제프리 버튼 러셀의 '메피스토펠레스, 근대 세계의 악마 628를 읽다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대한 논평을 읽게 됐다. 러셀은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반의 논거가 어쩌면 무신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일지 모른다고 평했다.
이반이 1876년 당시의 일간지에서 뽑아 온 악의 사례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사냥개들을 시켜 소작농 소년을 그 어머니 앞에서 찢어발기게 한 귀족, 힘들어서 버둥거리는 말의 유순한 눈'을 채찍으로 후려친 남자. 어린 딸이 용서를 빌며 벽을 두드리는데도 밤새 얼음장같이 추운 변소에 가두어 놓은 부모, 반짝거리는 총으로 아기와 놀아 준 후에 바로 그 총으로 아기 머리를 박살 낸 터키 병사, 이반은 이토록 끔찍한 일이 매일 일어나며 끝없이 증폭될 수 있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을 예로 든 건 문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야. 이 지구를 흠뻑 적시고 있는 나머지 인류의 눈물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으마. 629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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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또 다음과 같이 썼다.
악과 신의 관계는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의 시대에 다시 한 번 철학적, 신학적 논의의 중심을 차지했다. 악의 문제에 관해서는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신은 온전히 선하다. 그처럼 선한 신은 악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의 존재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주제는 거의 끝없이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 문제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매우 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신이 자기가 아끼는 모든 것. 즉 소유, 위안거리, 성공, 직업, 기술, 지식, 친구, 가족, 생명을 다 앗아간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이런 신은 대체 어떤 신이란 말인가? 제대로 된 종교라면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하며, 죽어 가는 아이들 앞에 내놓을 수 없다면 그 어떤 답도 신뢰할 수 없다. 630
인간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정당화한다. 또 인간이 잔인한 이유는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이 인간의 영혼을 일그러뜨렸다며 신과 신의 창조 행위를 탓한다. 그러면서 내내 자신이 환경의 무고한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죽어 가는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면 무슨 말을 건네겠는가? 아마너는 할 수 있다고, 네 안에는 이 일을 감당할 만큼 강한 힘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나약하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삶을 부정하고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임상심리학자로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29
두 내담자가 있다. 그중 한 사람은 서른다섯 남짓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쉰 살은 돼 보였고, 볼 때마다 내가 상상했던 중세의 소작농을 연상케 했다. 옷과 머리와 치아가 몇 달은 제대로 씻지 않은것처럼 지저분했고 지나치게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녀는 자기보다.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등을 구부리고마치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거의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
그녀는 예전에 몬트리올에서 외래 환자로 행동치료를 받은 적이있어서 클리닉의 상근 직원이라면 모두들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의평소 행동 습관 때문에 거리를 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여겨 피해 다니는 지경이었기에 그런 습관을 고치는 행동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눈을 가리지 않고, 똑바로 앉고 서는 법을 배웠지만 클리닉을 떠나자마자 오랜 버릇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어쩌면 생물학적 문제로 지적 장애가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환경이 이러한 무지의 원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문맹이었고,심각한 질병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는 고령의 이모와 어머니(어머니에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남자 친구는 폭력적인 데다 알코올에 중독된 조현병 환자였는데, 그녀를 심리적, 신체적으로학대했고 매일같이 악마에 대해서 떠들어 대면서 그녀의 순박한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아름다.움도, 지능도,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도, 기술도, 창조적인 직업도, 그무엇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문제를 해결하거나 영혼의 짐을 덜거나 혹은
1830 - 의미의 지도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학대와 괴롭힘을 당하는지 이야기하려고 클리닉에 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자 찾아왔다. 내가 인턴으로 일하던 클리닉은 대형 정신병원과 연계되어 있었다. 60년대에 정신과 치료가 지역사회 중심의 치료로 변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병원에 남은 환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녀는 그 병원에서 몇몇 제한된 형태의 자원봉사를 해 왔는데, 어느 날 자기가 환자들과 말벗이 되어 바깥 산책을 시켜 주고 싶다고 했다. 내 추측으로는 그녀가 자신이 기르던 개를 매일 산책시켰고 그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 같다. 그녀의 부탁은 단지 그녀가 바깥에 데리고 나갈 수 있는 환자를 찾아 주고, 병원에서 이 일을 허락해 줄 사람을 알아봐 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돕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론에 반하는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그 이론이 틀렸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대체로 이론은 쉽사리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유용하며 다시 만들기는 너무 어려워서 이론에 반하는 증거가 받아들여지려면 일관되고 신빙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여성은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그녀는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환경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더 정신병에 시달릴 운명이었다. 그녀도 때로는 애완견을 걷어차거나 아픈 이모를 무례하게 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단 한 번도 앙심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31
을 품거나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소박한 바람이 좌절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가 성자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정도로 그녀를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불행한 환경과 무지한 삶 속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고 자기 외의 것을 돌아볼 수 있었다. 왜 그녀는 타락하지 않은 것일까? 잔인해지거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거나 우울해지지 않은 것일까?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적절한 선택을 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사랑할 줄 아는 고통받는 인류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모든 천사와
영체들도, 바로 선 자와 넘어진 자들도 만들었느니라. 자유가 아니라면, 그들의 참된 충성과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꼭 해야 할 일만 나타날 뿐
그들의 의지로 하는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런 복종으로 인해 그들이 어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나는 또 어찌 기뻐 하겠는가
의지와 이성(이성은 또한 선택이라.)이
소용없고 헛되다 하여 자유를 앗고,
수동적으로 만들어 나 아닌 필연을
따르게 한다면? 그들은 정의에 속하도록
832 - 의미의 지도
1. 창조되었으니, 그 창조주도, 그들을 만듦도
그들의 운명까지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치 운명이 절대적 섭리와 높은 예지로
그들의 의지를 지배했다는 듯이.
1 그들의 반역을 명한 것은 그들 자신이지
내가 아니다. 내 미리 알았던들,, 그 예지는 그들의 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그 죄는 어떤 예지가 없더라도 드러날 것이었으니.
그러니 운명의 최소한의 충동이나 일말의 징조도 없이, | 아니면 내 불변의 예지로 인한 어떤 것도 없이..
그들은 판단하고 선택하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 죄를 저지르고 고안해 낸다. 그렇게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니 | 스스로 노예가 되기까지는 자유로우리라.
아니면 그들의 본성을 바꾸고, 자유를 명한 영원불멸의 높은 섭리도 폐지해야 하리라.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타락을 정하였노라. 631
또 한 사람의 내담자는 다른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하던 조현병 환자였다. 처음 나와 만났을 때 그는 스물아홉으로 당시 나보다 불과 몇 살밖에 더 많지 않았으며, 7년간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항정신병 치료제를 투약 중이었고, 컵받침이나 연필꽂이 따위를 만드는 작업치료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33
고 손재주도 없었다. 당시 내 상사는 그에게 지능검사WAIS-R632를 실시해 보라고 했다 (진단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내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에게 토막 맞추기 검사를 실시하려고 흰색과 빨간색 블록을 주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블록들을 배열하여 카드의 그림과 똑같은 모양을 만드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는 블록들을 집어 들고 책상 위에서 이리저리 짜 맞추기 시작했고 나는 바보처럼 초시계를 들고 시간을 잤다. 그는 가장 쉬운 단계조차 해내지 못했다. 계속 다른 데 정신이 팔렸고 좌절했다. 내가 "왜 그러시나요?" 하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머릿속에서 지금 선과 악이 전투를 벌이고 있어요."그 시점에서 나는 검사를 그만두었다. 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 고통을 겪고 있었고, 이 검사는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것 같았다. 그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확실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더 이상 검사를 진행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해 여름 나는 그와 종종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처럼 대놓고 정신이 나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병동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종종 병원 마당에 함께 나가 산책하기도 했다. 그는 1세대 이민자의 셋째 아들이었다. 첫째 형은 변호사였고 둘째 형은 의사였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큰 기대를 품은, 근면하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그는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연구하던 중이었다(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연구 분야가 면역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들은 그가 따라가기 벅찬 선례를 남겼고, 그는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진행하던 실험에서 기대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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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시점에 졸업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실험 결과를 조작해서 학위 논문을 썼다.
|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논문을 마치던 날 밤에 일어나 보니 악마가 침대 발치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정신병이 발병해 그 후로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이 사탄의 환영이 생물학적 취약성에 스트레스가 더해진 결과 정신 장애가 일어나면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죄책감으로 인해서 도덕적 악에 관한 문화적 개념이 의인화되어 그의 상상 속에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두 가지 설명 모두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악마를 보았다는 사실과, 악마의 환영이 따라다니며 그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는 자기 환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두려워했지만 내가 그를 세심하고 주의 깊게 대한 후에야 그 환상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그는 결코 과장하거나 내게 깊은 인상을 주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명백히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때문에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진 그 환상으로 인해 떨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살하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병원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편집 망상이다. 도대체 누가 왜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단 말인가?
| 그가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당시는 냉전 시대였다.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핵무기를 사용해서 고의로 인류를 전멸할 가능성이 지금보다는 더 높다고 여겨지던 때였다.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 중에도 핵 위협을 핑계로 삶에 충실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은 모든 게 곧 끝날 것이기에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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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짓에도 조금은진실된 공포가 깃들어 있었고, 수많은 미사일이 세계 곳곳을 향하고있다는 생각은 기만적인 사람과 정직한 사람 모두에게서 믿음과 활력을 앗아갔다.
이 환자는 자신이 실제로 세계를 파괴할 악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병원에서 풀려나면 미국의 국경 남쪽에 위치한 핵미사일 격납고로 가서 마지막 전쟁을 개시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병원 밖 사람들이 그를 사살하려고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 이야기를 들려주긴 했지만 그는 당연히 내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자기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도그를 죽이고 싶어 할지 모르지 않은가.
대학원 동료들은 내가 이런 부류의 환자를 만난 것이 신기하다고생각했다. 내가 특이하게도 융의 사상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때마침 내가 이런 종류의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과 이야기를나누게 된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망상을 어떻게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망상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그 망상 때문에 그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지만, 나는 그 망상에상징적 진실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가 선과 악 사이에서 내린 선택과 당시 세계를 물들였던 공포는 서로 관련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그가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에, 핵전쟁의 가능성이 불러온 공포에 실제로 그의 책임도 있다고 암시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힘없는 한 개인의 행동이 전 세계의 역사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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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렇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동안 나는 악에 관하여, 또 악이 어떻게 자라나고 실현되는지 배웠기에, 우리 각자가 순수하거나 악의 없는 존재라는 걸 믿지 못한다. 물론 60억 티끌 중 하나에 불과한 먼지 같은 한 사람이 인류가 마주한 무시무시한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는 그런 사건 자체가 논리에 전혀 맞지 않게 일어나는 데다 우리가 그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신이(적어도 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바로 선한 신이 이 세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적(질병과 재해), 도덕적 (전쟁과 대학살) 악의 존재를 허락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는 무신론을 넘어서 실존하는 세계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어쩌면 온 우주는 한 아이의 고통만큼도 가치가 없을지 모른다."고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어떻게 우주가 아이의 고통을 허용하는 곳으로 창조되었는가? 어떻게 선한 신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세계의 존재를 허락할 수 있는가?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답은 일정 부분 악을 주의 깊게 분석해보면 얻을 수 있다. 먼저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을 구별해야 한다. '인생의 비극적 조건'과 '의도적으로 자행된 위악'을 같은 범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조건에 예속된 비극에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고, 그런 측면은 위대한 문학과 신화에서 끊임없이 활용되었다. 반대로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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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악은 고귀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순전히 무고한 고통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면 인격은 파괴된다. 반면 진솔하게 비극을 맞닥뜨리면 인격은 고양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고 거기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온전한 동일시를 구현했다.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동일시 덕분에 그리스도는 자기 운명을 견뎌 내고 거기서 악을 제거할 수 있었다. 반대로 자기 인격을 스스로 격하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비극적 조건을 악으로 뒤바꾸고 만다.
하지만 인생은 왜 비극적일까? 왜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는가? 고통과 질병과 죽음, 자연과 사회에 의해 자행되는 잔인한 사건에 예속되어야 하는가? 왜 모두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려면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든 답을 얻어야 한다.
내가 얻은 최선의 답, 내게 도움이 된 답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전제 조건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경기는 규칙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리고 규칙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물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도 말해 준다. 어쩌면 세계도 한계와 규칙이 없이는 세계로 존재할 수 없는지 모른다. 삶도 고통스러운 한계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바라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면, 만약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모두 대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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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도구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전지하고 불멸한다면, 모두가 전능한 하나님이 될 것이고 창조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구체적인 한계로 인해 생기는 사물들 간의 차이 때문에 만물이 존재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해도, 만물의 존재가 곧 그 존재의 타당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세계는 존재해야 하는가? 모든 경기를 중단시키는 게 나을 만큼경험의 전제 조건이란 것이 너무나 끔찍하지는 않은가? (이 세상에 경기 중단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부지런히 나아가는 사람들이 부족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내 생각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할 때 무의식적으로이 질문에 답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우는 것이아니라 그들을 잃었기 때문에 운다. 이 슬픔은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판단을 전제로 한다. 그 슬픔에는 누군가 사랑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한계가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의 삶이 소중하며 (불완전하고 나약한 모습일지라도) 그것이 계속해서 존재했어야 한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만약 불가피한 한계가 그와 같은 고통을 낳는다면 도대체 만물이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신의 본성에 대한 질문과, 그가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데 대한 책임을그에게 묻는 행위를 유보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 자신의 인격을 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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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지키고 계발한다면, 주어진 모든 재능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의 공포를 견뎌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세계는 어째면 그다지 끔찍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나는 2차선 고속도로를 따라 걸어서 같은 계곡을 하나오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내가 자란 앨버타에 뒤치하고 있었고, 나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몇 킬로미터의 골짜기 사이를 빠져나웠다. 이후 히치하이킹 중인 한 남자를 지나치자 자리에또 다른 사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이제 노선에 어었지만 여괜히 매우 강인해 보이는 사내었다. 예방향에서 자를 고지나치던 한 여생이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저 사람 칼을 찾을 들고 있어요.그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식칼을 들고 있었다. 최고 세이 했지만칼날이 속리 75 센티미터는 보였다. 등 뒤에는 가죽으로 만든 까다란 칼집을 메고 있었다. 그는 찾을 아무렇게나 두 앞을 중거리면서 고속도로 가장 자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는 대학원생이던 내가 트리올의 가난한 동해에서 살아하던 시절, 바로 옆집에 살던 집주인처럼 보였다. 집주인은 짧은 시절폭주족이었던 강인하고 나이 든 사세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과거그 지역 폭주족들의 우두머리였고 젊은 시절 한때 감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대체로 그러하듯 어찌 저찌 자리를 잡았고 오랫동안 술도 자제해 왔다. 하지만 내가 거기 살던 때 그의 아내가 자살을 했고 그 후 그는 예전처럼 다시 거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잦은 폭음으로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전기 가게를 운영하며 번 돈을 모두 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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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하루 만에 매주 4~10개을 하시고 만취하여 키우던 개에게 으로 렁거리고 썩썩였다. 할은 두서가 없었고, 여전히 사람은 좋았지만 아주 사소한 도발에도 폭력적으로 하는 상대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그가 나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배우고 집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많은 거리에서도 제트기의 가속 성능을 발화하는 혼다 1200 오도바이 뒷자리에서 나는 너무 작아서 아무에도 쓸모없는 그의 아내.의 행을 우스꽝스럽게 머리 위에 있고는 위대를게 매할려 갔다. 술에 취하면 그는 완전히 파괴적인 사람으로 변했고, 임없이 싸움을 뜻이 본 했다.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이 조금만 부주의한 말을 해도 그가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었기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발걸음을 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해 보이는지 모르는 듯 아무도 그를 태워 주지 않는다고 거었다. 내가 지나쳐 가자 그는 나를 보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내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같이 걷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나는 쉽사리 그보다 앞서갈 수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칼을 휘두르던 사람과 나는 이제 거대한 나무의 반대편에 있었다. 지름이 100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였고, 까마득한 아래쪽에서부터 나선형 계단이 줄지어 올라와서는 그만큼 먼위까지 이어져 있었다. 실은 새상의 낡은 나무 제단은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다녔고 나중에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던 교회의 긴 나무 의자를 연상시켰다. 그는 나를 찾았지만 나보다 훨씬 뒤쳐져 있었고, 나는 계단을 오르며 그가 보지 못하게 내 모습을 숨겼다. 나는 아까처럼 계곡을 빠져나와 주위의 평원으로 가는 평탄한 길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칼에서 멀리 벗어날 길은 계속 계단을 따라서 세계의 축 위로 올라가는 길 뿐이었다.
이처럼 죽음을 의식할 때만, 다시 말해서 신의 무서운 얼굴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의식을 충분히 고양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견딜 수 있다.
인간적 한계의 핵심은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한계의 무게를 짊어질 만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외면하고 타락하는 까닭은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생에 필요한 존재의 비극적 조건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생을 진정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지진이나 홍수나 암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견 더 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고결하고 품위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인생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타락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안기는 무의미한 고통, 우리 자신의 악이다. 그렇다면 악을 저지르는 능력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여섯 살 난 딸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왔다. 요즘은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피아노 연주법에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다는걸 가르쳐 주고 있다. 올바른 연주법은 매 소절, 음표 하나하나, 모든 소리와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몇 주 전 교습 시간에 딸아이는 리듬의 의미를 힘들게 배웠다. 힘들다는 게 무
842 · 의미의 지도
슨 의미냐고? 그러니까 딸아이는 피아노에 앉아서 너무 열심히 연습을 하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피아노를 배우는 데 관심이 컸던 것이다. 딸아이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또 혼자 메트로놈을 사용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연주했다. 어제 나는 딸아이에게 강하게 연주하는 것과 여리게 연주하는 것의 차이를 가르쳤다. 딸아이는 내얘기에 흥미를 보이더니 집에 있는 낡은 피아노의 건반을 하나하나 두드리며, 속삭이는 듯한 음색을 내려면 건반을 어느 정도 세기로 눌러야 하는지 주의 깊게 실험했다.
딸아이에게 피아노 교습을 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꿈의 일부분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행동경로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에 가치가 생긴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신념이 현상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결론은 고려하지 못했다. 만약 신념이 가치를 결정한다면,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선과 악사이의 거리이다. 행동 경로가 더 가치 있는 것일수록 다시 말해서 악하기보다는 선한 것일수록) 그 길에는 더 많은 긍정적 정서가가 담긴다."이 말은 곧 선과 악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치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현상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물론 나는 그들이 선과 악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그렇게 대한 건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그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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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은 톨스토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잔인하고 무의미한 농담" 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노력과 일에 참된 가치가 있다는 중거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의 무게는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가치는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 사이에 펼쳐진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 A와 B는 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이 두 지점은 두 지점 사이의 선을 정의한다. 이 두 지점의 극성이 곧 목표의 가치를 결정한다. 두 지점이 서로 다르면 다를수록(즉 둘 사이의 긴장이 더 클수록) 목표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선은 악이 없으면 정의할 수 없고, 존재하지도 못한다. 가치는 선과 악 사이의 차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가 가치 있는 곳이 되려면 (두 가지 길 사이의 선택이 진정한 선택이 되려면)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항상 선만을 선택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그러면 악은 잠재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악이 순전히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면, 세계는 가치 있는 곳이 될 수 있고 그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짊어져야 할 짐도 견딜 만해질 수 있다. 모두가 올바르게 행동하기로 선택한다면 가능하다. 이것은 여태껏 내가 떠올린 가장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오류를 제거할 수 있을까? 어떤 길을 따라가야 스스로의 맹목과 무지를 벗어던지고 빛 가까이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했다. 633 하지만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늘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본디오 빌라도의 역설적인 질문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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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38절) 앞에서 멈춰 서고 만다.
정확히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탐욕과 욕망은,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누가 봐도 실재하는 경험을 부정하는 것도, 타인을 그저 고통에 빠뜨리기 위해서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명백하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행동부터 멈추고 자기 인격을 수양하며 더 정직하게 살면 어떨까. 그러면 그 어느 때보다 선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고통스러우리만큼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서 그걸 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온 마음과 행동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은 그 무엇보다 진리를 섬기라는 뜻이며, 주위 사람을 자기처럼 대하라는 뜻이다. 상대의 자존심을 꺾는 동정심으로가 아니라, 상대보다 자신을 높이는 정의로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여전히 빛을 볼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서 존중하라는 뜻이다.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진리이다.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나라를 다스리려 든다. 거리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에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마당에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은 너무 시시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을 고치는 것보다 자기 인격을 단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계를 고치겠다는 운동은 대부분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사랑을 가장한 이기심과 지적 자만이며, 올바르기는 하되 그 무엇도 올바로 바로잡지 못하는 행위들로 세계를 오염시킨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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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사이에서 우리가 매일 내리는 작은 결정들이 세계를 파괴하고 희망을 절망으로 뒤바꾼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지만 우리에게 한없이 선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거짓말을 그만둔 한 사람이 폭정을 무너뜨린다."는 솔제니친의 말에 과연 어느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으나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634 우리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계를 지옥으로 뒤바꾸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자기 기만과 비겁함과 증오와 두려움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런 식의 가정을 세워 보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은 다른 가정들만큼이나 훌륭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실험을 해 보고 그 가정의 진위를 가려 보는 건 어떨까?
| 관심에 깃든 신성
기독교의 중심 사상은 정통파의 종교가 진부해져 버린 시기에 순전히 심리학적 원리에 따라 발전해야 했던 그노시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집단적 지배 사상이 붕괴하면 무의식적인 개별화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나타나는 상징을 인식하면서 그노시스 철학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순간에는 새로운 지배사상을 형성하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성한 원형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히게 된다.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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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식적 원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모습으로 발현된다. 그들은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내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이 원형을 구체적 예시로 보여 줌으로써 예언자나 개혁가가 된다.
기독교 신화의 원형적 내용물은 많은 사람의 불안하고 절박한 무의식을 만족스럽게 표현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화는 여론의 합의에 의해 문화를 지배하는 보편 진리로 격상되었다. 물론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보다 더 효과적인, 비합리적 사로잡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을 뻔했던 원형적 힘을 막는 수호자의 상징이자 부적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그러한 일은 이미 일어났으나, 이제 너희가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기독교 사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고, 지금도 일어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지배하는 사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는 구원에 이르는 정도가 아닌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불멸의 근원을 경험하고자, 지칠 줄 모르는 무의식의 유혹을 따라, 마치 예수처럼, 광야에서 자신을 찾고, 어둠의 아들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늙은 연금술사는 그리고 그는 성직자다!) 기도한다. “마음에 깃든 참혹한 어둠을 몰아내소서. 우리의 감각에 빛을 밝히소서!” 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47
문장을 작성한 사람은 연금술 작업의 첫 단계인 흑화를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연금술사는 우울한 감정을 느끼며,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와의 조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심리치료 현장에서 다시금 집단 무의식의 살아있는 원형을 만나게 된다면, 이는 종교가 커다란 위기를 맞을 때마다 흔히 관찰되었던 현상이 재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은 개인을 지배하던 사상이 그 의미를 잃을 때 개인 내부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의 예가 『파우스트」에 묘사된 지옥으로의 강하인데,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연금술 작업을 의미한다.
그림자로 인해 야기된 대립의 문제는 연금술에서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먼저 대립이 일어난 후에야 대립쌍의 통합이라는 연금술의 마지막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최상위 대립쌍인 남성과 여성(동양의 음과 양)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결코 부패하지 않는 불멸의 합일체로 용해된다. 635
아버지께.
언젠가 아버지께 제가 쓰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겠다고 약속했지요. 지난달에는 책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늘 이 책을 염두에 두고 있고, 다른 일을 하면서 배우는 모든 것이 이 책과 관련이 있지만요. 하지만 잠시 책 쓰는 일을 쉬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아버지께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의미의 지도
848
아직도 전 제가 왜 이 책에 매달려 왔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던 3, 4년 전에 비하면 더 잘 이해하게 됐지만요. 책을 쓰기 3, 4년 전 저는 전쟁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었고, 인류의 멸망을 주제로 한 끔찍한 악몽을 자주 꾸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대학살에 관한 관심은 저 자신의 삶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고, 개인적 차원에서 인생의 의미에 관한 관심이, 죽음에 대한 사색과 더불어 인류의 가치와 인생의 목적에 대한 관심으로 조금 더 일반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칼 융은 인간이 서로 많이 닮아 있기에 모든 개인의 문제가 사회와 관련이 있으며,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해결책은, 그 해결책이 서로 소통될 수 있다면 미래에 다른 누군가가 같은 문제를 겪게 될 가능성을 줄여 준다고 말했습니다. 636 이것이 개인과 사회가 서로 상생하는 방식입니다. 이렇듯 죽음의 문제를 조금 더 보편적인 차원에 적용하면서 생겨난 전쟁에 대한 제 관심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생의 의미에 관한 개념과 사상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이 개념과 사상들은, 그것을 제대로 배우기 전에는 저 자신과 관련이 있다거나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고, 대다수 사람들이 흔히 정상과 광기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전쟁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라고 믿습니다. 서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인간 집단이고 집단은 정치에 빠지기 마련이기에, 이 믿음은 근거가 있으며 실제로도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없을 만한 곳에서 진리를 찾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자기 인생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49
을 책임 있게 사는 대신 국제 정치에 관심을 갖고 '대의'를 좇는 현상은바로 이렇듯 진리를 찾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 참된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압도한 증거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찾지 않으려 하는 까닭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믿음 없이 만든 사회 체계와 그 체계가 보장하는 거짓 위안을 진리가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환상의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를 동시에 살아갈 방법은 없고,흔히 환상을 파괴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시대의 산물이기에 저 역시 찾고자 하는해답을 다른 모든 이들이 해답이 있다고 믿었던 정치학에서, 집단행동을 연구하는 정치학에서 찾았습니다. 신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정치학을공부하던 몇 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러다 저는 사회주의 같은 사상체계를 문제에 적용하는 일과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상 체계를 어떤 문제에 적용시키려다 보면 결국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게 됩니다. 그 대상은 부자, 미국인, 백인, 정부, 사회 체제 등 내가 아니기만 하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지요.
그리고 저는 국제적 차원에서 제기된 문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그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 아니라 내버려 두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만약 이 문제를 풀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이는 곧 사람들이 전부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저 자신도 포함되겠지요. 제 추측은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이 심각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
- 의미의 지도
850
5-7 대립하는 형제들
다. 인류가 마주한 문제가 더 근본적인 것일수록 제 생각의 오류도 더 근본적인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저는 전쟁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제가 살아남아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던 모든 생각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많은 것들을 믿어 왔지만, 제가 뭘 믿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거나 설령 안다고 한들 그걸 믿는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머릿속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는 제가 믿는 모든 신념을 좌우했는데, 애초에 제가 누구인지, 역사 속에서 무엇이 만들어졌고 그 역사의 창조물에 제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어느 정도 안다고 가정했던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교만이었습니다.
해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저는 저를 공포에 떨게 하고 저로 하여금 끔찍한 악몽을 꾸게 만든 것을 마주하면, 그 두려움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신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가장 찾고 싶던 진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제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가 이끄는 곳으로 어디든 망설임 없이 따라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 길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최소한 자존심을 잃게 되고, 심각하게는 온전한 정신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잃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저는 모든 사람이 이런 선택 앞에 선다고 믿습니다. 이 사실을 말시 못하거나 인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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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내리고 행동을 취할 때마다 이 선택을 합니다.
앞서 역사가 제 생각과 행동을 길들인다고 말씀드렸지요. 이 깨달음을 따라가다 보니(일단 깨닫고 나니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역사를 하나의 심리적 현상으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제 생각과제 자신이 역사의 산물이라면, 곧 역사가 제 안에서 형태를 갖추고 제안에서 제가 누구인지 결정할 것이었습니다. 이 생각은 제가 어딜 가든지 아버지의 심상이 제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심상은 아버지의 행동 방식과 기대, 아버지가 하셨던 일에 대한 이야기 등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 심상은 어릴 적제 행동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아버지가 곁에 없을 때도 저는아버지가 따르던 규칙(그리고 제가 아버지를 모방하며 배운 것과 아버지가 칭찬과 처벌을 통해서 제게 가르쳤던 것)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지요. 제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심상은 아버지에 대한 꿈속에서 인격체로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각자의 마음에는 부모의 심상이 담겨 있고, 그 심상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그 사람의 행동을지배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따랐고, 제가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규칙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린 시절 전수받았던 것을 그저제게 전해 주신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께 배운 대부분의 것들은 한 번도 말로 표현된적이 없는 것이며, 아버지의 행동을 지배하던 (그리고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제가 배웠던) 규칙은 아버지의 행동 속에 암묵적인 상태로 남아 있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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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으로 이제는 제 행동 속에 암묵적인 상태로 남지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저는 언어를 배웠습니다. 대부분은 보고 들으면서 배웠고 일부는 의도적인 가르침을 통해 배웠지요. 그리고 문법에 맞게 말을 하면서도 언어 산출의 토대가 되는 문법 규칙을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행동하고 세계의 본질에 대해 가정을 하면서도 자기 행동과 가정의 토대에 있는 가치와 신념에 대해는 그다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구조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어 온 것이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 과정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행동과 인식을 지배하는 구조 역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져 왔으며 역사를 구현합니다.
이런 생각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떠오르자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이전에 저는 역사를 하나의 단일 현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고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가 제 생각과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어떤 의미에서 제 머릿속에 있고, 또 그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거의 확실히 아는 게 없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쓰는 것은 역사의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서양 문화를 제외한 모든 문화권은 객관적 사건'에 토대를 둔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53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문화권의 역사는, 인도나 중국, 고대 그리스-로마처럼 고도로 발달한 문화의 역사조차 신화적이다. 이 말은 곧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과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대신 사건의 의미를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한다는 뜻이다.
둘째, 서로 전혀 다른 문화일지라도 모든 문화는 대체로 예상 가능한 경로를 따라 발달하며, 각 문화의 신화들은 서로 유사성을 지닌다. (이것은 마치 모든 언어가 최상위 분석 차원에서는 문법 구조를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화가 발달하는 경로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문화 발달을 관장하는 규칙은 신경생리학적 구조가 심리학적으로 표현된 결과이다. (이 논지는 증명하기가 가장 어렵겠지만, 이미 이 논지에 유리한 확실한 증거를 몇몇 가지고 있고, 신경해부학과 신경심리학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증거가 더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셋째, 역사에 대한 신화학적 기록은 일반적인 서구의 실증적 기록만큼이나 '진실'이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지만, 이 두 가지 진실은 성격이 다르다.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사건'을 설명한다(혹은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신화와 종교는 발생한 사건의 의미를 설명한다(그리고 일어난 사건이 의미 없는 사건이라면, 그 사건은 우리와 무관하다.)
여하튼 제가 쓰고자 하는 내용을 이 편지에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몇 가지 역사적 경향을 설명하고 그것이 개인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이 편지에서 쓴 방식대로 설명해 보려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역사의 측면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하는
· 의미의 지도
1854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가능한 해결책이 어디에 있는지, 그 해결책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 책에 대해 더 듣고 싶으시다면 추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누군가가 제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지 없을지는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발견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 생각이 너무 광범위해서 한 번에 명확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을 글로 전부써 내려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논리적인 언어로 전달하려고 하는 지식은 대부분 지금까지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늘 미술과 음악과 종교와 전통을 매개로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전수되어 왔던 것이어서 마치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다른 언어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의 방식입니다.
여하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 지내신다니 기쁩니다. 소득세 신고를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86년 11월
아들 조던 올림
내가 인간을 악으로 몰아가는 동기의 기저에 놓여 있는 모순의 본질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후 거의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끔찍한 미지의 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집단 정체성을 수용한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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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퇴폐주의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현실의 영토이든 심리적 영토이든 자기 영토를 지키려 애쓴다. 영토를 지키려는 경향은 곧 불가피하게 타인에 대한 증오와 전쟁을 낳는데, 현대 사회는 전쟁을 감수하기에 너무나 강력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대가 승리를 거두게 둔다면 혹은 상대를 계속 존재하게 둔다면 개인을 보호하는 구조가 해체되고 상대에 예속되어 가장 두려워하던 미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 문제와 같다. 정서 조절을 위해서는 신념 체계가 필요한데, 신념 체계가 있으면 그 체계들 간의 갈등을 피할 길이 없다.
이 끔찍한 모순을 인식하자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과거에는 무슨 문제든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모순을 충분히, 아니 온전히 이해한 것 같은데도,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어느 쪽도 택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신념 체계를 갖는 것과 갖지 않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을 떠올릴 수가 없었고, 두 쪽 모두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내 믿음은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융의 조언을 따라 꿈으로 관심을 돌렸다. 융은 다른 출처의 정보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는 꿈속에서 유용한 정보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하던 그 시기에 꿈조차 말라 버렸고 아무런 깨달음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했다. 정말 괴로운 시기였다. 수년간 치열하게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고, 이를 통해 그런 악행을
1856 - 의미의 지도
방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온당치 않아 보였다. 나는 그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꿈이 맹렬히 내게 돌아왔다. 그 악몽은 수년 전나를 탐구의 길로 내몰았던 핵전쟁에 관한 꿈만큼이나 무시무시하고 강렬했다.
꿈속에서 나는 이층집에 살고 있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난 후에 다락방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잠이 들고 나서 꿈을 꾸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꿈을 꾼 것이다.
나는 웅장하고 어두운 성당의 둥근 천장 아래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었다. 샹들리에는 천장에서 수십 미터 아래에 매달려 있었는데도 여전히 너무 높아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성당 책임자들이었는데 내가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어서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 매달린 것은 내 자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어쩌다 보니 거기 있게 된 것이었고,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깼을 때 나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다시 잠들어서 이 사실을 부인하려 했다. 실제로 거기 갇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꿈에서 그런 일을 겪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전의 무의식적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었고 고통 속에 깨어 있었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57
그러고 나서 나는 바닥에 내려왔는데, 내려오는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성당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왜 거기 있었냐고 항의했지만 그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편안한 내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작고 창문이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마치 보일러실 같았는데, 집 1층의 중간에 있었다. 거기에 작은 일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진짜 내 침대인 것처럼 보였다.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가 다시 잠에 빠지려 했을 때 이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때문에 나는 분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 바람이 나를 성당 중앙에 있는 샹들리에로 되돌려 놓을 것임을 알았다. 나는 바람에 맞서 싸우려 했으나 경련이 일어나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고, 부분적으로나마 꿈에서 깨어났다.
진짜 내 방에 있는 침대 뒤쪽의 창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고 바람이 거기서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기를 쓰고 창문을 닫고서 돌아섰다. 그때는 분명 잠에서 깬 상태였는데도, 내 방과 옆 방 사이의 제법 트인 공간에 고딕 성당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두 쪽짜리 여닫이 문이 나타났다. 나는 몸서리쳤고 환영은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공포를 떨쳐 내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꿈을 꾸기 전날에 나는 성경의 복음서를 많이 읽었다. 꿈의 첫머리에서 과음을 한 건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이를테면 영혼을 흡입한 것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그 꿈을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영혼'이라는
- 의미의 지도
858
단어가 바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뉴마 pneuma'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에서 바람은 물 위에 움직이고 있었고, 하나님은 아다마adamah, 즉 물질에 바람 혹은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성당의 중심점에 있었고 거기서 빠져 나갈 수 없었다. 성당은 혼돈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성한 공간'이며,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성당의 중심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장소와 우주의 중심을 동시에 상징했다. 내 꿈속에 나타난 모든 힘들은 내 바람과 정반대로 나를 그곳에 깨어 있는 상태로 데려다 놓으려고 모의했다. 당시 나는 이 꿈이 암시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내가 다음의 인용문에 나오는 것과 같은 꿈의 의미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요한복음 14장 12절)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본 사람은 누구든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의 안에 있다. 제자들은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제자들 안에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은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성령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떠난 뒤에도 남아서, 사도들을 그리스도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신과 인간이 서로 안에 깊이 들어가게 하는 존재이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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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서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내면 무슨 일이 생길지 결과는 명료하다. 그리스도의 사업이 개인에게 넘어가고 개인은신비의 전수자가 된다. 연금술에는 이런 식의 발전이 자연스럽게 예견되어 있었는데, 이는 연금술이 성령과 지혜의 신을 따르는 종교가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637
기원 신화에서는 대개 낙원이 만물의 근원으로 그려진다. 태초의낙원은 인류의 타락 때문에 파괴되기는 했지만 인류의 역사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이기도 하다. 인류의 타락을 그린 신화들을 보면, 인간의 의식이 충격적일 정도로 고조된 결과, 다시 말해서 인간은 나약하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 인간의 경험세계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들이닥쳤다. 인간이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본질을 깨달은 상태에서 낙원을 재수립하려면 의미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범적 행동 양식이 나타나야 한다. 구체적으로 구원을 받을 방법을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영국의 오랜 전설은 셋이 에덴동산에서 목격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동산 중앙에 빛나는 샘이 솟았고, 거기서 네 물줄기가 흘러 온 세계를 적셨다. 샘 위에는 가지와 잔가지가 무성하지만 늙어서 나무껍질과이파리는 사라진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다. 셋은 이 나무가 바로 자기부모가 열매를 따 먹은 그 나무라는 것과, 바로 그 때문에 지금 그 나무
• 아담의 셋째 아들.
860 - 의미의 지도
가 벌거벗은 채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허물도 없이 헐벗은 뱀이 나무 주위를 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브를 설득해서 금지된 열매를 따 먹게 만든 뱀이었다. 셋이 낙원을 재차 바라보니 나무의 모습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나무는 이제 나무껍질과 잎으로 뒤덮여 있고, 나무 꼭대기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강보에 싸여서 아담의 죄로 인해 통곡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 아기는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표상하는 아담의 몸으로부터 자라난 나무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 638
세계의 축인 이 나무는 인류의 타락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나무껍질도 이파리도 잃었다. 자신의 첫 열매인 자기이해 때문에 충격에 빠진 나무는 힘의 원천을 잃었다. 두 번째 열매는 풍요로운 삶과, 건강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 이는 곧 인류의 타락이 초래한 결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 즉 구세주이며,639 그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신성한 개인이다. 640 이런 관념은 그림 49641에 나타나 있다.
이와 유사한 구원 사상이 동양에도 존재한다. 부처는 성숙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먼저 고통과 환멸을 겪어야 했다(부처의 이름인 싯다르타는 목표 달성'을 의미한다). 342 현실 세계의 고통을 초월한 자인 ‘깨달은 자'는 '역사' 속에서 부처라는 인물로 등장하기는 해도 영원한 정신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정신을 말한다. 이런 정신은 전 인류와 위대하고도 무서운 어머니를 영원히 지배하는 정신이다. 그림 50043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보살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61
그림 49. 지식의 나무에 다시 달린 신비한 선악과와 그리스도
은 동양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이다(혹은 보혜사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보살은 변형적 불에 에워싸인 하늘의 터널 위에 중첩되어 표현되어 있다. 터널은 그림에 나타난 공간의 차원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는 영웅적 정신을 심상으로 그려 낸다.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임에도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에게 역사 이전부터 영원히 실재하는 성격을 부여한 것이나 그리스도가 죽고 나서 '진리의 영'을 남겼다고 생각한 것도 모두 같은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타락과 구원의 신화는 지금 얼마나 편안하든 현재 상태에 만족하
862 · 의미의 지도
그림 50. 보살의 영원한 귀환
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열망과 경향을 그려낸다. 이 신화들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낸다. 이처럼 타락과 구원의 순환을 그려 낸 신화들 중 가장 심오한 것들은 인간이 현재 상태에 불만을 갖게 되는 원인으로 고조된 의식(깨어난 의식)을 꼽는다. 더 나아가 그런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의식이 질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더 근본적으로는 의식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에 참여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면 기존의 노력과 결과물에 불만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63
을 느끼고, 다시금 새로운 주기에 돌입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양식이다.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일상적 행위는 목표 지향적이기에,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정의하는 가치 체계를 의식적 혹은 전통적으로 수용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인간의 관점에서 삶이란 가치 있는 것. 바라는 것, 마땅한 것에 비추어 행동하고, 가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당히 눈을 감고 지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가치 체계에 대한 믿음, 더 심각하게는 가치에 위계가 있다는 생각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심각한 우울과 심리적 혼란과 실존적 불안이 엄습한다.
인류의 타락에 관한 신화는 인간의 자의식 발달을 커다란 비극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변칙으로, 우주의 구조를 영구히 뒤바꾸고 인류를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건으로 그린다. 하지만 바로 이런 타락 때문에 개인은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의 역할과 문화의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바로 이 타락이 인류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인류가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았을지어땠을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제 와서 무의식 상태로 남는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일 것이다. 원죄는 모든 사람을 물들였고 이전으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
타락한 이후의 인류 역사는 대체로 편안한 종교적 환상의 틀 안에 공고히 머물러 있었다. 그 환상은 존재의 비극에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근대 사상가들은 그 환상을 방어 기제로 보았다. 인간이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나서 생긴 실존적 불안에 대항하기 위해 환상의 장벽을 세웠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환상과 현실은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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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자르듯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분명 망상의 안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현실을 부정하면서, 견디기 어렵도록 무서운 세계에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상이 언제나 광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상상을 활용한다고 해서 늘 퇴행하는 것도 아니다. 상상과 환상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마주한 미지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므로 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활용된 환상은 망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지를 이해하는 첫 단계이고, 그 결과 상세하고 실증적이며 의사소통 가능한 지식을 얻게 된다. 상상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현실 세계를 창조할 때도 활용된다. 상상의 쓰임새는 결국 누가,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험주의 이전 시대에는 미지를 양가적인 어머니로 상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유아기적 환상에 빠져 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활용해서 낯설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했다. 미지를 설명하려는 이들의 첫 시도에 경험적 타당성이 없다고 해서 그 설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래 경험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자기기만적인 거짓말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웅을 숭배하는 사람 역시 단순히 현실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 개인으로서 미지를 대면할 준비와 의지를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영웅의 행동 양식을 수용하고 자신의 삶에서 영웅처럼 창조를 이어 갈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위대한 신화는 이제 흘러간 과거사나 다름없고,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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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식인으로 여기는 대다수 서양인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신화가 역사를 대하는 관점은 물질적, 실증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면 현실성이 없다. 그럼에도 서구의 도덕률은(법체계로 명확한 형식을 갖춘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개인에게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는 신화적 세계관에 토대를 둔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아주 특이한 처지에 놓여 있다. 자신의 모든 행위의 토대가 되는 도덕 원칙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는 신화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개별 인생의 본질적 비극이 다시 드러났기에, 이는 두 번째 타락으로 간주할 만하다.
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정없이 파괴된 것은 단순히 경험적 진리를 추구한 결과가 아니었다. 서구의 도덕률이 크게 흔들린 까닭은 경험적 사실과 도덕적 진리를 혼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혼동에는 부수적 이득이 따르는데, 바로 그 이득이 혼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이득이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인식하는 데 따른 절대적 책임을 개인이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책임은 바로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고 타인의 개성을 존중할 때 따라오는 시험과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확신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내야 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규율이 잡혀 있어야 한다.
도덕적 진리를 부인하면 자신의 비겁하고 파괴적이고 퇴폐적인 방종을 합리화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진리를 거부하는 데 따르는 가장 강력한 보상이며, 거짓을 따르는 주요 동기이다. 이러한 거짓은 무엇보다 개인을 위협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위협한다. 그 밑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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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에는 개인이 인생의 비극을 견뎌 낼 수 없으며, 따라서 경험 세계 자체가 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두렵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그 무엇보다 위험한 거짓말은 개인의 책임을, 개인의 신성을 부정하는 거짓말이다.
개인이 신성하다는 사상은 수천 년에 걸쳐 꽃을 피웠으나 여전히 직접적인 공격과 교묘한 반대로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사상의 밑바탕에는 개인이 바로 경험이 발생하는 중심지라는 깨달음이 놓여 있다. 현실에 대한 지식은 모두 경험에서 온다. 그러므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경험이라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점차 펼쳐질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신성한 것은 경험의 객관적 측면이 아니라 주관적 측면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동물이며, 각 시대가 규정하는 견해와 가능성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신화적 세계관으로 본 모든 개인은 유일한 존재이며, 새로운 경험의 집합이고, 새로운 우주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능력, 창조 과정에 참여할 능력을 갖춘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창조적 능력을 표현할 때 인생의 비극적 조건은 견딜 만하고 놀랍고기적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인간이 아동기에 경험하는 낙원 상태는 의미 있는 대상에 온전히 몰두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몰입은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진솔하게 발현시킨 결과이다. 관심은 미지를 개인이 주관적으로 결정한 방향과 속도로 진솔하게 추구할 때 생긴다. 자애로운 얼굴의 미지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며 모든 중요한 가치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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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문화는 개인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개인을 훈련하고 능력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미지를 대면하는 개인의 힘을 키워 준다. 아이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문화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아이는 부모가 제공하는 보호막 아래에서 미지를 탐험한다. 하지만 부모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어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각자가 스스로 문화의 신념과 목표를 받아들이고 집단 정체성을 획득한다. 두 번째로 맞이하는 이 보호 체계는 개인의 능력을 놀랍게 확장시키고 가다듬는다.
위대한 혼돈의 용은 개인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좇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의지와 희망을 집어삼키는 용과의 싸움은 영웅이 신화의 세계에서 겪는 싸움이다.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따라가면 반드시 이 용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허용되기만 한다면, 개인의 정신에 깃든 위대한 힘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영웅은 자발적으로 용과 전투를 벌인다. 거짓말쟁이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며, 개인으로서의 주관적 관심도, 발전할 기회도 모두 포기한다.
관심은 곧 의미이다. 의미는 개인이 성스러운 적응의 길 위에 있음을 드러낸다. 거짓말쟁이는 안전과 안정을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저버린다. 이는 곧 의미도 신성도 모두 저버리는 행위다. 위대한 어머니와 위대한 아버지를 달래려고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식의 거짓말은 진실한 경험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내뱉는 말이다. 이 거짓에 속아 넘어가면, 세계를 무대로 자
- 의미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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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개인성을 시험하며 자신의 능력을 확장할 기회를 잃는다. 그 결과 인격이 약화되고 인생의 의미도 고갈된다. 의미 없는 인생은 의지할 곳 없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기에 치명적이다. 의미 없는 인생은 구원의 희망이 없는 비극이다.
인생의 의미를 포기하면 반드시 악마의 적응 양식을 따르게 된다. 인간은 의미 없는 고통과 좌절을 증오하기에 그것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만하게 군 탓에 삶이 견딜 수 없어지면 삶에 복수를 감행하려 든다.
부활이란 곧 개인의 능력을 확장하는 문화의 정체성을 수용한 이후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되살리는 일이다. 관심이 되살아난 개인은 미지와 기지의 경계로 향하며, 그 결과 사회가 확장된다. 현대 사회에서 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행동하고 역사의 경계를 확장한다.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 869